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적인 부흥회나 집회가 아니라 주일마다 강단에서서 말씀을 전하게 되면

회중석에 있는 교인들의 필요가 한 눈에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말씀을 듣는 사람을 보면 구원받은 영혼인지 아닌지가 눈에 들어 오게 마련입니다.

구원받은 영혼은 말씀을 들을 때에 맛있는 양식을 먹는 모습과 자기의 영혼을 아파하는 모습으로 말씀을 듣습니다.

때로는 말씀을 듣는 얼굴의 표정만 보아도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말씀을 듣는 영혼들이 생활속에서 당하는 고통과 연약함이 눈에 들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질병으로 고생하는 영혼들의 아픔이 보입니다.

때로는 물질의 고통과 가난으로 고생하는 영혼의 아픔도 눈에 들어 옵니다.

때로는 가족과의 갈등으로 영혼이 편치 못한 모습으로 말씀을 듣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옵니다.

때로는 귀신이 들려서 억눌려 있는 영혼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모든 것들은 자의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중에 하나라도 주님이 눈을 열어 보게 하여 주시지 않으면 볼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안을 밝게 하여 보여 주시는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어집니다.

또 귀신 곧 악령에 잡힌 영혼을 보는 것은 영분별의 은사를 주께 받은 사람만 볼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회중석에 있는 영혼의 모든 필요가 보이지 않는 사람은 목회나 설교를 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소경들이기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는 소경은 물론이요 영적인 눈을 뜬 영혼들을 인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안타까운 일중에 하나는 이와같은 소경들로서 강단에 서는 사람들이 그 수를 셀수 없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세히 살펴 보면 구원을 받은 사실이 없는 허다한 사람들도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이 오늘날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들중에도 영적인 눈이 어두워서 교인들의 영적인 필요에 눈이 감겨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밖에 있는 영혼은 고사하고 교회안에 있는 영혼도 주님의 사랑으로는 사랑할수 없는 지경가운데 있습니다.

만일 의사나 간호사가 소경이라면 어떤 환자를 도울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런 일이 이세상의 어느 병원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요 그병원의 결국은 뻔한 것이 아니겠습나까?

그러나 그런 교회와 목사들은 이땅에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교회의 아픔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주님과 같은 사역을 전혀 할수 없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무리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또 병으로 고통하는 이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막 1: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막 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막 1: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스플랑크니조마이"로 "불쌍히 여기다". "불쌍한 마음으로 감동되다"라는 뜻으로 불쌍한 마음에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가시는 곳마다 영혼들의 영적인 필요뿐 아니라 육신의 필요를 보시고 그 한사람 한사람을 마음에 뭉클함으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굳이 목사가 아니고 목회를 하지 않는다 하여도 주님의 사랑을 받고 영생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식구들 특히 자녀들의 영적인 핑요와 육신의 아픔때문에 민망히 여기며 가슴이 뭉클하여 그들을 사랑하는 아가페 사랑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같은 사랑을 주님게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마음이 아픈 것은 교회마다 사랑이 없는 교회가 되는 것은 사랑을 해주고 안위해주기는 커녕 교인들의 영육간의 아픔을 돌아보는 눈이 없는 사람들이 목사며 장로요 또 피차에 교인들로서 사랑할수 없는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교인들에게 아픔을 주는 사람들이 목사요 장로요 교회의 지도자들이며 그들이 그일에 앞장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한일을 너희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은 곧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서 부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주님이 하신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옥에 갇혀 있던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주님을 요한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주님은 무리들이 배고파할 때도 오천명씩 또 사천명씩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주님이 하신 일을 하는 것이 목회요 사랑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이 사랑해주신것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리고 주님을 사랑할수 없었던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양을 치고 먹이고 어린양을 먹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하는 주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염소들인 악인들은 우리중에 가장 작은자의 아픔과 결핍을 부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버림을 받은 사실입니다.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주님의 말씀과 같이 버림을 받기로 정해진 왼편사람들은 주님께 하듯이 작은자의 필요를 돌아 보지 않은 것은 우연한 것도 아니라 영혼들의 결핍을 볼수 있는 눈이 없었기 때문이요 그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를 잘 못하는 것은 목회를 잘 못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교회생활을 잘 못하는 것도 그것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앞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 그와같은 사람들입니다.


멀리는 못가도 내자녀의 영육간의 형편을 민망히 볼수 있는 눈과 그의 필요를 채워 줄수 있는 주께 받은바 아가페 사랑이 필요한 것은 이때문입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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