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시는 역사와 떨어내시는 역사

얼마 전에 대구에서 있었던 중고등부 훈련에서 어느 목사님의 아들이 간증을 했다. 일찍 진학을 하기 위해 검정고시를 보려고 다니던 중학교를 자퇴했는데 일년 동안 공부는 못하고 놀기만 했다고 한다. 일년이 지나서 아버지가 공부한 것을 좀 보자고 해서 아버지 앞에 앉았는데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동안 놀기만 한 것이 들통이 나서 이제 몽둥이로 단단히 두둘겨 맞을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떨고 있는데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아버지가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그냥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라고 하는 사랑의 말을 듣고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위로해 주시는 아버지 앞에 통곡했다고 한다. 이 간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 아버지 목사님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체휼이 되어 그 자리가 다 같이 통곡하고 회개하는 자리가 되었다.
또 어느 목사님은 이전에 아들에게 너무나 혹독하게 대한 것이 마음이 아파서 아들이 제멋대로 해도 그냥 기도만 하면서 여러해 동안을 아들과의 신뢰가 회복되고 아들에게 존경을 받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 참고 기다렸다고 한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주님의 뜻을 앞세우며 인내하면서 기도하기를 “내 성질로 하지 않고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럴수록 아들의 빗나간 행동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소용없는 것 같은 생각에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수없이 좌절도 했지만 저것이 주님 앞에서 내 악한 모습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잡으면서 수없이 속이 뒤집힐 때에도 이전의 아들에게 했던 과거의 실수를 생각하면서 참고 기도했다고 한다. 앞으로는 내 성질로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해달라는 일념으로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중에 중고등부 훈련기간에 아들이 휴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주님이 그 아이의 영혼에 대한 강력한 부담을 주시면서 내가 아니라 이제는 주님이 말씀하실 때임을 알려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아들을 대면하게 되었는데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너 이번에 청소년 훈련에 참석하는 것이 어떻겠니?” 라고 물었는데 아들이 선뜻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참석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아들이 집회에 참석하게 된 것 때문에 한없이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 “아, 이제는 진짜 목사들이 나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에 목회자 훈련을 처음으로 시작하면서 전도가 모든 것의 우선인 것처럼 사람들은 보았지만 사실은 한국교회에 전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영적실재가 없는 것이었다. 전도가 필요하고 목회를 잘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필요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1994년부터 시작된 목회자 성격공부를 통해 목회자들의 영안이 열려지기 시작했다. 평신도가 목회자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 때문에 이전에 없던 몇몇 교단의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었으나 십년이 지난 나중에 목사님들의 말이 이구동성으로 “그때에 성경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하였습니다.”이었다.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고 목회를 하였던 과거를 뼈저리게 아파하였기 때문이었다.
앞에 말한 두 목사님들은 십수년 동안을 근 200키로 거리를 달려와 매주 월요일마다 성경공부에 빠짐없이 참석한 목사님들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잘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울고 들은바 말씀, 깨닫고 회개한 바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시간마다 회개하고 통곡하고 기도하며 아파하던 분들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이제는 성령의 세밀한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할 줄을 아는 영적인 사람들로 변해 있었다. 거룩할 뿐 아니라 자녀를 거룩하게 하고 교인들과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나가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죄와 우상으로 거룩성을 상실할 때마다 하나님은 소수를 구별하여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때가 이르면 그들로 온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도구로 삼아 거룩한 부흥을 일으키신다. 그와 같은 소수를 성경은 남은 자(Remnant)라고 부른다.
기드온의 부흥이 그러하고 미스바의 부흥이 그러하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부흥,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그러하며 그 후에도 이천년의 교회역사상 교회가 죄와 세상으로 더러워질 때마다 하나님이 그들과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신 극소수의 일꾼들로 교회를 정결케 하는 부흥을 부어 주신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기에 주님도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이 목전에 설 수 있는 남은 자 두세 명만 있으면 역사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사람이 두세명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사실 성경을 깊이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모으는 역사’ 이전에 ‘추리는 역사’인 것을 알 수가 있다. 나간 자식을 기다리고 그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중요함에는 더 이상 강조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모으는 역사를 하기 전에 항상 필요했던 것이 모으는 사역보다 더 중요한 모을 수 있는 추수꾼을 만드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가르치고 믿음의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훈련시키고 정제시키는 추리시는 역사가 항상 있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쓰시는 일꾼을 만드는 것이 모으는 역사가 중요한 것만큼이나 더 우선되고 필요한 것은 자명한 일이요 거기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이리라.
그와 같이 하나님이 당신의 수족으로 쓸 수 있는 일꾼들을 만들어 가시는 일이 추리는 역사인 것이다. 죄악이 관영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의 대상이 된 타락한 세대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거룩한 도구로 준비시키시고 추리신 것을 본다. 우상의 죄악이 편만한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오랜 믿음의 훈련을 통해 그의 거룩한 일꾼으로 추리신다. 그리고 이어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훈련시키시고 세우심으로 그의 거룩한 도구로 추리시는 역사를 보게 된다. 애굽에 내려 간지 400년이 되어 온 백성이 절망 가운데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일꾼으로 추려내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하신다. 기드온을, 사무엘을, 다니엘을, 에스라와 느헤미야 등등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 부르시고 믿음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오랜 세월을 통해 이루심으로 그들을 쓰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원상회복시키는 일을 하셨다. 그것을 우리는 거룩한 부흥이라고 부른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을 불러서 추리는 일을 하셨다. 아무렇게나 살던 거친 인격의 소유자들 그리고 당시 배웠다는 사람들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부터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던 갈릴리 사람들이 대부분인 제자들을 삼년반 동안 날마다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심으로 종 같은 제자가 아니라 친구 같은 제자로 만들어 내신다. 이전에 아브라함을 벗으로 만드신 하나님이, 모세를 친구처럼 대하시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육신을 입고 오셔서 제자들을 불러 말소리까지도 닮은 친구로 만드신다. 추수하는 거룩한 일꾼으로 추려내시는 사역을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을 추리시는 가운데 가룟유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에게는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이 추리시는 역사와 정반대인 떨어내시는 역사인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내 백성 가운데 끊여지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거룩한 성도의 교제권에서 끊어져 나가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다. 어떻게 보면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두 갈래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그의 쓰실 소중한 일꾼으로 추리시는 길에 서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하나님이 떨어내시는 길에 서 있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아벨은 추리시고 가인은 떨어내셨다.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하시면서까지도 복의 근원으로 추리셨으나 에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떨어내시고 말았다. 도덕적인 행위로 보면 에서가 야곱보다 더 훌륭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행위를 보시지 않고 죄인의 도덕성도 고려치 아니하시고 믿음을 보셨다. 악하고 뒤틀린 사기꾼이요 거짓말쟁이인 야곱 같은 죄인이라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다. 다단과 아비람을 떨어내셨으며 아간과 그의 가족들을 떨어내시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떨어내셨다.
요한복음 6장에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주님을 따르지 않고 물러갔다고 했는데 그것은 핍박의 결과도 고난의 결과도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씀은 너무 어렵도다.”라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말한 제자들의 말과 같이 주님의 말씀은 쉬운 말씀이 아니었다. 같은 장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신 엄청난 기적으로 온 세상이 주님을 따를 것처럼 아우성을 친 직후에 떡을 더 받아먹기 위해 주님을 따라온 사람들에게 주님이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요 내 살이 참된 양식이며 내 피가 참된 음료라 하였을 때에 그 많은 회중들이 그 말씀을 받을 수가 없어 진리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주님을 떠난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의 틀을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주님을 끼어 맞추려고 하다가 안 되니까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받기가 힘들어 주님을 다 떠나간 것이다. 여기에서도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말씀을 감동을 주고받는 도구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 의해도 말씀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말씀이요 그 말씀 앞에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말씀이다. 순종이 순교이다. 순종이 없는 순교는 일어나지 않는다. 순교가 없는 순종은 거짓된 것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순교도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으로 믿음으로 자기를 죽이는 길을 이미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간 것이 저들의 의지와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주님 편에서 볼 때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두세 명을 위해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에 필요 없는 영적인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한 거룩함에 이를 수 없는 그 많은 사람들을 떨어내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사실이다. 아무라도 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내게 올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열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권적인 주권의 역사인 것이다. 누구를 추려내시고 누구를 떨어내시는 가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가룟유다를 버리신 주님은 베드로가 불순종하고 갈릴리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갔을지라도 그를 찾아가 다시 붙잡아 주시고 사명을 주신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의심하였지만 친절히 보여주시고 깨우쳐 주신다.
초대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떨어내심을 당한 것과 같이 알렉산더와 후메네오가 떨구어져 나갔다. 데마도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으로 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이들이 떨어져 나갔다. 로만카톨릭이 타락했을 때에 하나님은 신부 중에 루터를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심으로 그의 일꾼으로 추려 내신다. 요한 칼빈을 거룩한 도구로 준비시키시고 요한웨슬레와 죠지 휫필드, 톱레디, 윌리암 크림샤우, 다니엘 로울랜드 등등 수를 헤아릴 수 없는 18세기의 거룩한 도구들, 챨스피니와 무디와 같은 사람들을 주님은 길을 잃고 헤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를 위해 거룩한 도구로 추려 내신 것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사람들 곧 거룩함을 입고 남을 거룩하게 할 수 있으며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일꾼들을 성경은 우리에게 “남은 자”로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시대에도 남은 자가 필요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는 일을 지금도 하시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교회의 모으는 기능만을 강조하는 우매함에 빠져 교회성장을 부르짖고 전도를 단지 교회를 크게 하고 교인들을 늘리는 인간의 정욕의 도구로 전락시킴으로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일을 무수히 저지르고 있다. 이는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이 일꾼을 거룩하게 하시는 추리시는 역사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사역의 방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자기의 탐욕을 채워줄 스승을 찾아 여기저기로 헤매고 다니는 목회자들이 많은데 이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 그의 백성들을 책망하신 것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자야 이 이스라엘 황무한 땅에 거한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중다한즉 더욱 이 땅으로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겔 33:24).

황무지에 사는 징계를 받으면서도 수를 자랑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여기에 있다. 영적으로 황폐화되고 거룩성도 성령도 다 상실한 황무지 같은 영적인 상태에도 교회만을 크게 하려는 세속주의에 빠진 어리석은 인간이 오늘날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라.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피 있는 고기를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 보냐 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 보냐 하고 너는 그들에게 또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황무지에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뜨리고 들에 있는 자는 들짐승에게 붙여 먹게 하고 산성과 굴에 있는 자는 온역에 죽게 하리라 내가 그 땅으로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게 하고 그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산들이 황무하여 지나갈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들의 행한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그 땅으로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게 하면 그 때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라”(겔 33:25-29).

하나님의 역사는 세상을 향해서는 모으시는 역사이지만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곧 세상으로부터 거룩함으로 구별하여 부르신 교회를 향하여는 추리시는 역사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1990년 목회자 세미나를 시작할 때부터 많은 이들이 훈련을 받았으나 저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도를 교회성장의 도구로만 생각하고 전도를 이용하려고 하는 교회성장의 안경을 끼고 훈련을 받았다. 기가 막힌 충격의 말씀과 간증을 듣고 회개하고 죄를 자복하면서도 자기들의 생각이 하나님과 반대가 되고 자기들이 하는 목회나 설교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몰랐던 이유는 그들의 중심 속에 교회를 하기 전에 목회를 해야 하는 사실과 목회를 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는 영적인 순서를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씀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지고 말씀으로 거룩해진 성품에 하나님이 생활상대로 나를 대우해 주시는 역사가 일어나야 거룩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적인 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 후에야 누구를 거룩하게 하는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영혼을 살리는 목회를 해야 교회가 되어지는 역사가 주님께로부터 임하는 것이 순서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교회를 하기 위해 전도도 설교도 말씀도 주님도 성령도 은사도 다 이용하고자 하는 무서운 타락상 때문에 저들이 진리를 제대로 들을 수도 받을 수도 없었다. 무엇인가가 없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을 어떻게 채울지를 알지 못해서 곧 받은바 은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는 처음 시간부터 말씀을 받지 못해서 괴로워 하다가 중간에 돌아가는 사람들도 속출했으며 마귀의 역사가 분명한 것은 어떤 이들은 세미나 장소 앞에까지 와서 괜히 싫은 마음이 강하게 들면서 등록하지도 않고 돌아가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평신도가 목사들을 훈련시키고 회개시키고 책망한다 하여 극도로 미워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지만 거룩한 충격 앞에 생활이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되고 영혼사랑이 없이 목회한 죄를 회개하는 일들이 더 많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어떤 목사님은 목사가 되어 십년이 넘도록 생애에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았던 죄를 회개하고 밤을 새워 말씀을 읽게 되는 은혜도 임했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가정이 회복되어지는 역사가 무수히 일어났다. 술을 끊고, 담배를 끊고, 간음죄를 끊으며 식구들을 폭행하던 죄를 회개하고 고침을 받는 역사들이 목회자 평신도 가릴 것 없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좋은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그와 같은 역사를 시기하고 일부러 싫어하는 사람들 가운데 비방하는 일들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성경학교를 시작하였는데 그냥 말씀으로 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양육을 받은 은혜를 나누려는 의도로 시작하였다. 전도훈련을 하면서 말씀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을 아파하면서 한사람이라도 말씀으로 사는 ‘걸어다니는 성경’(walking bible)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하여 시간마다 울고불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나 반면에 또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배우려고 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갔다. 줄곧 참석하는 사람들도 생활의 현장에서 말씀으로 살아지지 않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다가 하나씩 둘씩 떠나가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는 중에 장소문제도 큰 부담이었다. 만수교회에서 하던 성경공부가 다른 곳으로 장소를 이전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무슨 세미나가 유행병처럼 생기더니 만수교회 목사님이 목회자 세미나를 한다고 감리교 목회자들을 불러 몇 번을 하더니 성경공부를 해야 하는데 월요일에 아래 위층에서 하니 보기가 안 좋다고 하여 자리를 옮겨달라는 청이 들어왔다. 그래서 안양의 어느 장로교회로 옮겨서 했는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 써 붙인 차들이 교회주변에 주차하여 주민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주고 교인들이 싫어한다고 옮겨달라고 하여 신갈로 갔다가 거기서도 같은 이유로 거절당하게 되었다. 다시 협회 사무실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떠나갔다. 어떤 합동측 목사님은 자기만 안 오는 것이 아니라 사모님도 못 가게 하였는데 그 이유인즉 “맞는 말이지만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괴로워서 못 간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하루 종일 인터넷만을 하고 있다고 한다.
1997년부터 교단의 핍박이 시작되었다. 수원의 합동측 목사님이 “권사님, 이제 권사님도 정치바람을 서서히 타기 시작했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성결교, 합동측, 통합, 합신, 고신 순으로 사실의 확인도 없이 사실은 도외시한 채 말도 안 되는 비방만을 가지고 참여금지를 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세미나의 참석인원이 줄고 전도여행도 사경회도 인원이 줄어만 갔다. 어떤 사람은 “이제 예수전도협회도 한물 간 것”이라는 말을 함으로 비수를 꽂기도 하였다. 세미나 중에 바닥에 엎어져서 울면서 실신하다시피 회개를 하던 분의 말이었다. 교인과의 간음죄로 버림받기 직전에 회개하고 살 길을 찾았다고 월요성경학교 맨 앞자리를 수년 동안 차지하고 시간마다 울고 회개하던 목사가 강단에서 자기는 성결교 목사기 때문에 교단을 따른다고 협회와의 단절을 선언하기도 했다. 각 지역에서 전도자들의 힘줄을 끊고 전도를 훼방하고 전도현장을 닫는 일들이 일어났다. 어느 지역에서는 시골교회 목사들에게 전도하면 매달 5만원씩 지원하는 선교비를 끊겠다고 협박을 하여 전도를 못하게 하는 일들도 일어났는데 그중에 한 큰 교회 목사는 나중에 교회 집사인 과부와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살던 것이 드러나 교회에서 쫓겨나는 일이 일어났다. 통합측 교회 중 교회 웹사이트에 예수전도협회를 이단처럼 표현했던 천호동의 어느 큰 교회는 풍비박산이 나서 지금도 교회 안에서 싸우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떤 이는 자기도 훈련을 받고 전도를 하다가 사단이 들어가서 그 도시의 큰 교회 목사를 찾아가 예수천당 외치는 전도가 시대에 뒤떨어진 전도라고 하여 전도자들을 찾아다니며 다 주저앉혀 놓았는데 일년도 못되어 간암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부산의 어떤 목사님은 참으로 은혜를 받고 전도를 하여 교회에 생기가 살아나는데 아들 같은 목사들이 찾아와서 험악한 소리로 협박을 하는 바람에 전도를 중단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사단의 훼방이 전국을 걸쳐서 일어났다. 전도자들의 인격의 충돌로 전도하는 사람들 중에 내부적인 붕괴도 속속 일어났다. 전도를 행위로 계속하는 일들도 일어났다.
세미나 참석하는 인원이 줄었어도 주님의 역사하심은 언제나 동일하게 나타났다. 재정적으로 적자가 나도 한 영혼만 변화되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흑자라는 믿음을 가지고 일을 했다. 그래서 때로는 열 명이 안 되는 인원이 온 적도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이라고 믿고 감사함으로 봉사하고 일을 했다. 그것도 하나님이 추리시는 시대적인 섭리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 은혜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어느 노인 목사님의 말씀에 “이 집회는 밖에서는 몰랐는데 들어와 보니 좁은 문입니다.”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현실이었다.
교단들의 핍박이 시작되면서 하나님도 본격적으로 추리시는 일과 떨어내시는 일들을 하셨다. 협회의 간사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그중에는 추리시는 역사와 상관없이 목사님들로서 협회사역에 동참을 하다가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 분들이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훈련을 받은 것으로 이제는 영혼을 살리기 위해 목회자가 되려고 신학을 하는 일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핍박을 받는 것이 두려워 협회를 떠나간 사람들도 더러는 있었다. 먹고 사는 길을 찾아 협회를 떠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많은 전도자들이 교단에서 핍박을 하니까 김포에 있는 어느 목사의 세미나를 다니면서 교회성장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천국의 빈자리 때문에 그렇게 울고 회개를 하고도 다시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에 혈안이 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수집한 지식만을 가르쳐 주는 다락방에 빠져서 교회 안에 있는 훈련받고 회복된 영혼들을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우매한 일도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교회를 그만두는 일들도 일어났다. 무슨 기도원에서 하는 율법을 가르치는 침례교 목사에게 가서 율법의 정죄에 빠져 울고 은혜를 받았다고 착각을 일으키는 일들과 교인들을 거기에 데리고 가서 죄인을 만들어(?) 담임목사 앞에 무릎을 꿇리는 재미(?)에 빠지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그래도 변하지 않는 교인들, 변하지 않는 교회를 어찌하지 못하고 율법주의에 빠져 교인들에게 행위를 요구하고 요구된 행위를 행하지 못하면 지옥 간다고 생명책에서 흐림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을 일삼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미국에서 들어온 교회성장주의에 빠져서 주의 일을 탐욕의 대상으로 삼고 교회를 크게 하려는 욕심에 세상방법과 피라미식의 교회조직, 복음성가와 쓰러뜨리는 일과 최면술을 동원하고 기(氣)라는 악령술을 쓰기도 하는 신비주의도 아닌 이방종교의 술수와 같은 것들이 교회 안을 무수히 더럽히고 있는 현실이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이전의 선지자의 탄식과 같이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흑암한 교회 상황은 끝내 세상 사람들의 악감정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일을 낳고 말았으며 저들 앞에 내놓을 바람직한 인격마저도 교회 안에 없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고 이제는 어디 가서 불신자를 회심시킨다는 개념조차 꺼내 놓지 못하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기성의 교인들을 빼앗아 오기 위해 프로그램과 설교와 예배와 찬양과 기도까지도 교인들에게 혼적으로 끌리게 하는 인본적인 것으로 다 바꾸어 놓은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것이 거룩한 것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예배도 거룩하고 찬송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찬송이어야 하며 거룩함이 없이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실 수가 없고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불같은 시험을 당하면서도 주님은 협회가 쓸 것과 협회 일꾼들이 쓸 것을 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해 그릿시냇가에서 엘리야를 먹이듯이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셨다. 물론 날마다 달마다 기적 같은 일들을 경험하는 축복도 누렸다. 없는 가운데서의 형통함은 잠을 자다가도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기쁘고 즐거웠다.
그러면서 끝까지 고난을 같이 받던 영적인 피붙이 같은 분들이 힘들어 떠나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어느 목사님은 나와 걸어온 길이 너무나 비슷하다며 특별히 가까이서 사랑을 해주시던 분인데 교인들이 잘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을 힘들어 하다가 왕권인가 하는 이상한 곳으로 가버렸다. 진리에 있어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어떤 이는 집회에 왔다가 이사람 저사람 차비를 구걸하는 행색이 들통이 나서 하나님이 끊어내는 것을 모두가 아픔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있었다. 그렇게 십년이 넘도록 성경공부에 와서 흘렸던 눈물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사람이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람이 막으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이는 협회가 모르도록 훈련받은 이들을 연락해서 교회를 위한 헌금을 하게 하더니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그것이 들통이 나서 본인이 쑥스럽고 떳떳하지 못하여 주님으로부터 떨어냄의 대상이 된 적도 있다. 어떤 이는 목사님들 중에서 머리가 되려는 충동에 빠져 협회를 이용해서 목사님들을 미혹하더니 지금은 적막한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던 목사들을 병들게 하고 목회도 못하게 만들고 돈버는 직장인으로 끌어내린 일들도 일어났다. 어떤 이는 목회자 세미나 때마다 간증을 하던 사람인데 이간질을 하고 목사님들 위에 머리노릇하려고 성경공부를 독자적으로 조직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이도 있었다. 악인은 결코 번성할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떨어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순간적으로 교회성장에 눈이 멀어 이상한 곳에 갔다가 돌아왔으나 영적인 사람들과 뭔가 알지 못하는 벽에 신음을 하고 고통을 하는 것도 보았다. 어떤 이는 전도자들로 많은 시험에 들게 하고 율법적인 정죄를 버리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쓴 뿌리가 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먼저 받은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전도를 하면서도 죄가 끊어지지 않아서 박무수의 율법적인 회개-그것은 성령이 역사로 하는 회개가 아니다-에 빠져서 교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을 아는데 정작 목사님인 본인은 알지 못하여서 교인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목사님도 있었다. 어떤 이는 호스피스에 빠진 이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목회는 안 되고 돈은 필요하고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주님의 공급하심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돈을 벌러 나간 사람들도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 극히 어렵고도 힘든 일이지만 돌아온 사람들도 있다. 돌아오는 것이 극히 힘든 것은 이는 영적인 흐름이기 때문이다. 여울물처럼 급히 흘러가는 흐름에서 일단 떨어져 나가면 다시 합류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체험을 해왔다. 누가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다시 합류하도록 도우려고 하고 힘도 쓰지만 한번 빗나간 사람이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마라톤에서 낙오된 사람이 다시 선두그룹이나 후발그룹에 합류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달리는 열차에 다시 올라타는 것과 같이 어렵고 힘 드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하나님이 하시면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목사님은 김포의 어떤 목사에 빠져서 여섯 개교회로 된 간부까지 지내며 핵심으로 일을 했는데 5년 동안 교인들의 은혜가 떨어지고 교회의 생기가 떨어져가고 이전에 협회에서 훈련을 받고 목회를 할 때와는 다른 영적인 모습에 위기감을 느껴 그 사람의 메시지가 구원파의 그것과 유사함을 발견하고 떨어져 나왔다. 교인들을 다시 데리고 전도여행에 참석하고 여름행사를 다 참석을 했고 돌아온 5년 동안 많이 회복되었지만 아직도 교회나 교인들에게서 거기서 받은 세속의 때를 다 벗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그 목사님은 암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먼저 받기도 했다. 어떤 목사님은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는데 교인들이 변화되지 않고 들은바 지식으로 목사님을 잘 따르지 않는 것 때문에 강단에서 협회를 비방하고 협회와 관계를 끊었다. 끊기 전에 나와 통화하면서 그 목사님이 “내가 어떻게 장로님을 떠나요?”하면서 통곡을 하고 울었다. 한 삼년 만에 그 교인들도 떠나고 목회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돌아왔는데 한참을 적응하지 못하다가 이년쯤의 고생 끝에 이제는 잘 적응이 되고 사랑도 나누는 관계로 회복도 되었다.

이번 전도여행 이전에 이와 같은 일을 주님이 다시 돌아보게 하시는 은혜를 주셨다. 그리고 세상은 다 변해도 이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반열에 들게 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다. 전도여행 전에 기도하는데 주님이 이런 마음을 주셨다. “이번에는 영적인 가족들만 참석을 할 거야.” 물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도여행에 오지 못한 가족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정말 주님의 말씀대로 그러했다. 어른 250명과 아이들 100여명이 모였다.
첫날 저녁에 어떤 목사님과 대화를 했는데 가까이 지내던 그렇게 사랑을 해주던 어떤 목사님이 전화기도 꺼놓고 잠적을 해버렸다면서 안타까워했다. 특별히 그 목사님을 사랑하고 힘을 쏟은 분이었기에 아픔과 충격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목사님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붙잡을 때도 있지만 놓아줄 때도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해주면서 성도의 교제가 한 사람에게 치우치고 편협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장로님,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장로님을 떠나갔지요. 붙잡을 때는 붙잡아야지요.”라고 했다. 그래서 이번 전도여행에 적은 수가 모인 이유도 말하는 듯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추려내시는 주님의 역사와 떨어내시는 주님의 역사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또 주님이 가족 같은 사람들만 모일 것에 대해 일러주신 것을 말하면서 “목사님, 주님에게는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적게 온 것이 ‘남은 자’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불가항력적으로 끊여져 나간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제 거룩한 부흥의 때가 임박했습니다.” 서두에 말한 두 목사님을 언급하면서 “이와 같은 목사님들을 만들기 위해 주님이 오랜 세월 동안 소수의 남은 자들로 추려온 것입니다. 이분들을 주님이 지극히 거룩하게 한 다음에 주님이 쓰실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제는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거룩함으로 일상생활 가운데 세밀하게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목사님 가운데 한 분이 전도여행 중에 교제를 나누던 중 “장로님께 줄을 잘 서야 된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말로 했는데 성령이 대단히 근심하심으로 책망을 하셨다고 즉각적으로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비는 일들이 있었다. 무섭도록 세밀한 거룩함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도여행의 주제나 내용이 전도가 아니었다. 주님이 피로써 죽기까지 깨끗하게 하신 영혼을 내행위로 더럽힌 것을 아파하고 통곡하는 거룩함을 체험하는 전도여행이었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영혼의 아픔도 알게 되었다. 주님도 내 영혼을 아파하고 나도 내 영혼을 그렇게 동일하게 아파해야 하는 거룩함을 가르쳐 주셨다. 말 한마디 눈짓 하나 하나가 주님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도 체휼하게 되었다. 주님 앞에서 받은 거룩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지탱하지 못하는 아픔으로 울고 통회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전도여행이 끝나고 들려오는 소문이 하나같이 은혜를 받고 전도현장에서나 대별모임에서 무리함이 없이 진행이 되었다는 소리뿐이었다.
엊그제 십 여년 동안 잊고 살던 노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분은 전도훈련을 받으러 올 때에 교단 수련회에 가서 어느 젊은 목사님이 한방에 있는 또래의 목사님들에게 협회를 소개하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자신은 늙었다고 소외를 시키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깨 너머로 들으면서 내심 '아, 저기는 내가 가야할 데로구나'라는 마음을 주님이 주셨다고 한다. 사실 그 말을 들은 젊은 목사들은 하나도 훈련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혼자 훈련에 와서 경건생활을 배우고 전도도 하고 고난도 핍박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에 가서 한인목회를 하고 있다고 한다.
“장로님은 내 생애에 예수님 다음으로 나에게 영향을 끼쳐 주셨습니다.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제가 이날 이때까지 후배목사들에게 공공연히 존경을 받는 이유가 장로님 같은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분도 물론 남은 자 중에 한분이다.

이제 밤이 깊고 아침이 가까이 왔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시온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눈에 보이든 아니 보이든 차별이 없이 이렇게 하나 된 거룩함으로 무르익은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 우리는 부흥이 가까이 온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부흥을 우리보다도 주님이 더 급하게 기다리신다는 사실이 요즘 들어 유난히 새록새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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