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빈 장로

오늘날의 현대교회는 오순절이 없는 교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의 교회지도자들이 그리고 부흥사들이 시간만 있으면 "성령 받으라"고 부르짖어 왔지만 실상은 성령에 관심이 없는 교회가 오늘날의 교회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시작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날까지 흠 없이 점 없이 지키게 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 성령이며 믿는 이들의 육체에 부어지신바 된 하나님의 영이다.

그리고 주님은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그것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때문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성령을 받은 유익이 나타나는 성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현실임은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령을 사모하지 않는다. 오순절이 임하기 전 열흘 동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했던 제자들과 같은 기도가 없다. 성령을 사모한다는 사람들도 성령이 역사 할 수 있는 환경인 거룩함을 상실한 것은 이미 처처에서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지도 않고 오히려 성령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은 교회 안에서 사라져 가고 사람이 육체로 인간적인 방법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오히려 교회 안을 가득히 메워가고 있다.

어느 지방도시의 외형적인 규모가 큰 교회의 전도사가 고향선배에게 울면서 이렇게 하소연을 하더란다.

"우리교회는요 똑똑한 사람들이 다 자리를 잡고 있어서 주님이 설 자리가 교회 안에는 한 치도 없어요"  

그렇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자리에 인간들이 다 들어가 앉았다.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만 하는 주님의 일들을 사람들이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과 같이 성령이 교회 안에서 철수한다고 해도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할 교회가 수두룩하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온갖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들이 들어와 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프로그램과 교재들과 전도방법들이 더 잘 먹혀 들어가고 있으며 그와 같은 것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인간적으로 목회를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아등바등 목회를 하면 교인들을 더 잘 모을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교회이다.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다는 말은 무리가 되는 일일줄은 모르나 오늘날의 교ㅎ히 안에서는 성령의 역사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역사가 희귀해졌다는 말이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와 같이 이상이 흔치 아니한 시대이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다 잃어버리고 세상을 이길 힘도 마귀를 대적할 힘도 잃어버린 것이 오늘날의 현대판 교회라는 말이다.

예배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가 없으므로 교인들이 예배시간마다 주님을 만난 기쁨으로 돌아  가는 일들이 희귀해졌다는 사실은 진실한 주의 종들은 다 알고 있다. 결국에는 예배의 순서를 바꾸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인들을 감동시키기 위한 일들이 부단히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과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미구에 교인들이 교회를 하나씩 둘씩 다 떠나간 후에야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서구의 교회들이 그와 같은 전철을 밟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저들은 예배가 생활이고 생활이 예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영적생활이 없는 예배는 예배도 아니며 하나님이 그와 같은 예배를 받지도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인격을 교회 안에서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세대가 되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가 없으므로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데 성령의 감동이 없다. 그러므로 교인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할 수가 없고 영적 실재가 없고 설교자 자신의 순종하는 생활이 없는 공허한 말 잔치를 듣고 돌아가는 성도들의 생활이 변화될 리가 만무하며 변화되지 않는 순간은 원수 마귀에게 기회를 주어 교인들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말을 잘하는 말쟁이들이 강단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사람들의 교회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세상의 이야기꾼들의 말이나 교회 안의 말쟁이들의 말이 항상 그러하듯이 들을 때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돌아가면 여러 갑절의 공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없음으로 죄를 이기지 못하고 거룩함을 상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편만한 세대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죄인들의 더러운 입에 욕되게 회자되는 세대가 이 세대 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세운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우지 못한다면 교회를 세우신 이이신 하나님이 그와 같은 교회를 간과하고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서운 오해이다. 성령을 보내신 이가 성령을 홀대하고 인본적이 되어버린 교회를 그냥 내어 버려둔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을 스스로 자초하고야 말 것이다.

교인들간에 영적교제가 이루어지지를 않고 있으며 영적교제가 없는 교회는 성도들의 생활이 날마다 변화되는 영적성장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으며 성도들의 생활 속에 거룩함의 진전을 보기가 어렵다. 날마다 자라는 교인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랑하는 풍토도 교회 안에서 이미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다. 60년대에 우리의 어머니들이 교회에서 만나면 서로 얼싸 안고 방방 뛰던 모습은 이제는 볼 수도 없는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음으로 교인들이 부흥집회는 물론이요 예배도 사모하지 않는다. 사모하는 심령이 다 없어졌다는 말이다. 교인들이 모이지를 않는다. 저녁예배인원이 현격히 줄은지가 오래 되었다. 수요예배는 더욱 그러하다. 연합집회를 하는데 마다 교인들이 모이지 않음으로 풀이 죽은 목회자들과 강사에게 죄스러워 하는 목회자들로 가득하다. 이제는 교인들이 교회를 등지고 예배시간을 소홀히 하고 등한히 여기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사라짐으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시간마다 눈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기가 힘이 들며 설교시간에 또는 성경공부시간에도 지식은 가르치고 배우지만 주님의 인격 앞에 엎드러지는 은혜를 받지 못한다. 받는 은혜도 없고 머물러 있는 은혜가 없으니 전도도 봉사도 교사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성령의 역사가 없음으로 회개의 영의 역사가 사라지고 회개가 없는 교회가 되었다. 그 당연한 결과로 거룩함을 상실한 교회가 되었고 교회나 교인들이 세상 죄인들의 비난을 한꺼번에 받으며 장로가 권사들이 집사들이 세상의 굵직굵직한 범죄에 연루되어 연일연야(連日連夜)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며 욕되게 하고 있다. 거룩함에 관한 한 세상과 교회를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죄 때문에 심령을 깨뜨리는 부흥회가 없어졌으며 통회자복하는 인격과 말씀 앞에 목 놓아 우는 심령을 찾기가 힘든 세대가 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희귀함으로 자기가 의인인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교회안 에 많이 있고 그들은 죄로 인해 교만하여져서 눈물이 없는 인격으로 전락 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음으로 교만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진을 치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가 없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으며 "내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는 고백을 찬송으로 할 수 있는 인격이 교회 안에 거의 없으며 목회자들 가운데도 찾기 힘들고 교회지도자들 가운데에서도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기도도 찬송도 예배도 말씀도 설교도 전도나 봉사나 교회의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치우쳐 의식화되고 형식화 되어 버렸다.

성령의 역사가 없음으로 전도가 안 된다.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심(回心)을 하는 역사가 희귀하다. 교인들의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기는 수평이동은 많아서 교회마다 교인들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여 희비가 엇갈리는 일은 많은데 그리고 교인들의 수로 목회의 성공을 자랑하기도 하고 목회의 무
능자들이 되기도 하는데 아버지가 기다리시는 탕자가 돌아와서 "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치네"라는 찬송을 부르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일도 없고 그와 같은 중심을 가진 인격도 찾기가 힘이 든다. 오히려 기성교인들의 이동을 은근히 기대하고 교인하나 얻기 위해 들로 산으로 다니는 바리새인들의 전도만을 함으로 옆 교회와 이웃 목회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교인들이 늘어나는 타락한 기쁨을 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은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 육체의 욕심과 육신의 재주와 꽤들이 성령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고 차지하는 역겨운 일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교회 안에 아무런 아픔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소멸이 된 비참한 교회 안에 우리들은 지금 앉아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사도행전적 교회와 동떨어진 한국교회의 실상을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을 사도행전 교회등 서신서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실상과 비교하여 하나씩 하나씩 다루어 가겠습니다.

1. 사도행전적 원칙을 버린 현대교회의 현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모습과 비교하여 한국교회가 초대교회와 다른 곧 사도행전적 교회의 원칙을 버린 증상들을 같이 생각해 봄으로 한국교회의 치유방안을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말 할 것도 없이 한국교회는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타락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 하고 피상적인 문제만을 땜질식으로 임기응변식으로 해결해 가는 데에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운동장에 비가 오면 발 앞에 웅덩이만을 피하여 가다가 나중에는 피할수 없는 큰 웅덩이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나귀를 메고 가는 부자와 같이 사람의 말과 사람의 기호에 맞추다 보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목회를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교인들에게 하시고자하는 설교도 할수 없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도 없고 이와 같은 일들이 누적이 되면 결국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교회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인본주의 목회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 난 것이 아니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아무런 거부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오랫동안 진행이 되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오랫동안 진전되어온 근본적인 영적질병의 상태를 보아야 하며 나타나는 현상을 가지고 교회를 판단하고 진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렇게는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타나는 각각의 현상을 심도(深度)있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와 거꾸로 가는 오늘날 우리교회의 모습을 발가벗기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목회자의 모습 그리고 교회지도자들의 삐뚤어진 영적의식(靈的意識), 그리고 성도들의 연약한 모습을 성령의 조명(照明)하심 가운데 밝히 드러내고 마치 거울 앞에 서듯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발가벗은 모습으로 서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교회의 현실을 발가벗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론 자기들의 불의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지요. 하나님 앞에서나 그의 말씀 앞에 결코 떳떳한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의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내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어떤 이들은 교회를 친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치고 교회를 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죄라는 사실을 부러 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벌거벗은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내는 것을 교회를 부정적으로 말한다고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병든 교회를 현실 그대로 아픔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와 같은 교회를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요 부정적인 것을 좋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앞에 놓고 그의 상태를 사실보다 좋게 말하는 것은 절대로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병든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해주고 치료하는 것이 긍정적인 조치라는 데에 항변을 하는 사람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모자란 사람이든지 어디가 이상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고침 받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침 받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곧이들리지도 또한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 듣기 좋은 말이나 해주려 할 때는 그와 같은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교회의 병폐와 그 안에 있는 불의를 주의 말씀으로 고치려고 할 때에는 고침 받기를 싫어하는 이들이 있음을 이내 알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싫어하고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자기나라"를 교회 안에 구축하는 데에 전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닮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은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 자기의 제자들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목회를 해야 함에도 자기의 뜻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교회나 그 안에 있는 일군이나 교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를 비추어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스스로의 좌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사이며 장로인지 하나님의 눈치를 재빨리 읽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이며 교회지도자들은 누가 진정한 교회의 지도자들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교회의 현실을 말하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그 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핍박을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훼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전부터 있어 왔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옛 원수 마귀는 교회가 잠을 자기를 원하고 교회를 깨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협박을 하기도 하며 위협도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 4:28-30)

저들은 거짓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진리만을 말하지만 저들은 말할 때마다 거짓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희의 아비의 행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아비는 물론 마귀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이 거짓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애를 쓰던 유대인들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에레미야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 다니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지만 사단의 회요 형제들이라고 하지만 거짓형제들입니다. 요셉을 애굽에 팔고 죽었다고 거짓말을 함으로 아비를 속인 사람들이 애굽사람이나 아라비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요 야곱의 아들들이요 아브라함의 증손자들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김으로 주의 진실한 종들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확신범들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 16:1-3)

저들을 식별하는 법은 간단합니다.
자기의 불의가 드러나고 교회의 죄들이 드러날 때에 회개할 생각은 아니하고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덮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고 오늘날의 현대교회는 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야할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하심을 따라서 회개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회개를 하는 것도 복입니다. 회개할 죄를 깨닫는 것도 복입니다.

어떤 이들은 회개를 하고 싶어도 죄가 깨달아지지 못해서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회개를 하려 해도 이미 때를 놓쳐 버림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는 성경과 너무나 동떨어진 교회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현대교회의 현실이 성경적 교회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임을 우리는 스스로 자인할 수 있는 믿음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목회자 세미나를 하면서 많은 목사님들에게 여쭈어봤습니다.

"오늘 주님이 당신의 교회를 방문하신다면 칭찬을 하실까요 책망을 하실까요?"

거기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예외 없이 책망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보다 훨씬 영적으로 우위에 있는 교회들을 책망하신 것이 요한계시록 서두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보내시는 주님의 편지입니다. 지금과 같이 어두운 시대에 이 편지를 주의해서 읽고 그 가운데 있는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공허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키고 행해야 하는 말씀이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주님은 요한에게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소리로 말씀을 하시면서 교회들에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찌어다"라고 거듭 말씀을 하시고 계신 장면을 우리는 봅니다.

그때 당시의 교회가 성령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 '들으라'고 말씀하셨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하겠습니까?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팔소리로 말씀하셨다고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팔소리란 나팔소리 같이 큰 소리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귀가 먹은 교회들에게 주님은 나팔소리 같은 큰 소리로 말씀하셔야만 했다는 당시의 영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주님은 세속화된 교회들을 향하여 얼마나 큰 소리로 목이 터져라 목이 쉬도록 부르짖으시겠습니까?  

또 요한은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을 뵈옵고 그 앞에 엎드러져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오늘 만일 당신 앞에 눈이 불꽃같고 머리털의 희기가 양털과 같고 발은 빛난 주석과 같으며 그의 말소리는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그 입에서는 날선 검이 나오고 그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과 같은 주님이 나타나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게 되겠는지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더럽고 추하며 비참하고 누추한 모습이 아닌지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주님을 무시하고 인간의 말과 인간의 가르침과 인간의 방법, 인간적인 프로그램, 인간 중심의 교회운영, 인간중심의 사역,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모습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개혁자들이 말한 것과 같이 "코람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지는 순간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진실하게 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 사도행전적 원칙을 저버린 원인

한국교회가 지난 사오십년 동안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원칙을 철저히 무시해온 교회라는 증거를 더 들어 보고 그 다음으로 넘어갈까 한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총회를 해마다 열은 기록이 없고 총회장 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사람도 없는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가늠할 수조차도 없는 타락의 늪으로 떨어져 있어 서로 머리가 되겠다고 천문학적인 검은 돈을 주고받고 있으며 고성이 오가고 욕지거리가 난무하는 총회의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적은수의 대형교회와 그에 속한 지도자들이 막대한 금권을 등에 업고 경제적으로 기본유지도 안되는 대다수의 교회와 목사들 위에 군림을 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위화감을 조성시키며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산 교회와 주님이 기름 부어 세운 종들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의 대상으로 삼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감각도 없이 악한 일들을 일삼으며 교단정치에 골몰하고 있다.

저들은 교회에 죄가 들어오고 세속이 들어오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타락을 하든지 어찌하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일단 자기들의 정치력에 손상을 입히는 일이 일어나면 대적하라는 마귀는 대적하지 않고 주님이라도 가만두지 않을 기세로 의인들을 모함하고 잡아 죽이며 매장시키는 일들을 서슴없이 함으로 그 옛날 바리새인들의 집단적 생태가 저들 가운데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저들은 교회를 잘 모른다. 목회자 노릇은 할 줄은 알지만 목회자 구실을 못한다. 실제로 양을 먹이고 치는 일(Feedable Ministry)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들어와 강단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신학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경건생활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들이 거의 없으며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지식화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그렇게 배운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에게 성경을 '사는 진리'로 가르치지 못하고 단지 '아는 지식'으로만 가르치고 있어 머리만 크게 해주고 순종하도록 도와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순종하는 인격을 상실한 거대한 불순종의 무리들을 양산(量産)하는 공장처럼 되어 버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장로들이 장로가 무엇인지를 모르니 장로노릇이나 할려고 애쓰지만 장로구실은 하나도 하지 못한다. 당회가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못함으로 사공이 많아 산으로 올라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이미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그의 피로 사신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잘 알지 못한다. 영혼 사랑이나 전도는커녕 영적생활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성령으로 사는 것을 배우지 못했으며,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과의 영적교통이나 성도간의 영적교제가 없다.  

은혜를 받은 기억은 있지만 은혜 가운데 살거나 머물러 있지를 못한다. 그러니 전도를 하라는 말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고 전도를 시킬 수 있는 일군이 교회 안에 없다는 것을 목회자나 성도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교회는 허탈감에 빠져 급기야는 성령없이도 할 수 있는 전도를 추구하면서 수많은 방법과 프로그램을 고안해 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을 돈으로 전도하고 열성으로 전도하고 편지로 전도지로 전도방법으로 전도를 하면서 보냈지만 결과는 교인들의 심령이 황폐해진 것과 날이 갈수록 점점 비어가는 교회의 의자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이제 우리는 조용히 눈을 감고 일이 왜 이렇게 까지 흘러 왔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돌이켜 찾아야 한다.

더 있어야 할 무엇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간직해야할 것을 상실했기 때문에 교회가 병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처음 행위를 찾기 위해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꿇어 엎드림으로 겸손히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구해야 할 때가 왔다.

그럼 한국교회가 버린 초대교회의 원칙들을 하나씩 살펴봄으로 전도가 안 되는 이유와 전도가 잘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치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와 그 해결방안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왜 한국교회가 사도행전적인 원칙을 철저하게 저버린 교회로 남게 되었는지 그 이유와 원인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대를 분별할줄 모르는 소경이 되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1907년 평양의 부흥으로 이 땅에 자리를 잡은 한국교회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을 해왔다. 그리고 1930년대 말에는 단일교회로의 통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대동아전쟁이 발발하고 일제는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단결을 부르짖으며 온갖 수탈과 전체주의를 해치는 분리주의를 총력으로 막으면서 천황숭배를 강요하기에 까지 이르렀고 결국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와의 일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옛 원수 마귀는 승승장구하던 한국교회에 야심찬 일격을 가하게 되었고 온갖 회유와 협박 그리고 계속되는 고문과 투옥등으로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변절하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교회 안은 서로 대적하고 잡아주고 미워하는 상황으로 갈갈이 찢어지게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교회는 세상을 향한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이 되었고 길거리를 메우던 수많은 전도자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해방이 된 후에 신사참배를 한사람들이 "자기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하였으며"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교회를 버린 사람들"이라 하여  권징을 받기를 거부하면서 일대 혼란기를 맞는다. 그로인하여 한국교회는 권징이 사라지고 급기야는 거룩함을 상실하게 되었고 세속화의 길을 걷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회개운동이 다시 일어났지만 그것도 잠시뿐 한번 세상의 맛을 본 한국교회는 순수성을 상실하고 믿음의 정절을 지키지 못하였고 교회 안에는 전도자들이 더욱더 사라져 갔고 1960년대를 지나며 1970년대 초반에는 거의 씨가 마를 정도로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필자가 비록 종교인으로 교회를 다닐 때의 일이지만 그래도 1960년대에만 해도 교회 안에 "신령한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목사와 장로, 권사 집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같은 인격을 교회 안에서 찾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음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면서 교회는 전도하는 인격들이 사라진 자리를 전도방법과 교육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전도도 전도지나 전도방법등의 프로그램으로 바꿔치기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결국 교회는 성령과 상관이 없는 프로그램등이 교회안에까지 들어오는 혼란기를 맞게 된다. 야외예배와 체육대회등 한국의 초대교회에서는 꿈도 꿀수 없었던 인본적이고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프로그램들이 교회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성령없이도 할 수 있는 것들로 교회 안을 채워 가게 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교회는 목회까지도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으로 양부리에게 본을 보이는 목회의 모습을 거의 상실해 가면서 프로그램 목회가 교회 안에 정착을 하고 프로그램목회를 하는 교회들로부터 교인수가 늘어나며 설교를 잘하고 간증강사를 데려다가 은혜를 끼치며 철야 기도회나 부흥회를 잘해서 은혜를 끼치는 교회들이 점차 대형교회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면서 교회는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상관이 없이 대형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부딪히고 본을 보이고 본을 받는 영적성장이 사라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인격을 찾기가 힘들어지고 영적생활이라는 단어까지도 사라지는 비극을 맞게 된다.

그리고 목회자가 가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양떼를 기르지 못하고 목회자와 양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교회일로 재정으로 프로그램으로 피차에 부딪히고 접촉해야하는 상태로 전락해 버렸음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특별히 1970년대에 산업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면서 농촌 사람들이 밀물과 같이 대도시로 이주해오고 아파트 붐을 타고 엄청난 인구들이 도시계획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사회적 현상에 따라 교회는 철새와 같이 개발지를 찾아 떠나고 욕심대로 융자를 하여 땅을 사고 교회를 지면 교인들이 들어온다는 확신을 가지고 무리한 일들을 버리면서 복음진리를 지키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저질러졌다.

목회자의 개인경건이나 거룩과는 상관이 없이 말을 잘하여 감언이설로 설교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설교를 잘하는 교회, 교인관리를 잘하고 모든 행정프로그램이 깔끔하고 교회건물도 번듯한 교회, 성도들의 영적변화는 없어도 지식의 욕구라도 채워주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잘하면 교인들이 들어오고 그것을 못하면 교인들이 줄어드는 날마다 믿는 자의 수를 더하게 하지는 못하고 오직 기성교인들의 수평이동으로만 울고 웃는 딱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얼마전에 어느 신도시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의 일이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의 말이 이러하다.

"진실한 목회자들의 교회는 부흥이 되지 않고 야바우꾼과 같이 아파트 단지 안에서 교회끼리 싸워 가면서 교인들을 긁어 모으는 교회는 교인들이 늘어 납니다"

물론 그것은 부흥도 아니고 교회성장도 아니다. 멀지않아 부딪힐 돌에 부딪힐 것이다. 이와같이 교인수를 늘리는데에 혈안이된 교회의 풍토는 결국 인간의 방법과 수단으로 목회를 할수 밖에 없는 타락상을 연출하였으며 "돈놓고 돈 먹기" "꿩잡는게 매" "교회가 부흥할려면 남의 교인들 뺏어오는게 상책"이라는 말등 우선 성장이나 해놓고 보자는 식으로 목회를 하고 그와같은 일들은 결국 피차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들을 입으며 마귀와는 안싸우고 교회끼리 목회자들끼리 싸우는 일들로 이어졌다.

물론 이와같은 일은 일부 목회자들의 일이라고 치부를 한다고 하자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가 성장욕구를 목회의 동기로 삼고 주님을 잃어버린 목회를 하는 실습장이 되어 버렸다고 말을 해도 일언반구도 대꾸할수 없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임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에는 목회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프로그램과 방법으로 하는 도구주의 목회들이 성행을 하게 되었다. 전도도 교회를 성장시키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목회도 설교도 성경공부도 단지 교인수를 늘리는 도구로 전락이 되었다.

영적생활이 없는 사람들이 은사를 목회에 도구로 이용하는 은사주의가 힁행을 하고 있다. 영이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무엇인가를 느끼게라도 해달라는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율법주의가 들어오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상실한 교회와 지도자들과 교인들 위에 교권이 군림함으로 사람들이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신학교에서도 교수들 가운데 말씀으로 사는 인격들을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고 성령으로 사는 진리는 가르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 본받게 하지는 못하고 신학지식을 규격화하여 지식을 전수하는 학원식 교육이 되어 버렸음은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격이 결여된 십자가의 눈물도 복음도 없는 수많은 목회기술자들을 양산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사도행전적 교회의 원칙을 저버린 교회가 되었는가?

왜 모든 교회들이 또 목회자들이 시간만 있으면 초대교회를 희구하면서도 초대교회의 모습이 철저히 배제된 교회로 전락이 되었는가? 날이 갈수록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하고 주님의 목회에 가까이 가는 목회를 해야 하는데 왜 거꾸로 되었는가?

그렇다 한국교회는 수십년 동안을 주님과 반대 방향으로 치달은 교회이다. 다른 말로 하면 탕자 교회라는 말이다. 교회도 거꾸로 가고 있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세상의 영향을 받는 교회로 전락이 되었으며 목회자들도 교인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상실하고 스데반 같고 빌립같은 집사하나 제대로 길러낼 능력을 상실한 거꾸로된 목회를 하고 있다.

교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고 세상의 빛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함에도 그렇게 살지는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영향을 받으며 세상 속에 섞여 살면서 세상죄인들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하고 돈을 더 사랑하는 거꾸로 가는 신앙생활을 날이면 날마다 되풀이 하고 있다.

지금 주님이 이땅에 오신다고 가정을 하자 주님은 먼저 잃어버린 영혼을 찾지 않으실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은 잃어 버린 교회와 잃어 버린 목회자들과 길거리에서 골목에서 사라져간 전도자들, 잃어버린 직분자들을 먼저 찾으실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다음에 교회 밖의 탕자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좌표를 상실하고 헤메이고 있으며 초점을 잃고 방황하고 있으며 궤도를 이탈하여 헛바퀴를 돌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깡그리 잃어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물론 교회안의 죄 때문이다.

거룩함을 상실하는 순간에 교회는 힘을 잃어 버리고 머리를 깍이운 삼손과 같이 눈을 뽑히고 놋불로 묶인 삼손과 같이 기름부음을 받았으면서도 이방 죄인들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한몸에 받는 신세로 전락을 하게 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나님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가까이 하고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이 교회 안에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세상과 타협하고 죄를 용납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예복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들릴라를 사랑한 삼손과 같이 교회는 쉬지 않고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목말라 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왜 힘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되었는가?

교회가 세상을 이길 힘이 없고 세상사람들에게 조차도 비웃음과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죄를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전락을 했기 때문이요 교회 안에 영적인 사람들은 찾기가 힘들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은 찾아 볼 수가 없고 세상냄새나는 인격들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강단에 서는 사람들까지도 죄를 이기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 받은 거룩함이 나타나지 않는 세상죄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와 같이 교회의 거룩함의 상실은 곧 교회 안에 죄가 들어오게 함으로 어떤 경우에는 세상에서도 찾기 힘든 죄들이 교회 안에 교인들 간에 일어남을 보기도 한다.

거룩함을 상실한 교회에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세속화된 교회는 성령없이도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교회 안으로 들여 놓게 되는데 급기야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도 할 수 있는 것들로 교회 안을 가득히 채우게 된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설교 성령의 역사가 없는 성경공부를 비롯해서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교회행사들 곧 체육대회, 등산대회, 야유회, 바자회 등등 주님의 지상명령이 아닌 것들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어도 할수 있는 것들로 교회를 가득하게 하고 있다. 심지어는 전도까지도 인간이 만들어낸 세련된 방법들로 성령이 설 자리가 없는 교회로 만들어 버렸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옛날에 어느 믿음의 선진이 말한 것과 같이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이 일제히 철수를 한다 해도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하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교회가 많이 있다."라는 말이 실감나는 세대가 되었다.
적어도 오늘날의 현대교회 안에는 성령을 의지하는 인격, 곧 오직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세상적이며 육신적인 일군들이 많이 들어와 있으며 전도도 선교도 성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하려는 사람들도 교회 안에 많이 있음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과 대화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결론이 난 것은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지도자들의 생활이 속화(俗化)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도행전적 원칙을 저버린 가장 큰 이유는 세속화이며 죄와 우상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분별할줄 알아야 한다.  


*저작권은 예수전도협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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