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수련회에 주신 특별한 은혜

 

여름행사를 시작하면서 거룩한 부흥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말씀과 역사와 심령의 회복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수련회는 참으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는 말씀에 익숙한 아이들과 새로 처음 참석을 하는 아이들 그리고 교사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말씀을 듣고 전도를 나갔지만 마치 옛날 부흥회 때에 어른들이 말씀을 듣는 듯한 숙연한 분위기 가운데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며칠 전에 일어난 노르웨이 오슬로의 폭탄테러사건과 무차별살상사건의 주인공인 아르네스 베링 브리레이브릭이라는 청년이 그 말씀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삼일 내내 저녁마다 이 사건을 중심으로 한 죄인의 모습을 성령이 비추어 주셨을 때에 아이들은 그 범인의 모습과 자기들의 모습이 흡사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말씀의 내용은 분리된 죄인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조명을 하였습니다.
한 살 때에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함께 버림을 받고 자란 아이가 가정에서 정상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고 바쁘고 고달프고 삭막한 현대사회 속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은커녕 어느 누구로부터도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한 가운데서 정상적인 친구관계도 가지지 못하고 여자친구하나 사귀지 못한 채 본인은 그렇게도 친구를 사귀고 싶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었지만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철저하게 분리된 인격이 된 사실을 본인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가정으로부터 고립이 되고 사회로부터 고립이 되고 사람으로부터 고립이 되어 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가 이혼함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고도 스스로 고백을 한 이 청년은 육학년 때 즈음부터 아이들에게 집단따돌림을 당하고 체육관에서 혼자 근육을 키우는 일만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었으나 성장을 해서는 자기의 외모 때문에 여자 친구가 붙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미국에 건너가서 성형수술을 하고 수술결과에 스스로 만족하고 좋아 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고 컴퓨터 오락에 빠져서 인간관계도 대화도 단절이 되고 더욱더 고립의 길로 들어선 이 사람은 최근에는 민간인을 잡아 죽이는 오락에 심취하고 열심을 내었다고 합니다. 그의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는 총체적으로 볼 때에 정신병자라고 말을 했지만 그것은 자기가 수임을 받은 사건에 자기의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직업의식으로부터 나온 발언에 불과 하다는 말임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는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이 한 영혼은 이와 같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세상이 밉고 원망스러우며 일반대중들을 미워하며 모든 사람들을 다 원수로 여기고 죽이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 자기의 처지가 자기보다 행복해 보이고 사랑을 받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사람들 곧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어떤 살인마가 이웃집에서 웃음소리만 들어도 그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라 왔다고 한말도 이와 같은 심리현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불행하게 된 것이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관계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요 자기들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앞으로 더 큰 고립과 분리가운데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로인하여 가까운 사람은 물론이요 불특정한 다수를 미워하고 사회전체를 미워하는 대상으로 삼습니다. 범인도 다인종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다인종이 아닌 자기민족을 살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이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격이 강한 사람은 살인마의 길을 택하지만 다른 편으로 내성적이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을 택합니다. 그보다 더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서로에게 힘을 주며 북돋우면서 함께 자살을 하는 집단자살의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사랑이 없어진 말세의 징조가 이와 같이 현시대에 우리에게 나타나고 이와 같은 문제들과 인간상들이 대두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세상에서 사회와 조직에서 사랑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은 아주 오래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정도 이제는 더 이상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가정이 사랑이 없는 것은 그렇다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를 믿는 이들로서 교회 안에서조차 사랑도 관심도 없어진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모두 사랑 없어 냉냉함을 아느뇨”라는 찬송을 “교회모두 사랑 없어 냉냉함을 아느뇨”라고 바꾸어 불러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작금의 현실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청소년들이나 일반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영적으로 열악한 상태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아는 권사가 개인적인 자리에서 말하기를 “장로님 교회가 사랑이 없습니다. 아주 냉랭하기가 이를 데가 없어서요. 예배당에만 들어오면 냉기가 느껴집니다. 교회가 이러면요 얼마 못가서 망합니다.”라고 아픔을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가정에서도 사랑을 받기에는 부모들이 먹고사는 생활에 너무나 많이도 매여 있습니다. 그나마도 저녁이나 주말에 식구들이 함께 있는 시간도 텔레비전이나 오락이나 스포츠에 빠진 나머지 식구들 간에 대화 한마디 없이 잠자리에 들어가는 날이 허다한 것이 가정마다의 현실입니다. 그냥 그럭저럭 잘 지내겠지 하면서 각자가 각자에게 무관심으로 일관된 가정생활가운데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분리와 고립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 근원은 다 창세기 3장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죄인은 버림을 받은 존재입니다.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이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조차 버림을 받는 것은 한사람의 영혼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가운데 들어가게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로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격이 가깝고 먼 사람들에게 죄를 지음으로 그 죄가 자기를 사람들에게 분리시키고 고립을 시키며 버림을 받는 자리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의 분리가 가정에서 사회에서 자기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아담의 아들들이 당장에 이 고통을 맛봅니다. 가인은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부모가 가르쳐준 복음을 믿는 제사를 저버림으로 자신이 가정에서 또 하나님께 분리되는 고통에 자기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인하여 더 큰 고립과 분리를 맛보는 것이 가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와 같은 두려움과 고통과 분리와 고립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맛보고 경험하면서 삽니다. 어렸을 때에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슬피 울고 어른들은 그것을 즐기고 하는 작은 일조차도 분리의 두려움 곧 사랑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안에서의 편애가운데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고 차별대우를 하는 부모를 미워하는 것도 분리와 고립의 아픔과 두려움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책망을 받고 징계를 받고 벌을 받을 때에 사랑받지 못하고 분리될까 두려워하는 두려움 때문에 떠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면서도 변함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확신을 시켜 주지만 어리석은 인간은 그렇게 할 사랑이 없습니다. 자기의 정욕대로 징계를 하면서 더 죄를 지으면 아주 버릴 것 같은 말과 감정을 쏟아 놓곤 합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오락에 빠져서 살고 텔레비전과 같은 화면문화에 탐닉을 하면서 사람의 얼굴을 대하는 것이 어렵고 힘든 분리된 인격체로 진행이 됩니다. 한 달이 가도 두 달이 가도 집에서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진 것은 섬뜩한 사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브레이빅이라는 청년도 그와 같은 아이들 중에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무슨 말을 말할 수도 없고 말할 것도 없는 아이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로봇트요, 철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장롱이나 어떤 가구와 다름없이 말이 없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락을 하면서 컴퓨터에 빠져서 시간을 보내면서 가정안에서도 인격적인 접촉이 없는 고립된 인격으로 자라갑니다. 사람이 필요 없고 대화가 필요 없으며 인격적인 교류나 마음의 교통이 필요 없는 생활을 살고 거기에 익숙해져 갑니다. 그러면서 작자신이 느끼는 고립감의 이유를 부모 때문으로 돌립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부모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은 청소년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의 죄가 인간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고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도록 죄인을 분리시키고 하나님과 분리된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함으로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사랑할 수 없는 생활을 살고 있는 것을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가정에서 자기를 분리시키고 식구들로부터 분리되고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상을 말했을 때에 아이들이 받은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자세한 설명이나 대입이 없어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자기들의 모습이 노르웨이의 청년의 길로 접어들어 있음을 보는 것은 아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이박삼일의 짧은 집회였지만 마지막 시간에 통곡을 하는 아이들도 더러 눈에 띌 정도로 하나님이 크신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어떤 아이는 집에 돌아가서 교회에서 간증을 했는데 그 아이는 집에서나 교회에서 말을 전혀 하지 않는 아이였답니다. 교인들은 그 아이가 술술 유창하게 말을 하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기가 말문을 닫고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는 것에 놀랐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자기 부모님의 가정생활 때문이었습니다. 그 부모는 교회를 다니고 어머니는 집사였으며 은혜도 받고 전도도 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있는 집사였지만 가정에서는 남편을 억누르고 욕을 하고 격렬한 부부싸움을 하고 하는 가운데 아이가 받은 상처는 결국 입을 다물고 사는 인격으로 진전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이가 은혜를 받아 굳게 닫혔던 말문이 열리고 그로인하여 교회가 큰 은혜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도 어떤 아이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은혜를 말하기 위해서 불가불 자기 부모의 가정생활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부부는 집사부부였는데 누구보다도 은혜로 사는 것처럼 여겨지던 부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간증으로 그렇지 않은 모습이 드러나고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이 다른 이중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로 인하여 가정이 회개를 하고 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났고 교회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어른들의 집회에 못지않은 큰 은혜를 하나님이 청소년집회에 부어 주셨습니다. 적지 않은 아이들은 더 큰 은혜를 사모해서 그 다음 주에 있었던 여름전도여행과 그 후에 있었던 집중코스에도 참석을 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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