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 이번 요한계시록 사경회 신문광고 안하셨어요?“


어제 끝난 요한계시록 사경회기간중에 어느 목사님이 하신 질문이었다.

 

“예, 안했습니다.”


“........”


“이 말씀은요. 아무나 들을 수 없고요. 아무나 들어서도 안 되는 말씀이라서 안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회갑을 넘긴 나이지만 사모하는 마음에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어린 눈망울로 말씀을 사모하는 분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일찍 종말론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강사들과 강의들을 빠짐없이 다녔던 분이다. 그런데 그는 지난 삼 년 동안 나와함께 공부를 하면서 너무나 즐거워하고 누구보다도 좋아 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진리를 따라 예언의 말씀이 풀어지고 역사 속에 성취된 사실을 확인하는 기쁨을 맛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쉬는 시간에는 나를 쉬게 놔두지를 않고 질문공세를 퍼붓는다. 그러면서 이번 사경회는 요한계시록 12장 1절부터 6절까지만을 가지고 했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아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장로님, 마귀의 정체가 다 드러나네요.”


"예 그렇지요. 12장은 교회론과 마귀론의 결정체라고 할수 있어요."


"지난번에 했던 12장과는 전혀 다르네요."


"네, 주님이 계속 깨달음을 주시고 영감을 주신 결과예요."


"......"


“그리고 12장은 요한 계시록의 중추고요 허리부분이예요. 그래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내용을 알면 사람들이 몰려 올거예요.”


“아니요. 사람들이 오고 안오고 얼마나 오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들이 진리를 구하고 아는 것이 중요한거예요. 호기심을 가지고 지식을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알고자 하는 지식의 욕구를 채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들이 와야지요.”


그목사님과의 대화중에 얼핏 비춘 것같이 요한계시록 12장은 1장부터 11장과 13장이후의 22장사이를 잇는 허리와 같이 중요한 부분이다. 1장에서 요한은 밧모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그것이 “네 본 것”이다. 그리고 2장과 3장에서는 교회현실 곧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제 있는 것들”을 보고 기록한다. 그리고 4장에서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와 5장에서 어린양이 왕권을 옛적부터 계신이로부터 받으시는 장면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다니엘서 7장에서 다니엘에게 이상으로 이미 보여 주신 사실이었다. 그리고 6장부터 11장까지 세계의 역사가 진행이 된다.


그리고 12장에서는 교회론과 교회역사를 말하면서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예언은 말씀으로 푸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이나 추정이 적어도 지나간 사백년동안 신학계에서 잘못된 해석을 초래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해석이요 최소한도의 논리나 예언성취된 역사적인 사실도 결여된 해석들이었다. 어떤 것들은 마치 소설을 쓰는 것과 같은 픽션에 불과한 해석들도 많이 있어 경악을 금할 수가 없는 것들도 많이 있다.


여자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여자를 말해야 한다. 아이도 해도 달도 용도 꼬리도 광야도 1260일도 마흔두달도 다 성경에 있다. 바다도 땅도 머리도 면류관도 뿔도 일곱도 열도 열둘도 다 성경에 나온다. 이와같이 성경에 있는 예언적인 용어로 예언을 풀어야 안전하고 수고로움이 없는 것이다.


12장의 "해를 입은 여자"가 '구약 교회'라는 해석은 이전에 없었던 해석이다. 달이 무엇인지도 새롭게 분석이 되었다.


2절의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가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의 고통스러운 역사, 곧 다니엘이 기도한 것과 같이 창세이후로 이세상 어느나라에도 없는 고난의 역사가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의 역사인 것이다.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단 9:12)


이스라엘은 여자이다.


하나님은 '딸 내 백성'이라고 했는가하면 '처녀 이스라엘', '처녀 유다', '처녀 시온'이라는 표현을 쓰시기를 좋아 하셨다. 그는 창세기 3장에서 죄를 지은 여자와 죄를 짓게한 뱀을 원수관계로 설정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죄를 지은 여자의 후손이 뱀을 이길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홀로된 여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홀로된 여인이 남편이 있는 여인보다 자식이 많을 것을 예언하신다. 구약의 교회는 홀로된 여인이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남편인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이 없는 이스라엘이 자기의 남편이 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다리지 않고 우상을 남편으로 두고 허무한 삶을 살고 썩어질 것들로부터 위로를 구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을 따라 간 것이다. 그것이 구약교회의 질곡의 역사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남편이신 하나님은 그에게 돌아오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고 그약속을 구약의 교회가 잊어버릴까봐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를 부지런히 보내시기를 수천년동안 하심으로 그의 약속을 지키시고 그의 독생자를 보내사 죄인들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것이 이땅에 여자의 후손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 당신은 발꿈치를 상하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이 아이는 장차 철장권세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요 그아이를 하나님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올라가서 그에게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아서 오순절에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받아서 시작된 여자인 구약의 교회는 동정녀 마리아가 아들을 낳음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마리아가 말한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한분외에 다른 사내를 알지 못하는 처녀요, 동정녀이었다. 우상을 섬겼던 가짜 이스라엘은 우상의 위로를 구하고 헛된 위로를 받은 자들이었으나 참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러 성전에 올라갔을 때에 만났던 선지자 시므온과 같이 한가지로 오직 '이스라엘의 위로'만을 기다렸다. 그것이 이세상에서 남편이 없는 하나님만이 남편이 되시는 주님의 교회인 것이다. 그여자가 낳은 남자는 그냥 아들이 아니라 예레미야가 예언한 '게베르'로 용맹스러운 전사를 말하는 남자인 것이다.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렘 31:22)


그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한 큰 붉은 용은 사단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하는 옛뱀으로 사중적인 존재인데 그는 머리가 일곱인데 그것은 하늘 아래, 땅에서의 완전한 권세와 통치 권력을 말하는 것이며 일곱 면류관은 이세상의 썩어질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열뿔은 일곱은 완전수이며 열둘은 전체수인데 열은 세상나라의 숫자요, 육신의 숫자이기 때문에 세상의 권력은 아무리 강해도 둘이 모자라고 아무리 절대적이어도 일곱수의 하나님의 절대 권력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길수 없고 하나님을 믿는 교회를 절대로 이길수 없다는 비밀을 주님이 가르쳐 주셨다.

 

이와같은 것들이 다 성경에 있는 말씀으로 예언을 푸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넘어가서 인간의 상상이나 추정으로 예언을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일백년전의 학자인 개블린의 말과 같이 “예언은 미리 쓰는 역사책”이기 때문에 역사에서 예언이 성취된 사실을 확인할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용이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지 일을 땅에 던졌다는 말은 꼬리는 거짓선지자라고 이사야에서 가르쳐 주고있다. 9장에서 모슬렘의 출현을 말하면서 무저갱에서 땅으로 올라온 황충의 권세가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다고 했다. 전갈의 권세는 꼬리에 있기 때문이요 꼬리는 거짓 선지자요 무슬렘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는 포학하고 간교하고 더러운 거짓선지자이기 때문에 그의 재앙은 꼬리의 재앙이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용은 그 꼬리의 권세를 가지고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땅에 던졌다고 했는데 하늘에서의 별은 선지자들이요, 제사장들이다. 이는 마귀가 구약교회의 시대에 꼬리인 거짓 선지자들을 동원해서 많은 하나님의 일군들을 타락시킨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낳은 여자는 광야로 도망한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 12:6)


여기서 여자는 더 이상 구약 교회가 아니다.

여기의 여자는 신약 교회이다.

신약 교회도 처녀요, 신부이다.

신랑은 주님이 되시는 것이 여자로서의 신약 교회인 것이다.


구약 교회와는 다른 것이 구약 교회는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받았지만 신약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신약의 교회는 더 이상 요란함도 없고 패배도 없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 곧 세상이 빼앗을수 없는 평강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 보좌 앞의 수정같은 유리바다와 같은 완전한 평화와 마음의 평정을 누리는 평강의 왕의 역사를 생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울고 회개하고 통곡을 해야만 했다.


교회는 광야로 도망가야 한다.

그렇게 주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는 그리스도 인으로 교회로 성장해서 완전한 승리의 생활과 완전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이 나를 고치시고 다루실수 있는 시간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광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광야는 하나님만 계신 곳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웠다.

이스라엘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믿음을 배웠다.

사울이 삼 년 동안 아리비아에서 믿음으로 길리움을 받았다.

야곱에게는 밧단아람이 광야이었다.

요셉에게는 보디발의 집에서의 종노릇과 애굽의 감옥에서 하나님만을 만나던 그곳이 그에게 있어서 십삼 년 동안의 광야 생활이었다.

그곳은 하나님이 교회를 키우고 양육하는 곳이다.


그곳은 하나님과 나만의 절대장소이다.


1260은 항상 교회와 관련된 수로만 쓰여졌다.

마흔두 달도 마찬가지 일수이다

그 시간은 절대 장소에서 양육을 받기 위한 절대 시간이다.


그러므로 1260일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는 절대 시간이다.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영적인 전사로 길리움을 받는 절대 시간과 절대 장소로 가기 위해 우리는 도망가야 한다.

용의 얼굴로부터 도망가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도망가야 길리움을 받을수 있다.

사람들로부터도 도망을 가야 한다.

일로부터도 도망을 가야 한다.

교회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일로부터도 도망을 가야 하고 교회로 부터도 도망을 가야만 하고 그래야만 하나님이 그를 수술대 위에 올려 놓으시고 말씀의 메스로 자르고 수술하실 수 있는 시간을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수술실인 골방으로 도망을 가야 한다.


하나님과 나만의 절대 장소로 도망을 가라

하나님이 나를 기르치실수 있는 절대 시간으로 도망가라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에세 도망갔다.

이삭도 아비멜렉에게 쫓겨났다.

도망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하여 쫓아내서라도 세상에서 외롭고 하나님께만 위로를 받는 광야로 몰아 내신다.

에서는 도망가지 않았으나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갔다.

요셉도 애굽으로 팔려 간것이 도망간 것이다.

요셉에게는 함께 살면 육신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엄마와 아빠를 떠나서 이역만리에서 종노릇을 하면서까지도 하나님은 요셉을 위해 광야를 예비하신 것이다. 보디발의 집을 예비하시고 심지어는 애굽의 감옥의 독방까지도 예비하신 후에 요셉으로 하나님 한분만 만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로가 보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변화 되었다.

      

제자들도 베드로의 말과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다.

그리고 1260일, 곧 삼 년 반 동안을 양육을 받았을 때에 그들은 다 영적인 전사가 되었다. 저주받을 자식, 한사람만 빼놓고 말이다.

사울도 아라비아 광야로 도망을 가서 거기서 양육을 받았다.


이와 같이 성경에 나오는 1260일 마흔두 달의 권세는교회를 양육하시는 날수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마귀에게 주어진 마흔두달, 1260일의 기간은 교회를 헐고 양육을 받지 못하게 하는 영적인 마이너스 요인의 기간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로 광야로 가지 못하게 마흔두달을 역사한다. 1260일동안 그들을 세상에 묶어 두고 일에 묶어 두고 사람들에게 묶어 두고 분주하게 하고 바쁘게 하며 성경을 볼시간도 없이 교회일을 하게 하고 기도할시간도 없이 전도하게 하고 마기 영혼을 돌아 볼 시간도 없이 사람들과 섞여살게 함으로 영적으로 지진아가 되고 지체부자유아 기형아들이 되게하는 마귀의 역사가 같은 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1260일을 보냈으나 가롯유다는 겉으로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실상은 마귀의 1260일에 참여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선생님을 은 삼십에 팔았다. 그는 그중에 일전한푼도 쓰지 못하였다. 그는 돈을 취하지도 못하고 배반만 한 것이다. 오늘날도 돈도 못벌면서 주님을 잃어버리고 은혜를 상실하고 영적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사는 사람들이 이와같은 사람들이다. 주님의 수술대 위에 올라가 누워야하는데 마귀의 수술대위에 올라가 누워 있는 형국이 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인가?

예수를 믿어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은혜를 받아도 그은혜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까먹는 사람들이다.

돈은 벌지 몰라도 믿음은 마이너스 요인으로만 작용하는 사람들이다.

날이 갈수록 믿음이 퇴락하고 날이 갈수록 은혜를 까먹고 이전믿음을 상실하고 첫사랑도 잃어버리고 간절한 마음도 상실하고 사모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예배도 습관으로 드리고 헌금도 감사함이 없이 의무로 하고 찬송도 입술로만 하는 사람들이 다 마귀의 1260일 교실에 앉아 있는 자들이다. 마귀의 마흔두달의 권세아래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도망가지 않은자들이다.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갔다.

교회는 세상에서 도망가야 한다.

교회는 골방으로 도망가야 한다.

그런데 골방을 한다는 사람도 주님의 1260일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그것은 골방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거기는 성경만 보는 장소가 아니다.

기도만 하는 곳이 아니다.

거기는 주님을 만나는 곳이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곳이다.

주님을 만나는 골방은 주님이 여호수아에게 가르쳐 주신 것처럼 하는 것이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8~9)


생활 속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골방이 여호수아의 골방이었다.

골방이 중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생활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믿음으로 살고 승리하는 생활이 되는 광야 생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광야로 도망한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가리는 것은 생활이요, 승리하는 것이다.

가롯유다가 마귀를 이기지 못한 것이 그의 주님을 따른 광야 생활이 거짓된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참된 광야 생활은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일상생활의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생활이다. 그것은 머릿속에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하고 사는 생활이다.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말씀 한 말씀 순종하는 생활이다.

세 번째인 말씀에 순종하려할 때에 내 악하고 불순종하는 모습이 드러나서 무릎을 꿇고 부르짖을수밖에 없으며 그런 사람은 절대로 교만해질수가 없다.


골방에서 말씀을 보든 기도를 하든 시간만 보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더 교만해 지는 것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

광야생활의 결과는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세가지 영적인 팁(요령)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 안되고 광야로 도망하여 양육을 받는 생활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에 계시록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사람도 빠짐이 없이 광야로 도망하게 하는 은혜를 부르짖어 구하고 그은혜를 받아 살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심령으로 교회로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쪼록 이글을 읽는 사람들도 '주님의 1260일인가?' 아니면 '마귀의 1260일인가?'를 분별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영적인 전사가 되는 은혜를 받기를 기도한다. 누구나 이 둘중에 하나에 처한 삶을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둘중에 하나이다. 중간은 없다. 물론 둘을 같이 공유할수도 없다.  


도망가자.

(*.62.219.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