진실한 교회생활

 

내가 직장에 다닐 때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내가 모시던 국장님과 호젓한 시간을 가지게 되어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 나와 2-3년 동안을 같이 근무한 그분은 내가 전하는 복음을 진지하게 경청을 했다. 그리고는 한참을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을 하고 나서 나에게 사정을 하다시피 이렇게 말을 했다.

 

이유빈씨 말대로 내가 예수를 믿으면 여기서 국장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그의 말은 그가 예수를 믿으면 회사 안에서 자기가 해오던 방식대로 회사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그렇게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어느 뷔페식당에서 그를 한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그는 어느 케이블 방송사의 사장을 맡아서인지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는 그분의 생각이 가끔 떠오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이었음에도 여러 방면에서 매우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의 대답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직장생활도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는 할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런 생각과는 달리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은 교회에서는 교인처럼 살고 또 세상에서는 아무런 가책도 없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이중적인 생활을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있다.

사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양심조차도 없는 종교인들로 우글거리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에서는 마치 예수를 누구보다도 잘 믿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예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종교의식에 진실한 모습으로 참여하지만, 가정에만 가도 야수(野獸)와 같이 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한 교회에서 같이 예배를 드려도 집에 가서는 원수로 변하는 고부 관계가 얼마나 많으며 가정에서조차도 자식들에게 존경은 고사하고 인정받기도 힘든 인격들이 교회 안에서는 상석에 앉아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 있다. 교회에서는 장로요 집사이지만, 직장에서는 불신자만도 못한 마음으로 살고 행함으로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인격들을 세상에서 나는 많이 보았다.

역시 오래전 이야기지만 내가 직장에서 일할 때에 협력업체에 근무하는 영업부장과 함께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에 나보다도 나이가 열 살은 더 많은 사람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인쇄회사의 영업부장이였다. 나는 그에게 내가 거짓된 종교생활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받은 사실을 간증하고 그는 나와 함께 일하면서도 자신에 대하여서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또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에 대해서는 사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인쇄회사 영업부장이라는 사실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업무관계로 자기회사 앞에 있는 다방에서 나와 만나서 차를 한잔을 했다. 그 때에 그는 자신이 서울의 어느 감리교 장로임을 고백하고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이유빈씨 내가 감리교 장로입니다. 주일이면 가운을 입고 강단에 올라가서 대표기도를 하지만 여기 이 골목에서 거짓말을 아니 하면 이 업을 할 수 없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면서 그렇게 이중생활을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장로인 것을 숨기면서도 내가 믿음으로 살고 때만 되면 사람들마다에게 주게 받은 사랑을 간증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많은 찔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후에 그는 어떻게 사는지 들은 바가 없다. 그가 이중생활을 아파했던 것과 같이 그의 이중생활을 청산하고 진실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언젠가는 서울의 어느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했는데 내가 전하는 말씀 중에서 무슨 단서를 잡았는지 어느 장로가 나에게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고 물어보면서 그는 나에게 한참이나 선배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 내가 다니던 직장의 비서실에 있는 자기에게는 후배가 되고 나에게는 선배가 되는 이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비서실의 선배를 찾아 갔는데 안부를 전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에게 질문을 했다.

 

어디서 만났어?”

교회에서 만났는데요.”

그 사람 교회 다녀?”

, 장로님이에요.”

그래? 그 사람 별명이 ooo 인데……

 

그가 말한 ooo 은 너무나 공개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험한 말이었다.

그 두 분은 같은 사관학교 선후배간이고 군에서 이십년 이상을 같이 근무했는데 그 장로님에 대한 후배의 사회적인 냉정한 평가는 ooo 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것은 교회생활이 교회 안에서만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교회생활은 교회 안에서만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믿음으로 사는 교회생활은 교회 안에서만 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교회 안이 아니라 세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교회 안에서 우수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세상에서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믿음으로 사는 생활을 사는 것이 세상에서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생활은 우리가 받은 영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강력한 생명력의 표출을 말하는 것이다. 이 생명력은 감출수도 없고 억누를 수도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의 믿음이 강하면 그의 영적인 생명력이 강한 것이고 그 반대로 어떤 사람이 믿음이 연약하면 그의 영적인 생명력이 미약한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빛으로 말한다. 빛과 같이 강한 표출력을 가진 것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4-5)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의 생명을 받은 빛의 자녀들이다. 빛을 감출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생명은 세상에서 감출수가 없다. 이 생명을 받아서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생활도 감출수가 없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빛인 주님의 제자들은 감출 수 없는 인격과 생활을 세상에서 사는 것임을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4-16)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도록 예수가 보여지는 증인의 권능을 주시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8)

 

그것은 전도하는 권능이 아니다. 예수가 보여 지는 인격으로 고침을 받는 권능이 성령이 임하심으로 받은 권능이다. 그러므로 누가 예수를 믿어 받은바 영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면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숨길 수 없는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만일 어느 누구에게 이렇게 빛과 같은 생명력이 표출되는 생활을 찾아 볼 수 없다면 주님은 물론이요, 그 어느 누구도 세상의 안 믿는 불신자 삼척동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교회마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 가득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어느 한 교회를 표본으로 뽑아서 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믿음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를 조사를 한다면 단 한명도 말씀으로 믿음의 생활을 사는 사람을 찾지 못할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사랑으로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더 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주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야 말로 교회생활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것이 믿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모습 그대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어 교회 일을 하면서 교회의 상석에 앉는 것을 즐거워하며 사람들에게 높임과 칭찬을 받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지만 알맹이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구원을 받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생조차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인격과 생활로 말하면 그들은 모태로부터 나온 이 후로 조금이라도 변화를 받은 사실이 없는 사람들이다. 교회 안에 들어 와 있는 것만 다르며 세상 사람들과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 행하고 일하는 것이 조금도 다름이 없는 자들이며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도 정욕대로 행하고 기롱하며 서로 다투고 싸우며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18)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그 옛날 바리새인들과 같이 교회 안에서는 믿는 사람처럼 능숙하게 행하고 교회 밖에서는 세상 사람처럼 사는 생활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와 세상의 두 가지 세계를 능수능란하게 옮겨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기들의 모습이 헛되고 거짓된 것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중생활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이중생활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잘 보인다. 세상죄인들이 거하는 어두움과 교회 안에 있는 종교인들의 어두움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처음부터 있었던 어두움이지만 후자는 스스로 외식으로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서 자기를 속이는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참 빛이 비추어도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9-11)

 

그러나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단번에 빛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스스로 본다고 하던 종교인들 곧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혼이 눈이 어두운, 곧 내면세계가 어두움 가운데 있었던 유대인들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중적인 종교인들은 교회 안에서는 잘 분간되지 않지만 세상 죄인들에게는 금방 그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도 유대인들은 세상 이방인들에게도 멸시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들이 된 것이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17-24)

 

오늘날도 전도를 하다보면 교회를 다니는 누구 때문에 예수를 안 믿겠다는 사람들을 쉽사리 만날 수 있다. 어떤 이는 어느 목사 때문에 또 다른 이는 어느 장로 때문에 또 어떤 이는 교회 다니는 마누라 때문에 각기 예수를 못 믿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이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이 있다. 벌써 사십여 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이런 현실을 잘 알지 못한 채 직장에 들어가자마자 내가 믿은 예수를 직장동료들에게 시간이 나는 대로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사람이 나에게 해 준말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유빈씨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다른 사람들을 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개떡같이 살다가 죽어서 천당만 가는 것만이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나는 그런 예수를 안 믿겠어.”

 

그 사람은 자기 주변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질적으로 낮은 도덕적인 수준으로 사는 것을 보면서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런 말을 했다. 사실 오늘날도 따지고 보면 이 말을 한 사람 앞에서 자유로울 교인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안 믿는 불신자들 앞에서도 불의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올 때가 임박한 이때 그와 같이 이중적인 플레이를 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믿음 안에 있는지를 시험하고 확증함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참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입술의 열매이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람만 나타나면 죄인이었던 내가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간증하는 사람은 구원받은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고 기도생활이 있어서 그의 생활이 말씀으로 살아지는 사람이다.

셋째는 교회 안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 번째 사랑과 같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이다.

넷째는 날마다 그의 인격이 변화되는 사람이다. 많이는 아니라도 날마다 미세하게나면 변화되는 생활을 사는 것이 가능한 것은 내안에 들어와서 나와 하나가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을 살기 때문에 주를 닮아 변화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 변화되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나 때문에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나 때문에 주를 따르는 주의 제자가 되고 생산성이 있는 일군이 된 열매들이 나타나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들이 온전히 충족이 되지 않으면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주님의 긍휼의 보좌 앞에 엎드려 불쌍히 여겨주시고 자기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시도록 부르짖고 간구해야 한다.

 

(*.154.7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