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식사도 거르고 급히 나선 지방 길에 KTX 역에서 우동을 먹게 되었다. 이른 아침 메뉴가 세 가지밖에 없다고 하여 그중에 하나를 시키고 음식을 가져오기에 차표도 끊어야하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식대를 먼저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급히 창구로 가서 표를 사가지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우동집 종업원이 쫒아 나왔다.
“저 손님 식대를 안내고 가셨는데요?”
“예?”
“식대를 안 내셨어요!”
“아니 아줌마 우동을 가지고 올 때에 내가 6000원을 주었잖아요?”
약간 기분이 상해서 언성이 높아져서 말이 나갔다.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요?”
아침부터 정신이 없냐고 핀잔을 주려다가 한 수위를 낮추어 말했다.
그 종업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표정을 수습하여 말을 했다.
“아, 저 죄송합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그리고 주님에게 말했다.
“주님 내가 약간 심하게 말을 했지요? 부드럽고 온유하게 말을 해야 하는데요.”
그런데 주님이 조금도 근심하시지 않는 것 같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에 위아래로 까만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쩌면 저게 마귀모습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불현듯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것은 그 종업원이 까만 옷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에스컬레이터로 한 층을 내려가는 사이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마귀가 저런 모습이지...”
“......”
“이미 지불된 식사비를 다시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이미 십자가에서 지불된 너의 죄 값을 다시 달라고 하면서 죄책감을 심어주고 정죄의식을 심어주면서 너를 죽기까지 사랑한 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고 때로는 두려워하게 까지 만드는 것이 너의 원수마귀가 아니겠니?”

그와 같은 주님의 속삭임을 들으면서 그 아주머니에게 내가 돈을 냈다고 힘을 주어서 말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면 안 되지만 마귀에게는 좀 더 큰소리로 기분이 나빠서 때로는 욕을 할 정도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자주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갔는가?
분한 생각이 들지 않는가?
주님이 다 지불한 죄의 값을 마귀가 속임을 베푸는 데에 빠져서 의기소침해지고 스스로를 미워하고 정죄하며 때로는 좌절감에 빠져서 세월을 보낸 적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도 구원을 받은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마귀가 공격을 할 때마다 속아 넘어간 적이 얼마나 많은가? 내 죄도 용서하지 못하는 방식대로 남의 죄도 용서하지 못함으로 가정 안에서나 교회 안에서 우리가 사는 인간관계 속에 얼마나 많은 상처와 쓴 뿌리를 나게 하였던가?

이와 같은 교활하고 의도적인 마귀의 속임수에 하나님이 믿는 그의 자녀들을 의롭다고 불러주신 칭의의 은혜를 주장하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다.
마귀를 상대로 좀 더 언성을 높여서 기분이 나빠서 소리를 지를 말씀이 이것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연약함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항상 간구하시는 분이시다. 지금도 그렇게 하신다. 바로 오늘도 죄를 짓고 마귀에게 속고 유혹과 시험에 연약한 나의 연약함을 위하여...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사 5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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