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평상시 울지도 않던 사람들이 십자가의 눈물이라 하여 눈물을 흘리고 우는 일들이 일어난다. 평상시의 생활을 보면 전혀 울지 않아야 될 사람들이 우는 것이다. 일년에 단 한 번이 있는 고난주간과 부활절 시즌의 특별한 풍경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순절이라 하여 부활주일이 오기 훨씬 전부터 주님에 고난의 환경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며 주님의 십자가의 감정을 이입하는 준비작업을 한다. 교회는 이를 도와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교인들에게 주님의 고난을 인식하게 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리고 그야말로 특별한 기간이 되도록 노력을 한다. 금식도 하고 특별기도회도 한다. 칸타타도 준비하고 플래카드와 게시물들 그리고 그 외에도 달걀과 떡, 그리고 분위기를 고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준비한다. 그리고 예배도 설교도 찬양도 거기에 맞게 준비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즐겁고 기쁜 분위기도 한껏 억제하려는 노력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부활주일의 새벽에는 촛불을 들고 예배를 드리고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축하를 한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고난주간을 경건하게 보내고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울고 하면 고난주간과 부활절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고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활주일이 지나고 어떤 생활을 사느냐가 고난주간을 잘 지내고 부활절을 잘 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은 행사에 속는 분이 아니고 프로그램에 속는 분도 아니다.

주님은 부활절 칸타타에 속는 분도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다.

부활주일이 지나고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느냐를 주님이 보신다.

부활주일을 지나고 얼마나 주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지를 주목하신다.

부활주일이 지나고 고난주간 이전의 경박함으로 사는 것을 식구들이 다 아는데 주님이 모르실 리가 없다.


우리는 주님을 바보 취급하면 안된다.


우리가 흘리는 몇 방울의 눈물에 주님이 속으실 리가 만무하다.

우리가 부르는 몇 마디의 찬송에 주님이 그냥 넘어가실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주님은 우리를 신뢰할 수도 믿어 주시지도 않는다.


믿음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믿음은 순종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는 히브리서 저자의 말은 순종하는 생활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그 행함이 곧 순종하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믿음이 없이 흘리는 십자가의 눈물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혼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말을 하여서 감동을 받고 십자가 때문에 울었다 하여도 그것은 일시적인 감동이요 그것도 혼적인 눈물이다.


생각해보니 슬퍼서 우는 것이 혼적인 눈물이다.

마음으로부터가 아니라 머리로부터 나오는 눈물이 혼적인 눈물이다.

사람에게 충동 되어서 흘리는 눈물도 혼적인 눈물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눈물이 참 눈물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눈물인데 그것은 순종하는 인격과 생활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 고난을 맛본 그리스도인은 눈물을 흘리고 울기보다는 순종을 하는 사람이다.

참 그리스도의 부활을 맛본 사람도 눈물만 흘리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가지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순종하여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어떤 감동이나 은혜나 눈물이나 순종하는 사랑이 없는 사람의 것은 값싼 눈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잠시 후에 곧 사라질 혼적인 눈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실한 눈물은 무엇인가?

주님이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셨나?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왜 주님은 당신을 위하여 울지말고 주님은 너희와 너희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셨을까?


이 고난은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우는 사람은 주님에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의 죄를 위해서 울고 자기 자녀의 죄를 위해서 우는 사람은 고난이 자기의 고난이요, 십자가가 자기의 십자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를 위해서 우는 사람은 고난도 주님의 고난이지 자기의 고난이 아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는 사람은 십자가도 주님의 십자가일 뿐 자기 십자가는 아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울고 자기 죄를 위하여 우는 사람에게는 고난도 자기의 고난이요, 십자가도 자기의 십자가인 것처럼 부활도 자기의 부활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교회 안에 있지만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부활의 권능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 이후의 삶이 아무것도 없고 변화도 없으며 그야말로 이율배반적이며 엉망이 되는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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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죄인이 주님을 위해서 우는 것이 교만이다.

그것은 주님을 모르는 것이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 변화를 받지 못하는 교인들이 다 여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에게 혼적인 감동과 슬픔 이상의 생명을 주지 못하고 주님과 하나가 되는 믿음을 가르쳐 주기에는 역부족이기에 그와 같은 결과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생명의 능력이 없으니 혼적인 감동이나 주려고 하고 교인들의 심령 속에 불을 때야 하는데 난로 안에 불을 때지 못하고 난로 밖에 불을 때듯이 아무런 효험이 없는 사역과 프로그램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없어서 그러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십자가의 복음의 인격이 되지 못해서 그러는 걸 무어라 하겠는가?

교회 안에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교인들로 주님을 위하여 울지 말고 자기를 위하여 울게 하여야 한다. 자기의 자녀들로 울게 하여야 한다. 주님의 고난이 자기의 죄임을 통렬하게 깨닫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회개가 있게 하여야 한다. 죄를 깨닫게 하는 말씀과 자신이 주님하고는 너무나 맞지 않는 죄인임을 아파하는 각성이 있어야 한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자기 마음을 찢게 하는 역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고난이 자기의 고난임을 알고 십자가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임을 깨닫고 예수의 부활이 자기의 부활임을 믿고 동참함으로 변하여 새사람이 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싸구려 눈물과 감정으로 그들의 생활이 교회생활이 다르고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이 다른 이중적인 생활로 세상 사람들에게도 욕을 먹는 천박한 인격을 가지고 사는 부도덕한 교인들을 속이는 일을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

어느 교회이든 어떤 목사이든 이제는 더 이상 혼적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혼적으로 그들의 감정을 자극함으로 속이고 울리는 일을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들이나 하는 악한 일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와 같은 이들이나 그들에게 속는 이들이나 주님은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간사한 사역자들과 세상과 교회를 양다리 걸치듯이 걸치고 사는 이중적인 교인들을 반드시 진노하심으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지나간 성경의 역사를 통해 분명히 알고 깨닫고 돌이켜 회개함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회개가 없는 고난주간은 주님을 상대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사악한 외식이기 때문이다.

회개가 없는 십자가나 부활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회개가 있어야 주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되고 십자가가 십자가가 되는 것이며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는 것이다.

회개가 없는 기독교는 가짜인 것과 같고 회개가 없는 교회는 가짜인 것과 같이 회개가 없는 고난주간이나 십자가나 부활은 가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회개함으로 예수의 고난이 자기 고난으로 믿어지고 체험되는 사람은 반드시 변화된다. 그것이 자기와 자기의 자녀를 위하여 우는 것이다.

주를 위하여 울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울기 때문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의 십자가로 체험되는 교회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 인격이 날마다 더한다.

주님의 부활이 자기의 부활이 되는 교회는 반드시 교인들의 인격과 생활 속에 변화가 일어난다.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자기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번 주일 부활주일 이후에 이와 같은 변화가 한 사람 한 사람씩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혼도 살고 교회도 사는 일이 목격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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