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백신(2)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1

 

지금까지 지나간 이천년동안 나온 요한계시록의 해석중에 온전한 것을 찾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종말론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신학자들이 지난 500년동안 500명정도이며 무명의 사람들도 많이 있고 거짓선지자들로 말하여 지는 이단들은 그수가 더 많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성경전체를 놓고 볼 때에 오류가 분명한 이론들을 주장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을 다른 성경 65권과 별도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사람들은 다니엘의 이상이나 에스겔의 이상도 일부러 성경과 연관을 피하여 생각을 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성경은 66권자체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이신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주심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경과의 연관을 피하고자하는 이유는 첫째는 무식하기 때문이요-신학자들일수록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그들이 쓴 책을 읽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둘째는 막연한 호기심-그것도 무식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때문이요 셋째로는 거짓말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함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구약의 예언이나 신약의 예언이나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은 실제로 역사속에서 일어날 것을 미리 말씀하셨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극소량의 예언의 말씀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역사속에서 이미 일어나고 성취된 것들이다. 예언서는 역사를 도외시하면 그 해석이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배제하는 사람들도 역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알아도 깊이 알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단들은 역사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은 몰상식하리만치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들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서 이용하는 폐단을 보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안이나 밖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는커녕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도 무지하고 뿐만 아니라 교회안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예 성경을 읽는 것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나 거짓선지자들에게 밥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앞서 말한대로 성경은 66권의 말씀이 다 한가지로 연결이 되어 있다. 이사야의 말씀과 같이 신구약성경의 66권의 말씀은 다 짝이 있는 것이다.

 

(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많은 주석가들이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이말씀을 전절의 솔개가 짝이 있고 들짐승과 이리와 숫염소와 올빼미와 부엉이가 함께 모이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솔개도 짐승들도 짝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짝이 없겠느냐는 반어법적인 표현을 한 것이다. 이사야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짝이 있다. 그러므로 말씀은 말씀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을 배제한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또 거짓선지자들이 말씀으로 말씀을 푼다고 하면서 자기의 뜻에 맞게 아무것이나 다 같다 붙여서 억지해석을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은 무식한 사람들의 지식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척 하면서 그들을 속이는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때문에 에스겔서와 하박국을 비롯한 소선지서들은 주석 책을 다시 써야할 정도로 그 예언을 하신 하나님의 뜻에서 너무나도 멀리 가 있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 신약성경에 관하여서도 100년전의 사람인 다니엘 스텔레는 헬라어시제를 고려하지 않고 쓴 주석 책들은 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을 했는데 그의 주장이 맞다. 실상은 주석 책 이전에 성경번역자체가 헬라어 시제에 반하여서 행해진 것을 보는 것은 개탄스럽기가 그지 없다. 일례를 들자면 요한계시록 20장의 1절에서 6절까지의 본문도 에어리스트 시제를 전혀 무시하고 번역을 했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자들에 의하여 그 일들이 미래에 일어나는 일로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종말론의 폐단이 그 극을 이루고 있다. 이 부분은 여기서 자세히 다룰수 없고 나중에 다른 책에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하여 교회안팎에서 요한계시록을 임의로 추정하여 사사로이 푸는 악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 하는 자들은 예언의 말씀과 그 말씀대로 성취되고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들을 고의적으로 배제함으로 요한계시록과 예언서들에 신비함을 부여하고 그 신비한 책을 자기들만이 풀 수 있다고 거짓자랑을 하면서 무식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망하게 하는 일을 한 것이다. 물론 그 모든 배경에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창세기강해를 시작할 때에 해외에 있는 제자중에 한사람이 왜 하필이면 창세기입니까라고 나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 학자들이 창세기를 해석하면서 거짓말과 무식한 말들을 많이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창세기신학을 언급하면서 그것은 지뢰밭이라고 표현을 했다. 그러나 창세기에 비하면 요한계시록은 더 거짓말의 집중적인 대상이 된 책이다. 그것은 교회가 요한계시록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을 내놓지 못했고 교회안에 있는 적그리스도들과 거짓선지자들이 거짓말을 많이 해 놓았기 때문에 이단들을 포함해서 교회안팎에서 거짓말로 이용을 해 먹기에 가장 좋은 책이 된 것이다.

교회안의 신학자들이나 교회 밖의 거짓선지자들이나 차별이 없이 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의 해석을 저마다 내어 놓음으로 교회안에 혼란만 부추기고 그 혼란은 거짓선지자들이 교회안에 있는 영혼을 사냥하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해 온 것이다. 그 결과로 그런 이리와 같이 무자비한 이단들은 무지몽매한 교회를 공격하고 그 안에 있는 영생도 없고 성경도 모르는 무식한 교인들을 몰수히 도적질해가는 일들을 해 왔다. 그래서 교회는 본의 아니게 거짓선지자들이나 이단들에게 교인들을 공급하는 공급처가 되다시피 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적그리스도라는 단어조차도 없다. 소위 종말론이라고 하는 것들에 적그리스도를 등장시키는 것은 마귀의 음흉한 궤계이며 거짓말이다. 그것은 교회와 많은 성도들을 두려움에 빠뜨리게 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 곧 교인들을 미혹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는 이단들만이 아니라 정통교회안에 있는 목사나 신학자도 다 같은 것을 원하여 교인들을 두려움에 빠뜨리기를 좋아하여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짐승은 물론 적그리스도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적그리스도는 세상 끝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짐승은 이미 역사속에 나온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짐승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겠다.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는 요한이 쓴 서신서에서만 네 번 등장하는 단어이다. 거짓선지자는 구약에도 등장하고 신약에서도 언급이 되며 주님도 거짓선지자에 대한 경고를 하셨다. 요한 일서 4장의 말씀을 보면 적그리스도가 거짓선지자이고 거짓선지자가 적그리스도이다. 요한은 그의 서신서를 AD 92년경을 전후해서 썼는데 그 때에 이미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음을 경계한다.

 

(요일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 말씀대로 적그리스도는 어느 한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가 세상 끝에 나타나는 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아주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와 같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가리고자 시도하는 마귀의 궤계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시작된 것을 기점으로 하여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 세상의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에 반하여 일어난 것이 적그리스도의 세력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때에 벌써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이다.

한가지만 더 말하고 지나 가자면 요한계시록에 대 환란은 없다. 마귀와 그에 속한 자들을 멸망시키는 아마겟돈전쟁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지면이 부족하고 시간이 부족하다. 여기서는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에 대하여서만 말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와같은 것들은 나중으로 미루고자 한다. 요한은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거짓선지자를 이렇게 정의한다.

 

(요일 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요일 2: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적그리스도가 하는 거짓말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에 보좌에 앉아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가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각사람의 속에 성령을 주심으로 완전한 그리스도의 통치가 각사람의 속에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와같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부인하고 거부함으로 사람의 다스림가운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역사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들을 부인하는 것이며 또한 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이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영생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거듭난 사람인가 아닌가의 차이이며 성령을 받았는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영생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며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아직도 사망가운데 있는 것이며 영생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들을 시인하고 아버지를 시인하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안에 아들을 부인하고 아버지를 부인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한사람도 없다. 교회안에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그런 사람은 교회에서 나가야 할 것이다. 혹 부모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친구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직장상사나 힘이 있는 사람에 의하여 강제로 교회를 다녀도 어떤 형태로든지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사람들만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러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며 영생이 있는 사람인가? 그것은 아니다. 만일 누가 그렇다고 고집을 한다면 그사람은 예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필요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예수가 자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기 영혼을 구원한다고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당치 않은 말이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교회안에 셀수 없을정도로 많이 있다.

그렇다면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부인하는가? 그들도 입으로는 다 예수를 시인하고 그리스도를 시인한다. 몰몬교도 예수를 시인한다. 여호와의 증인도 그리스도라는 말을 입에다 달고 다닌다. 신천지도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한다. 모든 이단들이 예수를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를 믿어서 예수를 말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단언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단에 속한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절대 아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시인하면서도 그들의 영혼과 인격과 생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지도 않고 닮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지만 생활과 관계없는 예배를 드린다. 그들은 성경공부를 하지만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고 깨달을 뿐이지 거기 있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것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공교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통교회안에 속해서 단지 그 교회를 다니고 교회생활을 하고 교회를 하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의 생활이 그것을 증명하고 그들의 열매가 그것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나부터도 그랬다.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도 그리스도도 무엇인도 모르고 교회를 왔다갔다 하기만 했다. 그 때에 내가 다니던 교회안에는 나와같은 사람들이 거의 전부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신학자들은 예수를 믿는가? 그들중에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은 성경도 아니고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이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공부와 연구대상으로 삼을 뿐이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앞에 엎드려 그와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이것은 굳이 힘써 주장을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다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일반적인 사실이며 현실이다.

신학자만 그런가? 목사들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지만 그중에 몇 가지 말씀이라도 순종을 하고 설교를 하는가? 신학자들보다는 좀 상황이 나을지는 모르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과는 거리가 먼 목사들이 무수히 많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신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성경을 단 한번이라도 읽고서 들어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이 되는 현실이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공부를 한다고 성경을 더 못 읽는 것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다.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맡으면 더 성경을 읽기가 힘들어 진다. 교회의 일에 바쁘게 쫓기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은 내가 아는 많은 분들 중에 은퇴를 한 후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성경을 읽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로 인하여 교회안에 경건한자들이 끊어지는 일이 오래전부터 일어났으며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종이 소경이고 귀머거리인 현실은 아직 까지도 계속되는 현실인 것이다.

 

(42: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소경이겠느냐

(42:20)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일이 이렇다 보니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사라진지가 오래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교회안에서 누구든지 붙잡고 그사람에게 당신은 성경을 잘 아십니까?”라고 물어 보면 열이면 열 아니요라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일반의 성도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성경에 통달한 목사를 만나본 적이 없다. 나만 그런가? 그렇다 나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보니 교회안에 성경을 모르는 무식한자들이 득실거리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들은 이단들보다도 못한 것은 성경을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단들은 거짓말이라도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교회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 영혼의 필요에 의해서 성경을 펴는 사람조차도 찾기가 힘들다. 나도 그랬다. 길에서나 집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말을 걸어오면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화부터 내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성경지식에 철두철미하게도 무식한 종교인이었던 것이다. 신천지라는 것이나 모든 이단들의 교주들인 거짓선지자들은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을 가지고 자기들이 마치 성경지식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교회안에 있는 많은 이들을 미혹함으로 그들의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교회안에 존재하는 무식함의 어두움 때문인 것은 아무라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가 성경에 무식한 것을 비교대상으로 삼고 비웃는 일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성경책은 아니 되고 요한계시록과 예언서들을 가지고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40년전의 일이지만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던 트레이시(Tracey)라는 몰몬교 신자가 있었다. 어느날 나는 그녀에게 복음을 전 하면서 핵심적인 질문들을 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많은 죄를 지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 죄를 위하여 성육신하심으로 이땅에 오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 시인을 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으며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었다고 말을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거듭해서 한 가지씩 한 가지씩 확인을 하면서 말할 수 없는 엄청난 큰 당황함 가운데 빠지게 되었다. 아주 정신이 나가다시피 한 것이다. 나는 주님 이상해요 나와 뭐가 다르지요?”라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몇 날 몇 일을 다녔다. 그리고 몰몬교의 특성상 그의 생활은 지나칠 정도로 도덕적이었다. 나는 주님에게 질문을 하다 못해 항변을 하기까지 했다. “주님 이러면 곤란하잖아요?”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주님이 그 문제를 가지고 나를 찾아 오셔서 답을 주셨다.

 

얘 그것은 머리로 믿는 거야

“.......”

배운 것을 머리로 믿는 다고 고백을 하는 것일 뿐이야

“.......”

그 마음에는 없는 것을 입으로 말한 것이지

 

찰라에 나의 마음에 빛이 번쩍하니 지나갔다. 아 그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서 바울의 말씀이 떠 올랐다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것은 입으로는 믿음을 시인하고 고백을 하지만 마음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로마 캐톨릭에서 만든 사도신경(로마캐톨릭은 사도들이 이것을 만들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역사적으로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만들어졌다고 니케아신경이라고도 이름을 붙인 이것은 380년경 밀란의 대주교 암부로시우스의 편지에 처음으로 등장을 하며 451년 칼케돈회의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러나 칼케돈 회의 이전인 4세기말 루피누스라는 사람에 의해서 이것이 사도들이 작성한 것이라는 거짓말을 퍼뜨린 것이 근간이 되어서 만들어 진 것이다. 이단으로부터 신조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은 무식한 사람들에게 이것만 외워서 고백을 하면 믿는 자로 쳐 주기 위한 교인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그것은 캐톨릭에서 시작되어 12세기경에는 공식적인 신조로 정착이 되었으며 종교개혁을 거치며 오늘날 개신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것이 되었다) 사도신경은 약간의 종말론적인 왜곡의 문제(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 이 부분은 디모데후서 41절을 왜곡한 것으로 나중에 따로 설명할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이 사도신경을 마음에서부터 중심으로 고백을 하면 눈물이 아니면 고백을 할 수 없는 고백이다. 나는 회심을 한 이후에는 항상 눈물로 사도신경을 고백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할 때는 주님의 삼십삼년의 고난이 눈앞을 스쳐 가니까 항상 울면서 그 고백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교회만 다니면서 종교생활을 할 때에 그것은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과 같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성가시고 번거롭기가 짝이 없는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마음에 믿어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지 않으면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만큼이나 엄청나게 큰 것이다.

주님도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은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다를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도 아니고 또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목사도 하고 전도사도 했다는 말-을 했다고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주님 앞에서 말할 것이지만 의외로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 “불법을 행하는 자라는 주님의 차디찬 대답일 뿐이며 오히려 주님은 그들을 주님앞에서 쫓아 내신다고 하셨다. 그들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한 사람들이지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것은 하나님께 배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배운 것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요 헛된 것들이다.

그것은 쫓겨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은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많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12: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12: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님 앞에서는 성경공부를 잘하고 성경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이 인정을 받는다. 주님의 뜻을 알았느냐 몰랐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는 바 그 말씀을 행했느냐 아니 행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것은 맞을 일을 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를 부인하는 것은 입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주를 부인하는 것은 행위로 부인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시인하지만 행위로 부인하는 자가 아들을 부인하고 아버지를 부인하는 자인 것이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그런 사람들은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자들이라고 말씀한다. 또 그들은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않는 자요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 곧 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들 곧 교회의 인도자들이 하는 말을 가지고 따지지 말라고 했다. 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행실의 결과를 주의하여 보라고 주의를 준 것이다.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그리고 요한은 거짓선지자와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 일러 주면서 영들을 다 믿으면 안 된다고 경계한다.

 

(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일 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거짓선지자는 적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2절은 번역이 전적으로 잘못된 번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에서 육체로 오신엔 사르크스 엘코마이로서 그것은 육체 안에 오신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육체인 사르크스는 단수로서 각 사람의 육체를 말한다. “오신을 말하는 엘코마이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분사 곧 현재진행형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각 사람들의 육체안에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일이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성경을 보면 흠정역에는 “is come in the flesh”(육체안에 오시는)으로 현재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모펫번역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틀리게 번역을 해 놓았다. “every spirit which confesses Jesus as the Christ incarnate comes from God”(하나님께로부터 성육신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영마다) 에드가 굳스피드(Edgar J Goodspeed)가 번역한 The New Testament : An American Translation의 번역본에서도 “every inspired utterance that acknowledges that Jesus Christ has come in human form, comes from God”(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형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인식하는 모든 영적인 언급)이라고 번역을 했다. 모펫과 굳스피드의 번역은 전 천년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요한은 요한이서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요이 1: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여기서도 육체로 임하심엘코마이 엔 사르크스육체안에 임하는 것이다. “엘코마이42절과 같이 현재분사로 되어 있어서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성령을 부어주시는 사실을 말한다. 이 말씀도 흠정역본은 현재시제로 번역을 해놓고 있다. 그러나 이십세기번역(The Twentieth Century New Testament)“in our human nature”(인성 안에)로 번역을 하고 있다. 성육신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성육신으로 연계하는 이런 해석들은 헬라어 원본을 크게 훼손하는 번역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임하시는 것은 믿는 이속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부인하는 것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이요 아들을 부인하는 것은 아들이 보내신 성령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신 일 곧 그의 구속사(救贖事)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을 적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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