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들으러 왔던 두집사님과 상담을 한 일이 있었다.
그중에 한 집사님이 질문을 했다.

“장로님 우리교회에 십일조를 안하고 다른데에 하면 안됩니까?”
“왜 그럽니까?”
“교회에서 십일조나 헌금을 너무나 잘못쓰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이 십일조를 해야하나 안해야하나를 놓고 갈등이 되고 근심이 될 때가 많습니다.”
“......”
“또 목사님이 얼핏던지는 말을 들었는데 11억을 융자해서 주차장을 사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이자는 교인들의 헌금에서 나올거니까’라고 하는 말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에 마음에 상처가 되었습니다.”
“십일조는 본교회에 해야 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그것을 잘 쓰고 잘 못쓰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결론부터 내려 놓고는 그동안 쌓였던 아픔을 내어 놓는 두집사님의 말을 들으면서 참 여러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다.  
그목사님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교단에 과시하기 위해 주차장을 사는 것이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교인중에 돈을 착복하는 사실을 알고 목사님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목사가 그교인을 오히려 감싸고 도는 것에 의아할수밖에 없다고 해서 그것은 당연한 것이 그목사님은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하기 때문에 그와같은 사실에 대한 제보를 받고 어떤것이 교회라는 조직에 유익이 될까하는 저울질을 하고 난후에 판단하고 이문제를 그냥 덮어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해주자 정말 그런 것같다고 했다. 훈련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교회안에 묶어두려는 속셈도 교인들이 다 알고 있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내가 오늘 이교회를 왜왔지?”스스로에게 자문을 하지 않을수 없다는 말도 했다. 어느날은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설교에 대해서 남편에게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말을 할 입장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이런말은 교회가 아니라도 세상에서도 들을수 있는 말이야”라고 실망감을 표현하더라고도 했다. 설교에 영감도 없고 예수도 없고 말씀도 없어서 오히려 한주간동안 주님이 은혜를 주시면 교회에 나와서 까먹는 형국이 되고 있다고도 했다. 어떤 때는 강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린다고 광고를 해 놓고 그강사의 영상설교를 틀어주기도 한다고 했다. 교인들의 말이나 제안에 아예 귀를 막고 있다는 말도 했다. 새벽기도 안나오면 벌을 받는다고 공갈협박하는 식으로 새벽기도를 나오라고 해서 교인들이 새벽기도에 조금 늘었다고 교회간사가 좋아하길래 그렇게 새벽기도에 안나오면 큰일 날 것같은 협박을 하는데 무서워서라도 나오지 않겠느냐고 대꾸를 해주었다는 말도 했다. 아프리카의 어느 목사가 한국의 목사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말씀을 전한 비디오를 교인들에게 보여 주는데 그 내용을 마치 교인들이 회개를 해야하는 것처럼 교묘하게 편집을 해서 보여주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런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속에서 판단이 되고 불이 나는데 내가 이러면 안되지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에 속으로 끊임없이 “주여 나를 좀 도와주세요”부르짖으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아주오래전에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했다. 어느 권사님이 목사님에게 시험에 들어서 교회 현관에서 난리를 친적이 있었다. 그는 교육청의 장학사로서 나중에는 교장을 지낸 똑똑한 남자권사였다. 나보다는 열몇살이나 많았지만 나를 좋아했고 나의 믿음을 존경했던 사람이었다. 그를 가까스로 진정을 시킨후에 내가 그에게 말했다. “권사님 저는요 목사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의 연약함과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존경하기 때문만이 아닌것을 말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도 우리가 무슨 장점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님과 목사기 때문에 장로기 때문에 존경할만한 인격을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그는 나의 말을 알아 들었고 곧 진정이 되었다. 그는 그 후로 별 탈이 없이 교회생활을 하였다.

주님이 나에게 가르치신 것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수 있는 것이다. 연약하면 약한대로 악하면 악한 대로 때로는 교만하면 교만한 대로 그사람을 그사람의 수준에서 보는 것이다. 내 기준으로 사람을 보면 안 된다. 막연한 기대를 가져서도 안된다. 사람은 사람이다. 그사람의 기준에서 사람을 보는 것을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존경할수는 없어도 사랑할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쌍히 여길 수 있고 위하여 기도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다. 먼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사람의 좋은 점이 보여도 섣부르게 칭찬하지 않는다. 칭찬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종은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다. 여약한 점이 보이면 그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죄인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그목사님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해 준 것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정죄하는 마음이 들어 가면 그것이 곧 마귀의 전략에 넘어가는 것이며 나의 영혼만 상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상실하는 것에 대해 말해 주었다. 얼마전에 내가슨 글을 악하게 비평하는 글이 협회로 보내어졌다. 그것은 악령의 수준의 글이었다. 보낸사람이 귀신에 들린 것을 가늠할수 있을정도로 악한 글이었다. 간사중에 한 사람이 그글을 읽고 격분을 했다. 그래서 즉석에서 그에게 말해주었다. “이것봐 그렇게 화를 내면 마귀가 목적한 것을 이루는 것이야. 마귀가 그 글을 보낸 목적이 성취가 되는 것이지. 그러면 마귀가 얼마나 기쁘겠어 화내지마 그사람이 불쌍한것야 상대할 필요없이 그냥 불쌍히 여겨.”라고 말을 해준적이 있다. 어떤이들은 이유빈 장로가 어떻게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겠는가라는 의아한 미암을 나에게 말해온적도 있었다. 정말 들을수가 없는 설교들이다. 내용도 없고 남의 것을 베끼기도 하고 이전에 설교한 것을 재탕삼탕해서 생명력도 없이 되풀이 하고들 있었다. 30년전에 나의 아내가 어느 주일날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경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을 했다. 교회에서 초라하고 가난한 늙은 할머니 권사가 자기를 잡고 “우리목사님이요 자기설교하는 것이 안니고 남의 설교를 베껴서 하는 것 내가 다 알아요 들어보면 알 수 있어요”라고 말을 하더란다. 나는 그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주님을 만났다. 목사님의 설교에 “예수”라는 이름만 들을수 있으면 감사의 눈물을 시냇물처럼 흘리면서 말씀을 들었다. 강단에서 세상말을 해도 허튼소리를 해도 그것과 상관이 없이  내안에 성령님은 나에게 영감을 주시는 일을 쉬지 않고 하셨다. 어느날은 우리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얘야 저목사가 저런 설교를 듣고 교인들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고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삶을 살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정신병자 수준이다. 그런데 그런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이야.” 주님의 아픔을 나에게 말해 주신 것이었다.  

그 집사님들에게 남을 정죄하는 것은 나의 영혼에 해가 되고 독이 되는 것을 말해주었다. 내가 목사님을 보는 눈보다 주님이 목사님을 보는 눈이 더 밝으며 내가 마음아파하는 것보다 주님의 마음이 더 아프기 때문에 주님보다 앞서서 흥분하거나 화를 내거나 의분을 표하지 않는 것이 주님을 아는 사람의 모습임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주님의 눈으로 볼 때에 그목사를 불쌍히 여길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주신다는 말도 해 주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요?”
“알아서 열심히 찾아 먹어야지요.”
“.....”
“나도 그랬어요 내가 알아서 주님으로부터 양식을 받아 먹었어요”

나는 교회를 갈 때에 무엇을 받아 먹기 위해서 가지 않았다. 나를 보고 나를 만나는 성도들에게 내가 한주간동안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이 주신 것들을 나누어 주고 보여주기 위해서 교회를 갔다. 직장을 다니면서 바쁜중에도 아침에 두시간반을 말씀보고 기도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말씀과 기도가 아니면 하루를 영적인 정상인으로서 살수 없는것을 직장생활에서 피부에 와 닿도록 날마다 경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했다. 저녁에 자기전에 두시간 세시간씩 주님과의 개인적인 시간을 매일같이 가졌다.. 일상생활속에서 주님은 은혜를 주시고 영감을 주셨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이 늘 있는 삶을 살았다. 나는 주님을 만나고 주의 얼굴을 뵈옵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갔지만 영적으로 배가 고파서 주린영혼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를 간적은 단한번도 없었다.

새벽기도를 멀리서 운전을 해서 오는데 말씀도 그저 그렇고 기도도 잘 할 수 없게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러면 차라리 집에서 골방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교회가 막다른 골목에 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주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 곧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기다리라는 말로 권면을 해 주었다. 쥬스를 한잔 마시며 말을 나누던 까페의 종업원이 끝날 시간이라고 아까 말을 해주고 갔는데도 그종업원들의 눈치를 보면서 끝까지 한마디라도 더 묻고 들으려는 목마른 영혼들의 모습을 보았다. 나를 차로 교회에 데려다 주면서 “장로님 고마워요”라고 하는데 내가 할말이 없었다. 그인사를 받을수도 없어서 “주님께만 감사! 나는 종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말을 하고 다음에 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주님이 언제나 이 한국교회에 좋은날을 보내어 주시사 교회가 교회답고 영혼마다 소생하는 일들이 임하게될까?
주여 거룩한 부흥을 주옵소서. 속히 임하게 하옵소서 영혼들이 기진하여 죽게 되었나이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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