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고 있는 한국교회
어느 목사님이 탁구를 치는 자세를 보면서 물어 보았다. “목사님 그 탁구를 어디서 배우셨나요? 치시는 폼이 꼭 교회에서 배운 거 같아요.” 그분은 겸연쩍게 웃었다. 나도 중학교 때에 교회에서 탁구를 배웠다. 그래서 누구든지 탁구로 이겼다. 나를 이길 사람이 교회 안에 없었다. 때로는 원정경기를 가서 다른 교회와 팀을 짜서 단체전을 해서 이기기도 했는데 나는 항상 가장 잘하는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를 가졌다. 어느 교회에 가서는 단체전을 했는데 동점을 이룬 상태에서 마지막 선수로 나가서 스물세번이나 듀스를 이루면서 눈에 핏발이 서도록 경기를 해서 이기는 쾌감을 맛보기도 했다. 또한 교회 종탑 밑에서 배운 장기실력이 교회와 동네의 모든 어른들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천애의 고아가 되었을 때에 그리고 죽을병에 걸려 돈이 없어서 약도 밥도 먹을 수 없었을 때에 나에게 닥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믿음이 나에게 없고 나를 도와줄 하나님도 나에게는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요즈음에도 문득 나와 같이 엉터리없는 교회생활을 한 사람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느냐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나와 같이 주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교회로부터 믿음 곧 신앙생활은 배우지 못하고 종교적이고 의식적인 교회생활만 배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주님이 오셨을 때와 같이 오늘날의 현대교회는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반대의견을 표시할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15년 전에 미국에서 세미나를 하면서 현대교회의 타락상을 말했더니 어떤 목사님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왜 교회가 타락했다고 말을 하느냐"고 했다는 말도 전해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이나 의견이나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고 현실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지금도 유효한 말씀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하).

처음 주님이 오셨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문제가 유대교를 믿는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축복의 개념이 뒤바뀌어 영적축복은 온데간데없고 육신의 축복과 이생의 축복만이 남아 있었으며 하나님은 상실하고 인간중심의 인본주의적인 종교로 전락한 유대교는 진리를 믿기보다는 진리를 대적하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마침내 세상의 구주로 오신 하나님의아들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패역하고도 파렴치한 짓을 하고 말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던 확신범들이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단체로 교회적으로 그와 같은 악을 범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세운 교회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대적하고 죽이는 참으로 이상하고도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실상은 이방종교가 주님을 죽인 것이 아니다. 소위 할례의 공동체인 교회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사람들이 주님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교회가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핍박하고 죽인 것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행 13:27,28).

성경을 볼 때에도 그렇고 교회사를 보아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교회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거스르는 자리에 섰던 사실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중심의 종교인들로 가득한 교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체질상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진리를 반대하는 반대편에 서있는 상태가 되어버렸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그들의 눈에는 거스르는 존재요 죽여도 무방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행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한가? 열심히 모이는데 변화되지는 않는다.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으로서 세상을 변화시켜야하는 교회가 세상은커녕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도 변화시킬 수 없는 무기력함 가운데 들어가 있다. 수십 년 동안 허다한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는데 참 주님의 제자다운 제자가 나오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큰 교회도 있고 유명한 사람들도 많고 유능한 목사도 있고 감동적인 설교도 있는데 설교를 해도 변화되는 인격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목회를 해도 열매가 없다. 처처에 교회가 있고 골목마다 몇 개씩이라도 예배당을 찾아 볼 수는 있으나 어인 일인지 세상은 더 극도로 타락해가고 날이 갈수록 흉악범들이 활개를 치고 세상이 흉흉해짐을 막을 수가 없다. 이 나라의 별명이 이혼공화국이요 불륜공화국이니 하는 비극적인 일컬음을 들어야 하며 인륜도덕의 마지막 보루인 가정은 자꾸만 파괴되어 가고 심지어는 교인들의 가정도 파괴되어 가도 이를 막을 힘도 없고 치료할 수도 없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목사들이 장로들이 교회의 집사들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부도덕한 죄에 연루되어 언론에 오르내리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림으로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들이 일어남으로 유대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모독함이 되었다는 사도바울의 탄식이 어제오늘의 일만이 아닌 것이 되었다. 세상의 청소년들은 물론이요 교회안의 청소년들까지도 불량한 아이들이 되어가고 있다. 어느 부모도 어른도 교회도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나에게만 보이는 것일까?
전도를 해도 열매는 없다. 오히려 전도를 교회를 크게 하고자 하는 타락한 목회자들의 수단으로 전락이 되어버리고 불신자들을 회심을 시키지 못하니 언제부터인가 남의 교인들을 빼앗아 오는 것이 교회부흥의 술수로서 변질되어 버린 것이 오늘날 현대교회의 모습이 되었다. 너나 할 것이 없이 교인들은 세상에서 빛으로 살지 못하고 오히려 만인들의 지탄을 받는 인격으로 살아간다. 언젠가 얼마 되지 않은 과거에는 어리석은 이들이 말하기를 예수천당불신지옥하며 외치는 노방전도 때문에 전도가 가로막히고 있다고 주장하던 일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교인들의 부도덕한 삶 때문에 전도가 안 되고 그로 인해 세상불신자들이 교회를 비난하다 못해 대적하고, 대적하다 못해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를 갈기까지 하는 미증유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주와 그의 말씀인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오히려 목회자가 교인들을 고객으로 대하는 마케팅기법을 목회에 도입하는 일들이 힁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장사 속으로 전도를 하고 불신자들에게 까지도 인기를 얻기 위해 설교를 하며 교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심방을 하는 등 진리도 없고 성령도 없는 목회를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살 일들이 오늘 이시대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새신자를 교회에 데리고 오는 실적에 따라 성지순례니 금이니 냉장고요 텔레비전을 경품으로 내어 거는 세상말로 판촉기법이 교회 안에 아무런 아픔이나 비판의식이 없이 자행되고 있다. 전도사들의 실적에 따라 급여를 차등으로 지급함으로 경쟁을 시키는 악한 일들이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교인들끼리 서로 경쟁을 시킴으로 교회성장에 눈이 멀고 교인들 숫자에 눈이 멀어 오히려 육신적으로 시기와 분쟁을 조장하는 듯한 여러 가지 합당치 못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 주님이나 그의 제자들이 또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함으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복음의 씨를 뿌렸던 영혼사랑을 모독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이 응한 것을 누가 알려줄 것인가?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마 23:15).

교인들을 모으지만 변화시키지는 못 한다 교인들을 모으지만 그들을 믿음으로 살게 하지는 못한다. 교인들을 모으지만 결국에는 종교인들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러는 가운데 양을 먹이고 쳐야하는 사명을 주께로부터 받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오히려 무서워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며 애써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모습들은 이제 낯설지 않은 모습이 되어 버렸다. 영의 아버지로서 교인들을 책망하는 지도자를 보기가 힘들다. 그러다 보니 어떤 목사님의 말과 같이 오늘날의 교회가 권징이 없는 교회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요즈음 교인들은 목회자로부터 듣기 싫은 소리를 참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간다. 거짓선지자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무서워서 하고 싶은 말도 못하다 보니 자연스레 거짓선지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왜 교인들이 무서워서 할말을 하지 못하고 권징을 뒤로 하고 책망을 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교인욕심 때문인 것이다. 변화되지 않는 교인이라도 수가 많으면 목회자들 세계에서 교단에서 노회에서 하다못해 소수의 목사들이 모인자리에서도 대접을 받는 풍조가 깊어진지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말하는 것이 금기시 되고 회개하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심판이나 지옥을 말하는 것은 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아주 오래전 미국목사들의 타락한 현실이 오늘날에는 우리의 것이 되어버린 지가 오래 되었다. 세상죄인들에게 휴지나 이쑤시개를 나누어 주고 듣기 좋은 말로 교인을 얻기 위해 소위 꼬시는 듯한 전도 곧 아양이나 떠는 식의 전도방법들을 들여오고 불신자들을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그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려는 수법들이 힁해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이 아니요 이교도들이나 우상숭배자들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요 장사꾼들에게나 있을법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혼을 성장시키지는 못하면서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사실 교회성장이라는 말은 만들어낸 사람들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교회는 완전한 것이다. 교회는 강한 것이다. 교회는 성장해야할 필요가 없다. 영혼이 성장을 하고 믿음이 성장을 한다는 말은 할수 있으나 교회가 성장한다는 말은 성경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으며 정상적인 신학사상으로도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말인 것이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이후부터 교회는 온전하고 강한 것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교회 안에 있는 목회자들이 영적으로 약하고 교인들의 믿음이 약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자기의 영혼을 위하여 각자 각자가 스스로의 영적인 성장을 꾀하여야한다. 그것을 사모하고 구하고 부르짖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줄기 되신 주님 안에 거하는 거룩한 생활이 되면 열매도 저절로 맺혀지고 그리고 나면 나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교인들의 수도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요 순서인 것이다.

교인들이 많아지고 교회가 외형적으로 커지는 것이 교회성장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발상부터가 악한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소위 교회성장을 말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듣고 배우려는 사람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영혼인가? 아니다. 그들의 탐심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크게 하고자 하는 탐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충동질하는 것이 누구인가? 우리의 영원한 원수요 대적하는 자인 마귀인 것이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대로 하고자하는 사람들이 다 마귀의 술수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꽤나 신실해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교회성장의 욕심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저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들이요 자기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들을 하는 사람들이지 하나님의 만족을 구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구하는 자들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어떤 목사님은 예수전도협회훈련을 받고 영혼사랑으로 전도를 해서 교인이 500명에서 1200명이 되었다고 간증을 하던 목사님이 지금은 교인들에게 밤낮없이 2만2천명의 교인수로 교회성장을 이루어야한다고 맹세하게하고 시간마다 선서하게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와중에서 오히려 순수한 믿음으로 영혼을 사랑함으로 전도를 하는 교인들이 핍박을 받고 교회를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영적인 환경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한다. 며칠 전에 어느 집사님은 교회에서 D12를 하는데 은혜도 안 되고 그래서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두면 교회의 역적으로 몰리는 상황이고 강단에서 무섭도록 내리치는 말에 교회를 떠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눈치를 보며 그냥 참석을 하고 있다는 하소연을 해오기도 하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영적으로 목마르고 갈급한 교인들에게 적당한 양식은 주지 못하면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믿음을 채 배우지도 못한 교인들을 교회성장이라는 미명아래 그 도구로 전락을 시키고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교인들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커진들 그 교인들에게 돌아오는 영적인 유익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이 무엇인가? 교인들이 변화되지도 못하고 교회가 커진다면 교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된다는 말인가? 누가 영광을 취하는가? 주님인가 교인인가? 아니다 교회의 지도자에게나 돌아가는 영광이다. 그들에게는 교회성장이 믿음이다 저들의 말을 들어보고 저들의 사상을 조사해보면 성령을 믿사오며가 아니라 ‘교회성장을 믿사오며’나 ‘전도를 믿사오며’, ‘방법을 믿사오며’ 또는 ‘셀을 믿사오며’가 되어버렸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지 믿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하나님의 뜻은 저들이 말하는 교회성장이 아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교인들이 적은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다는 생각이나 말을 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어느 교회의 한 장로가 공기도를 하면서 '주님 우리교회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큰 교회가 된 것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우리교회를 이렇게 사랑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척교회는 미자립 교회는 작은 교회는 감사할 것이 없고 하나님이 사랑하지도 않는 교회라는 말인가? 그 큰 교회도 처음에는 작은 개척교회로부터 시작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 땅의 어느 교회가 적은수로 시작하지 않은 교회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큰 교회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교회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상).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 6:40상).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분명하고 엄연한데도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마귀의 속임수에 하나님의 교회와 그의 종들이 빠지는가? 큰 교회가 되려고 하는 것은 부자교회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가난한 교회가 싫고 부자교회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목사도 그냥 목사가 아니라 부자목사가 되고 싶다는 말이다.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마귀의 세 번째 시험에 넘어간 것이다. 그것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높임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한탕주의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종들이 감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자신의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을 시키고 교회를 목적으로 수단으로 이용을 하려 든다면 그것이 교회성장이든지 전도든지 은사든지 그것은 악한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돈을 주고 사서 이용하려고 했던 사마리아의 시몬이 베드로에게 어떠한 책망을 받고 두려워 떨었는가를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 8:20-23).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주인이 타국으로 가면서 포도원을 맡겼던 종들이 언제부터인가 그 포도원을 자기들의 것으로 착각을 하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쫓아내고 죽이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주인의 상속권을 가진 아들을 죽이는 비유를 주의를 기울여 읽어보라. 그 당시 교권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현실을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오늘에는 없는가를 살펴보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맡기셨던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들의 전유물로 생각을 했던 그들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들의 경영권 아래에 있다고 믿고 자기들의 영향력아래에 두려고 애를 쓰는 자들이나 그와 같은 영향력을 자랑하는 이들의 악함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의 경영대상으로 삼아 교회를 크게 해보려고 하는 이들의 악함이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서 날이 갈수록 위축이 되고 있는데 자기들의 종교적인 조직만을 크게 함으로 교인수를 자랑하고 예배당 건축을 자랑하고 선교를 자랑하고 일을 자랑하고 교인들에게 받는 것을 자랑하고 자랑하지는 않아도 자랑하는 마음만 먹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의 것으로 착각을 하는 이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 이기신 세 번째의 시험을 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의 욕심을 채워주겠다는 원수의 속삭임에 빠져서 넘어간 사람들이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8-10).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것은 세상영광을 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에도 의인 열명이 없어서 멸하신 것이 아닌가? 교인들이 많아서 교회가 커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세워지고 말씀으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영적인 교회요 그와 같은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큰 교회인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가롯유다가 왜 자기의 스승인 예수님을 팔았는가? 거꾸로 된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다 말씀으로 거룩해졌는데 가롯유다는 주님을 삼년반 동안 다른 제자들과 같이 따라다니면서도 변화를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왜 주님을 못 박아 죽였는가? 자기들이 안식일마다 읽고 외우는 말씀을 머리로만 알았지 인격으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쳤지만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믿음을 가르친다면서도 정작 자기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배우지도 못한 사람들이었다. 당신도 말씀으로 믿음으로 변화된 삶을 살지 않는다면 부지불식간에 주님을 배반하는 행실과 언행심사와 거룩하지 못하고 주님을 닮지 못한 삶이 날마다 순간마다 나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아니한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당신은 어느 길을 가기를 원하는가? 당신의 교회는 어느 길을 원하는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믿음이 성장하고 영혼이 성장하는 길인가? 열한제자는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길을 갔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거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저절로 열매를 맺는 일꾼들이 되었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3,4).

가롯유다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말씀으로 거룩해지지 않았다. 당신은 어떠한가?
제자들은 삼년 반 만에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음에도 가롯유다는 주님 안에 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어떤가?
가롯유다는 주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과실도 맺을 수가 없었고 저절로 과실을 맺지 못했다. 당신은 어떤가? 열매가 있는가? 그 열매도 성령의 역사로 저절로 맺는가? 아니며 인간의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힘쓰고 애씀으로 맺는가?
가롯유다는 돈궤를 맡은 것 밖에는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어떠한가? 그는 믿음도 없었고 믿음의 성장도 없었던 사람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나도 변화되지 못하면서 교회일 만을 힘쓰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나도 남도 변화되지 못하는 그런 일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돌이키라.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한계가 있고 끝이 있음을 성경속의 교회역사가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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