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외에는

지난 월요성경학교후에 어느 목사님이 최근에 교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간증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전주에는 사모님이 간증을 했는데 목회 13년만에 주님의 일은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한 간증에 피차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
목사님이 최근에 주님이 자신과 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신 일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간증을 했다.
십삼년전에 개척을 하고 전도훈련을 받고나서 교인들을 훈련에 보내면서 2002년에 온나라가 월드컵 축구에 빠져 있을 때에 교회에 거룩한 부흥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한다. 예배때마다 눈물로 예배를 드리고 교인들마다 죄를 자복하고 정결케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은혜가 살아있는 교회가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따로 목사님이 개인적으로 실토를 한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말씀의 지식의 규모가 없어서 그 주님이 주신 귀한 부흥을 간수하지 못하고 흘러 떠내려 보낸 것이 얼마나 심령이 아픈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옛사람의 자아와 새피조물의 자화상에 대하여 자세히 묻고 또 묻곤 하였다. 자신도 그것이 안되어서 부흥을 잃어버린 것을 아파하고 있었다.
주님이 주셨던 부흥이 떠나갈 때에 마귀의 유혹이 있었다고 했다.

자녀에게 영어공부를 시키고 싶은 열망에 케이블 티브를 설치하고 미국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같이 그속에 빠져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영감을 상실하였다. 곧 강단이 메마르고 교인들은 신음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번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간 형국에서 도저히 빠져나오지는 못하고 점점 더 수렁속에 깊숙이 빠져 들어가기만 하였다. 그리고 건강을 위한다며 테니스를 시작을 하면서 그중독성에 더 깊이 영혼이 유린을 당하는 지경에까지 들어가버렸다. 그런가운데 무기력한 목회를 지속할수밖에 없었고 교인들이 잘못해서 책망을 하니 좋지 않은 소리가 들려오고 해서 이제는 그냥 교인들에게 좋은 목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안일한 목회를 하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교회만 나오며 종교생활을 하던 어떤 처녀가 주일날 회사사람들과 놀러갔다오다가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죽게 되었는데 그시간이 주일날 열한시 십오분이었다고 한다. 그보다 더 마음이 아팠던 사실은 그영혼에게 복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그가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와같은 일을 당하였는데 목사님은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가지 되었는가라는 생각에 너무나 큰 좌절감에 빠져서 주님앞에 너무나 죄송한나머지 혼잣말로 죽고싶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아디론가 도망가고싶다는 말도 하면서 슬픈 마음으로 지내는중에 주님이 만져주시는 역사가 일어난것이다. 사모님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평생처음으로 교인에게 한마디 “힘들지요?” 라고 한말에 교인이 울어버리는 역사를 통해 아목회는 마음으로 하는 거구나하는 사실을 체험하게 하시고 동시에 교인들의 마음속에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라는 경각심을 주님이 불어 넣어주시는 역사가 있었다. 교회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다. 목사님이 말을 해도 그렇게도 꿈쩍하지 않던 불순종하던 교인들이 추석사경회에 올라가자는 말들이 서로의 입에서 나오기를 시작을 했다. 그리고 추석사경회에 올라와서 한사람도 빠짐이 없이 은혜를 받았다. 마지막시간에 천국에서 만나보자를 하면서 서로서로 끌어 안고 가장 큰소리로 울부짖던 교인들이 바로 그교회 교인들이었다. 그리고 목사님은 그렇게 빠져 있던 테니스를 주님의 은혜로 끊었다. 사모님의 기쁨의 말이 “우리 목사님요 테니스를 치는 목사님들에게서 전화 한통화도 않와요”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니기를 좋아하던 사모님이 외부로의 발길을 냉정하게 끊었다. 그리고 두주후의 제직훈련에 목사님이 참석을 했다. 훈련중에 두 번에 걸쳐서 부끄러운 죄를 자백을 했다. 그리고 얼굴에 광채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누구든지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목사님이 고백을 한 사실은 사실상 마귀에게 속아서 패배의식에 눌려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가운데 빠져 있었음을 고백을 했다. “너는 안돼 너는 아무것도 할수 없어.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시겠니?”라는 마귀의 조롱과 비웃음에 넘어가곤 했던 자신의 아픔을 털어 놓았다.  

목사님이 간증을 마치면서 지금까지는 ‘교인들에게 우리목사님 좋은 목사님’이라는 말을 들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바른 목사가 되겠습니다라고 말을 했는데 내가 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주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애야 좋은 목사도 말고 바른 목사도 말고 나에게는 순종하는 목사가 필요하다고 해라”
그렇다 좋은 목사니 바른 목사니 하는 것이 사실은 사람들에게 사람들앞에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에게는 좋은 목사도 순종하는 목사요 바른 목사도 순종하는 목사이다.

주님이 변화산에서 세제자들과 내려오셨을 때에 산밑에서는 주의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다. 주님이 그영문을 물으니 어떤 사람이 귀머거리들린 자기의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는데 능히 고치지를 못했다는 것이었다. 주님이 그이를 데리고 오라고 명하시고 그아이에게 있는 귀신을 쫒아내시고 고쳐 주셨다. 주님과 제자들이 한적한 곳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이 주님께 나와 질문을 했다. 왜 우리는 능히 고치지 못하였는지 그이유를 물었을 때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외에는 이런유가 나갈수 없느니라”고 대답을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 능력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말을 한다. 그것은 대단한 오류이며 사실상 하나님나라의 반역이다.
능력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능력을 사람에게 주신 적이 없다.
사람은 도구로 사용되는 것뿐이다.
믿고 순종하는 그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을 하던 앉은뱅이를 고친후에 사람들에게 자기를 주목하지 말것을 부탁을 한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행 3:11-13전)  

주님도 미련한 사람들이 주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육체로만 볼까봐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을 주문하셨다.

능력의 주체도 하나님이요 사역의 주체도 하나님이시다.
전도의 주체도 하나님이시며 목회의 주체도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을 행하시는 이는 우리안에 계신 성령이다.
육체로는 아무것도 할수 없으며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일군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전적인 순종이다.
바울은 자기가 일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기의 존재자체도 주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고백을 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목회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과 사람들이 하는 것을 흉내를 내려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다.
전도를 할수 없는 것도 모든 주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들도 다 그와같은 이유에서이다.  

변화신 밑에서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였던 이유가 분명하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열심으로 그 일을 하려고 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지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었다.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귀신을 고치려고 했고
그의 아버지 곧 사람이 요구했기 때문에 고치려고 했으며
자기들이 예수의 제자라는 것이 노출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일을 하려고 했던것 뿐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하실 때도 아니었다.

우리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소원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행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제자들이 실패를 한 이유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일을 하고자하는 소원을 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실수가 없었고 권능도 역사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주의 일을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것이 이것이다.
주님의 뜻대로 시작을 했다가도 어느순간에 사람의 뜻과 열심과 욕심으로 바뀌어 버린다.  
주님을 따라가다가도 어느새 사람들을 따라가고 사람들이 한것을 본받으려 하고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을 하였으나 어느새 환경과 풍조에 치우쳐 방향을 바꾸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소원을 주시고 행하시게 하는 주님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그럼으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려운 일만 생기게 되면 사람은 더 악해지고 주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아져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는 악함에 빠지거나 아니면 자포자기하고 무기력한가운데 자기를 탓하고 좌절된채로 남은 때를 보내는 이들도 많이 있는 것이다.

이해를 쉽게하기 위해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예수를 믿고 은혜를 사모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이 쓴 번역책들을 읽기를 시작을 했다.
그런데 그번역이 조악해서 어떤때는 뜻을 연결하려고 애를 쓰다가 머리가 아파지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때에 주님이 나에게 기왕이면 영어로 그책들을 읽으면 어떻겠냐는 소원을 주셨다.
그것은 내뜻도 아니고 내 열심도 아니었다. 그것은 참 사소한 것이었지만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이었다.
그날로 영어를 하고자하는 소원이 내게 들어왔고 그것을 할수 있는 지혜도 주님이 주셨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게 하셨는데 주님은 이세상에 없는 방법으로 영어를 터득을 시켜주셨다. 짧은 시간에 영어책을 몇권을 외워버렸다. 워드파워라는 책도 사분의 삼가량을 외워버렸다. 그리고는 영어식 사고방식에 나에게 생겼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나에게 영어로 들려 왔다. 아 저말이 영어로는 이렇게 되는데 하는 식이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일이다. 그러나 작은 일까지도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소원을 우리안에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된다. 소원을 주시고 그것을 행하게 하시는 것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자기의 소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자기의 뜻대로도 안되는 것이다.
자기의 열심히도 아무것도 할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그러면 제자들은 왜 실패하였는지 그이유가 자명해진다.
제자들은 주님이 그들에게 주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소원을 주시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서둘러 일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 날 수가 없고 귀신을 쫓아내는 외적인 시늉만을 되풀이하다가 그친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권능이 없는 목회는 외적인 시늉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 전도나 사역이나 선교나 모든 것이 외적인 시늉으로 끝나는 것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들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제자들과 달리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었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다.
그다른 이유를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수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무엇을 기도하셨는가?
제자들이 잠을 잘 때에도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산에 올라가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것은 무엇을 구하신 것일까?

모든 일을 행하시고 이루시는 아버지께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이 쓰실 때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때에 순종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혹시 만에 하나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순종하지 못할까봐 마음을 조림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기도하신 것이다.
주님은 말씀 하나도 하나님이 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하셨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 12:49,5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 8:28)

일도 하나 하나 하나님이 하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6-19)

주님은 육체에 있을 때에 항상 쉬임없이 기도하셨다.
기도하지 않고 순종함이 없이 주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기도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종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도 몰랐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때도 몰랐으며 자기들앞에 있는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려하였지만 자기들이 하려고 한것뿐이었다.

오늘날도 많은 사역자들이 이와같은 어리석음에 빠져 있기 때문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수고는 수고대로 하면서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주님이 명하실 때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전에 삼십여년전에 내가 예수를 처음믿고나서 어느교회에 이런 표어가 붙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자”

아마도 이말이 주님이 말씀하신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수 없느니라는 말과 같은 말일 것이다.  
  

(*.177.17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