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사람이 한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나는 이렇게 목회가 안 되지? 교인들은 오는데 왜 떠나가기만 하고....”
“저도 그래요 교인들은 꾸준히 오는데 다 떠나가기만 해요”
“아마도 지하교회라서 그런가 봐요 계단도 많고...”
“예 지하교회고 개척교회고 하니까 교인들이 떠나가는가 봐요.”
어떤 사람이 말을 했다
“목사님 제가 ‘작지만 좋은 교회’라는 팸플릿을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다른 한 사람이 말을 했다.
“헛소리들 좀 그만하시오.”
“......”
“......”
“교인들이 새로 올 때에 개척교회인줄 모르고 왔습니까? 개척교회인줄 알고 왔을 거 아닙니까? 지하교회인줄도 의당 알고 왔을 것이고 그런데 왜 떠나갔습니까? 개척교회라고 떠나갔습니까? 지하교회라고 떠나갔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목사님들이 문제가 있어서 라고는 생각을 안 해봤습니까?”
“......”

또 다른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지난달에 미국에 있는 어느 사십대 중반의 목사님이 한국을 다녀갔다.
건강검진도 할 겸 겸사겸사해서 한국에 왔다고 한다.
나하고는 별다른 대화가 없는 그냥 우연한 식사를 두 끼를 했다.

그는 한국에서 일반대학을 나오고 신학을 해서 한때는 일반대학출신이 신학대학원을 해서 목사가 된 것이 자랑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유치원과 함께하는 목회를 하다가 미국에 가서 이민 목회를 하면서 장로와 갈등이 생겨서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교회를 사임한 후에는 사업에 뛰어 들어서 일을 하다가 상처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 한국에 와서 목회지를 알아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귀국해서 목회를 할 구상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으로 같이 식사를 할 때에 내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은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목회를 직업으로 알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미국의 이민 목회는 교인들이 더 목사를 직업으로 아는 것이 문젭니다.”
그랬더니 그 말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면서 미국교인들에 대한 아픔이 묻어나는 말들을 했다.

나중에 말을 들으니 부산의 어느 동기목사가 자기의 목회를 물려 줄 테니 그 대가로 시골에 있는 땅을 자기에게 달라고 해서 그 교회에 가서 설교도 하고 선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또 분당에 있는 친구목사도 상가교회와 교인들 250명 정도를 물려 줄 테니 앞서 말한 같은 땅을 자기에게 달라고 제안을 해서 거기도 가봐야 한다는 말을 삼자를 통해 전해 들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를 자기들이 임의로 재산과 바꾸는 흥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되는 일이다. 세상에서나 일어나는 매관 매직이 교회에서도 일어난다면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도 일어나는 장사꾼들이 서로 주고받는 권리금이나 프리미엄을 붙여서 사고파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나에게 그 사실을 전해주는 분에게 “목사가 그의 믿음과 영적인 지도력과 주님이 쓰시는 것 때문에 부름을 받고 청빙을 받아야지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 인해서 청빙을 받는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그것을 제안하는 사람이나 거기에 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을 해주면서 다음의 말을 그 목사님에게 반드시 전해달라는 말을 부탁을 했다.      

“목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목회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단지 주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이 잘 쓰실 수 있는 도구로 주님이 부르시고 훈련시키시고 준비시키면 주님이 쓰시는 것이다.
목회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을 낸다고 되는 세상일이 아니다. 무슨 결단과 독한 마음을 품고 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목회는 돈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지식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방법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신학을 했다고 목회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하고도 목회를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도 실직자처럼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목사가 되었다고 목회를 하는 것도 아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많은 이들이 대리운전을 하고 택시나 버스기사를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가 아닌가?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떤 이는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기도 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목사면서도 부동산 중개인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목사면서도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애초부터 부르심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실수가 없다. 주님의 부르심이 없이 신학을 하고 부르심이 없이 안수를 받고 부르심이 없이 목회를 시작했기 때문에 큰 교회 목사라도 목회가 아닌 직업으로 목회를 하고 개척교회목사로서 먹고 살기위한 목회를 하는 생존자체가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하심의 걸음이 아니라 자기 걸음으로 주님을 따라 나섰던 사람들의 비극이 성경에도 얼마나 많은가?
가인이 그런 인생을 살았고 에서가 그렇게 살았으며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 길을 가지 않았는가?
건너편에서는 아브라함이 그동안 순례자의 길에서 믿음으로 연단을 받아 바야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에 다른 한편에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그의 딸들과 함께 종족보전을 고민해야하는 처절함 가운데 빠진 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자기걸음으로 신학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자기의 생각과 계산과 계획대로 교회를 개척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사람의 공교함과 육신의 열심과 지성을 가지고 설교하고 목회를 하는 이들에게 현존하고 있는 고통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작금의 한국교회는 소돔의 롯과 같이 그돌라오멜왕에게 사로잡혀간 롯과 같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시지 않으면 버림을 받아 마땅한 지경에 까지 이른 것이 그 현실이다. 세상을 이길 힘이 없다 악한 자를 대항할 힘도 없다. 덩치는 크고 교인들은 많다고 자랑할지 모르나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영적인 전투력을 갖춘 교인이 이 사람이라고 당당히 하나님 앞에는 물론이요 세상에도 내놓을 교인들도 없고 목회자자신들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이 한국교회의 영적인 현실이다.

구원은 무엇으로 받았는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로 받은 것이 아닌가?
그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은혜는 무엇인가?
받을 수도 없고 받을 자격도 없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은혜가 아닌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도 믿게 하시는 은혜가 임한 것이지 내가 믿은 것도 내가 믿으려고 애를 쓴 것도 아니지 않는가?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가?
그것도 때마다 순간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닌가?

교회생활도 은혜로 하는 것이지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자기 힘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은혜를 모르는 이요, 은혜를 구하지도 않는 사람이요, 필요로 하지도 않는 사람이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이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라는 찬송가와 같이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을 한 것과 같이 은혜가 없이는 한순간도 살수 없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면 주의 일은 무엇으로 하며 목회는 무엇으로 하는가?
은혜로 하는 것이다.

은혜를 주셔야 전도가 된다.
은혜를 주셔야 한사람이라도 교회에 들어온다.
은혜를 주셔야 교인들이 붙어 있고 떠나가지 않는다.
교회에 교인들이 오고 교회를 떠나가지 않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셔야 한 교인이라도 주님 앞으로 인도하며 한 영혼이라도 주님과 함께 사는 믿음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설교한다고 설교가 아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설교, 믿음을 주는 설교, 교인들로 믿음으로 살게 하는 설교가 진정한 설교인데 설교할 때마다 주님이 은혜를 주셔야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성도들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는 것도 주님의 전적인 은혜가 임해야한다.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목회자나 평신도나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미국에 집회를 하고 와서는 집회한 교회 목사를 일컬어 말하기를 “그런 사람은 목사가 돼서는 안 될 사람인데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그 말을 듣는 나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더 안타까웠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중학교밖에 안 나오고 강원도 시골에서 깡패짓이나 하고 돈이나 빼앗고 도박에 빠져서 방탕한 삶을 살던 중에 주님이 은혜로 부르셔서 주님을 만나고 기도하면 병도 낫고 귀신도 쫓겨나고 하는 은혜를 받는 가운데 뒤늦게 고등학교를 하고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은혜를 모르는 상태에 빠져 버려 자기가 받은 은혜도 잊어버리고 남이 받은 은혜도 은혜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에는 교회 돈을 횡령하여 법정에서 실형을 받기에까지 이르는 악함이 나타난 것도 저가 벌레처럼 짐승처럼 살 때에 자기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구원해주시고 목사까지 되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영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문둥병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신앙생활이나 목회를 하는 것은 가장 실질적인 문둥병자임에 틀림이 없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지만 오늘 하루도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지만 전도도 할 수 있고 목회도 할 수 있는데 그 은혜를 작게 여기고 돈으로 목회를 하고 예배당으로 교인수로 목회를 하려고 하는 이들, 자기가 배운 지식들 신학이나 성경지식까지도 주님이 날마다 베풀어주시는 은혜보다도 더 크게 여기는 교만이 그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주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성경을 읽을 수도 없고 읽어도 깨달을 수가 없으며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깨달은 말씀도 순종할 수 없는 우리는 그렇게 무기력하고 무능한 존재임을 아는가?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무릎을 꿇을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고 간절한 심령으로 부르짖을 수도 없다. 1980년대에 철야하며 부르짖던 부르짖음이 왜 없어졌는가? 우리가 열심히 없어서? 게을러서? 아니면 부자가 되어서 배가 불러서라고 생각을 하는가? 아니다 주님이 밤을 새워 부르짖는 은혜를 거두어 가시고 주시지를 않으시기 때문이다. 새벽기도가 왜 형식적인 시간이 되어 버리고 기복신앙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는가? 주님이 그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은혜를 거두어가신지가 오래며 그 은혜를 다시 내려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공부는 있는데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지를 않는다.
제자훈련도 있는데 주님의 진실한 제자가 되는 은혜를 주시지를 않는다.
예배 때마다 빠지지는 않아도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주시지를 않는다.
전도를 해도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준비하고 설교를 하지만 교인들도 안변하고 교회도 변하지를 않고 세상죄인들이 보기에도 도덕적으로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큰 교회는 있는데 큰 성령의 역사가 없다.
큰 예배당은 있는데 큰 은혜가 없다.
유명한 목사들은 많은데 주님이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모습이 없다.
파송선교사들은 많은데 주님이 은혜를 주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시원한 선교지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다.

지금은 은혜가 필요할 때이다.
우리에게 주셨던 은혜가 생각이 나야 할 때이다.
목사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나 같은 죄인을 불러주신 은혜가 기억이 나야할 때이다.
그리고 이전에 주님이 이 땅의 교회에 베풀어 주셨던 은혜가 생각이 나고 말하여 질 때이다.
이전에 전도훈련을 받고 영혼사랑하지 못한 것을 아파하고 회개하며 자기자신의 영혼도 돌아보지 못한 아픔이 울고불고 했던 그 은혜가 생각이 나야할 때이다.
              
주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우리는 무익한 존재입니다.

주님이 해 주셔야만 합니다.
주님 이제는 내걸음을 버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걸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일방적이며 전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시며 주님 앞에 항복함으로 두 손을 높이 들어 부르짖는 은혜를 주옵소서.

주님 한번만 더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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