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 한국교회가 큰일이 났습니다. 교회들이 교회성장을 믿고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일전에 만난 어느 목사님이 심히 근심하는 얼굴로 낸 말이다.

“장로님 교회가 교회가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 행사가 있어서 갔는데 부목사가 복음성가를 인도하고 있었는데요 그것이 영락없는 세상노래요 유행가이었지 찬송가가 아니었습니다.”

“장로님 자기들도 이것이 목회가 아니라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할 것이 딱히 없어서 그러고들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국교회의 현실이 참담하기가 그지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불신의 대상이 된지도 오래된 한국교회가 아닌가 말이다. 전도가 안 되는 것도 안타까운데 전도를 못하게 하는 일들이, 복음전도를 훼방하는 일들이 지난 십수 년 동안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 전도가 안 되니 남의 교인들을 데려오는 데에 혈안이 되다시피 하고 남의 교인을 데리고 오면 돈도 주고 상도 주는 교회도 있다는 말도 들려오는데 그와 같은 짓을 하는 교회가 상당수가 있다는 말도 들려온다. 전도사들에게 급여를 차별화함으로 경쟁을 유발시켜 교회를 성장을 시키려고 한다는 말을 분당의 어느 큰 교회이나 정체상태에 있는 교회의 목사에게 오래전에 직접 들은 바도 있다.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사도신경을 바꾸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다.

“..... 교회성장을 믿사오며 거룩함에 개의치 않는 교회와 교인들이 서로 교회성장에 힘을 쓰는 것과....”

말은 안 그래도 내용은 이미 이렇게 타락할 대로 타락한 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배에 성공하라는 이상한 말들과 세상 심리학이나 사회학적인 용어들이 성경말씀을 대신하고 강단에서는 복음이 사라지고 교인들의 심령에서는 십자가의 은혜가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다.

일전에 훈련을 받고 전도도하며 상당한 기간 동안 교제를 했던 어떤 목사들이 영적양식을 구걸하기 위해 워치만니의 지방교회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것은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천수백의 목사들의 교단 몰래 거기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며 부족한 영적인 양식을 얻고자 한다고 하니 이는 한국교회의 종국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그들을 더 이상 형제로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셀을 하고 있는 어느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해서 갔더니 온통 교회당 안에 무슨 포스터를 그렇게 붙여 놨는지 어지러울 정도로 붙여 놓았는데 더더욱 아연한 것은 그 내용이 심상치 않는 것이었다. 잘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는 것들이지만 무슨 마귀의 진지를 강타한다는 가 예비신자를 작정하자든가 별의별 표어를 보면서 슬픈 생각이 드는 것은 저 표어가 교인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목회자가 인위적으로 교인들의 싸늘하게 식은 심령을 저것으로 불을 붙이고자하는 헛된 인간적인 시도임이 틀림이 없는 것이요 성령의 역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을 다 전하고 광고시간에 목사님이 “한교구당 천명씩은 예비신자를 작정을 해야합니다.”라고 강조하는 말을 들으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서 집회 후에 그 목사님에게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건넸다. “목사님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도를 하기 전에 은혜를 주셨는데 이렇게 의무와 부담을 부과하면 그것은 주님의 방법과는 다른 것이 아닐까요?” 아주 곤란해진 표정의 그 목사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영적으로 시들해지고 차가워진 교인들을 그와 같은 것들로 기운을 쐬임으로 살려내고자 하는 안간힘을 쓰는 교회의 현실은 차라리 슬프기까지 한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 교회는 나를 잊을 수 없는 교회고 나도 그 교회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꼭 이십 년 전에 그 교회가 거의 와해상태에 놓였을 때에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이주동안 집회를 하여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교회였다. 그리고 여름전도여행과 추석전도여행을 통해 교인들이 온전한 회개를 통해서 각 심령이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을 했다. 이십 명 남짓의 교회가 일 년도 못되어 이백 명이 훌쩍 넘어서는 일이 일어났다. 신도시에 땅을 사고 교회가 성장하고 이천 명이 넘는 재적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이십오 주년 기념식에서 이 장로를 잊을 수 없다고 목사님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식사 중에 그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
“장로님 이제는 노방전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꼭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냥 마음에 두고 왔다. 그 말은 전도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면 될 것 같다고 해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라는 말이다.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야 한다. 심령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흐르는 역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십 년 전에 그 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병도 낫고 실제 생활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간증에서부터 십자가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불일듯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목사님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이제는 이렇게 목회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말로 내게 들려왔다. 이전에 눈물로 기도하고 전도를 할 때의 믿음이 그리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주님이 주신 것이다.

그래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칠 때가 가장 좋았다는 말을 수없이 많이 듣는다. 교회도 좋았고 목회도 좋았고 개인의 심령도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들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전도방법이라는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서 인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 주신 귀한 선물들을 헛되이 흘러 떠내려 보낸 것이 얼마나 뼈아픈 일인가를 우리는 자각하여야할 때가 되었다.

주님의 말씀처럼 시대를 분별할 줄을 알아야한다. 슬피 울며 이를 갈 사람들의 반열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이제는 사람의 꾀와 힘이 다한 것을 보지 않는가? 마귀의 방법도 다 동이 난 것이 보이지를 않는가 말이다. 이제는 고개를 들 때가 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모압으로 가서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와 같이 이름은 나오미지만 마라라고 불러달라는 절박한 심정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정이 아닌가 말이다.
이제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베들레헴에 하나님이 양식을 주셨다는 소문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를 지체하지 않은 나오미를 본받아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곳으로 하나님이 양식을 주시고 내 심령에 이삭을 주워서라도 채울 수 있는 곳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나갈 때는 풍족하게 나갔지만 하나님이 비어 돌아오게 하였음을 고백하고 돌아 가야한다.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시는 세월들을 보낸 것을 자각하고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목회자 한사람 때문만이 아니라 목회자만을 빤한 눈으로 바라보는 불쌍한 양떼들을 위하여서라도 저들의 지도자가 무엇을 하라고 해도 다 순종을 했던 영적은로 뼈만 남은 앙상한 에스겔골짜기의 마른 뼈 같은 심령을 가지고 사는 저들을 위하여서라도 이제는 주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오미가 보리추수가 시작이 될 때쯤에 베들레헴에 이른 것과 같이 영적인 추수 때가 가까이 왔다. 그 추수 때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께로 머리를 돌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시간이 없다. 때가 촉박하다. 기회가 지나가면 다시는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무엇을 하느냐 무슨 목회를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오! 주님 오늘날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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