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영혼을 사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전도를 못해서 죄송해요.”

서울집회에서 어느 권사님의 애통한 기도였다.

이번 서울 집회에는 못 보던 사람들도 더러 있었고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못 보던 사람들은 그 권사님과 같이 근 10년 정도는 족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전에 전도훈련을 받고 열심히 전도를 하다가 은혜를 상실하고 전도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하여 주저앉은 사람들이다.

이번 집회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집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주시고 돌아오게 하시는 은혜에 관한 말씀으로 집중을 시켜주셨다.
말씀을 듣고 회개기도를 하는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많은 이들이 전도를 못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협회에 다시 와서 은혜를 받고 싶고 회복하고 싶어도 면목이 없어서 못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도보다도 생활이 있어야 하고 받은바 은혜가 있어 지속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전도를 못하는 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생활을 살지 못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가 있는 대로 나아와 은혜를 받고 회복을 해야 하는 것이 어느 것보다도 급한 것이다.
“주님,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졌습니다. 내 영혼을 다시 살려주십시오.”  
라고 부르짖던 어느 집사님과 같이 전도가 문제가 아니라 믿음을 지키지 못하여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진 것이 문제인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전도를 중단한 것에 스스로 죄책감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본다. 그것은 어느 정도 전도를 하는 것이 자기의 의가 되었었기 때문이다. 전적인 은혜로 전도를 하는 사람은 전도를 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문제로 여기기 때문이다.

전도를 방법으로 하는 사람이나 전도를 행위로 하는 사람들은 전도를 못하게 되면 이내 전도를 못하는 자책감 가운데 들어간다. 그래서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하기가 힘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전도를 하는 사람은 전도를 못하는 이유가 은혜가 떨어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즉시 은혜를 받고자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하고 은혜 있는 자들을 찾아 영적교제를 통해 은혜를 회복한다. 또 성경말씀만 보아도 주님이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면 전도는 저절로 회복이 되는 것이다.

전도의 대한 부담은 나의 부담이 아니다. 그 일은 주님의 일이요 주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유지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도 나의 소관이 아니라 주님에게 더 다급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선순위에 있어서 은혜를 회복하는 것과 전도하는 것 중에 은혜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임에도 전도를 회복하려하고 전도를 못하는 것에 집착을 하면 순서가 잘못되어서 회복할 길이 요원한 것이다. 먼저 은혜를 회복하고 은혜를 회복한 후에는 전도가 저절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은혜에 대한 아픔과 부담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주님이 그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는 일이 급속히 일어나게 된다. 일단 은혜를 회복하면 나에게 은혜를 주신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되게 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전도를 다시 회복하게 되는 일이 쉬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중단하고 전도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은혜도 전도도 회복하지 못하고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전도를 못해도 괜찮다. 은혜를 회복해야 한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은혜를 회복하는 것이 내 영이 사는 길이요 남의 영을 살리는 전도도 되는 길이다.

마지막 시간에 실패한 그 자리가 주님이 계신 자리요 주님이 나를 일으키시는 자리라는 것을 말씀으로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울고 통곡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버림을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주님이 가장 가까이 계실 때라는 말씀에 사람들의 눈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다. 내가 죄를 지은 자리가 주님의 피가 필요한자리요 주님의 십자가가 절실히 필요한 자리임을 말씀으로 듣고 자기를 자책하던 미련함에서 벗어나는 은혜를 주셨다. 오래된 집사도 울고 처음 나온 청년도 그렇게 많이 울었다. 피부암으로 고생을 하는 어느 전도자도 주님의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는 사랑 앞에서 울고 회복이 되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은혜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 우리를 전도시키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사망에서 건짐을 받은 은혜가 아직도 내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생활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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