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자 하나님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3:4)

 

창세기는 오랜 세월동안 신학자들의 전쟁터(battlefield)가 되어 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사실을 가리켜 창세기 1장부터 11장은 지뢰밭”(minefield)이라고 표현을 했을 정도로 지나 간 이천년의 신학역사상 성경 중에서도 마귀의 공격이 가장 많았던 책이 창세기이다. 많은 잘못된 학자들과 많은 이단들이 창세기를 왜곡함으로 출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창세기 신학은 총체적으로 복마전(伏魔殿)과 같은 상황이라고 말을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진화론의 시조인 다윈의 종의 기원등을 필두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공격이 많았으며 창세기는 모세가 쓰지 않았다고 공격을 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과학자들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이 놓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사람에게 증거를 찾지 아니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5:34)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스스로 증거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글머리에 인용한 히브리서의 구절과 같이 만물을 보면, 그 지으신 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랍비 아키바 벤 요셉은 이렇게 말했다.

 

집은 그것을 지은 건축자가 있는 것을 증거하며 옷은 그것을 짠 사람이 있음을 증거하고 문은 목수가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며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말이라기보다 히브리서 3장의 말씀을 응용하여 말한 것이다. 바울은 그와 같은 사실을 이렇게 증거 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1:20)

 

그러므로 진화론자나 창조론자의 변론은 하나님이 계시고 온 세상을 창조하신 사실을 증거 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이 필요 없으며 인간의 반대는 그 자신으로 멸망케 하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당신을 증거 해줄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셨다.

 

어느 한사람의 창세기 학자에게든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연구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고 학설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학자가 되었든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할 것 없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뿐이다.

 

믿음은 무식한 것이 아니다. 믿음이야말로 가장 유력한 지식이다. 하나님은 지식의 근본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은 비상식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인간세계의 일반적인 상식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상식적인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받지 못하고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고 우매한 머리(세상이 알아주는 유명한 석학이라 하여도 우리는 그를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JPS(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유대인출판공회)가 펴낸 창세기 주석에서 나훔 사르나는 창세기의 창조에 관한 말씀은 믿음의 기록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과학이나 인간의 연구나 주장과 학설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들이요, 거만한자들이라고 잠언 저자는 말한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1:22)

 

그들은 멸망하는 입술로 말하는 자들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10:14)

 

그들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웃들을 망하게 한다.

 

그러나 참된 지식은 구원을 얻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사특한 자는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1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들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식으로 교만해진 것들을 다 파하는 것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는 영적인 전쟁이며 그것은 반드시 승리하는 전쟁이다. 그것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강력한 것이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4-5)

 

이사야는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을 이렇게 고백한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40:12-14)

 

이 비밀은 믿음이 없는 자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40:21-23)

 

이사야는 눈을 높이 들어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들을 보라고 명한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40:26)

 

단지 우리 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것을 증거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어느 한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 엄연한 현실보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안께서 나를 지으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게 하시는 믿음을 주시도록 은혜를 구하는 것이 가장 화급(火急)한 일이다.

 

그래야 영생을 선물로 받는 은혜에 접근함으로 그 은혜를 믿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선지자들이 기록한 믿음의 기록은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없는 자들의 학문이나 연구나 학설과 주장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옛 시대의 학사, 에스라는 오늘날의 학자들과는 다른 것이 그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율법을 연구한 사람이었으며 자기가 준행한 말씀만을 벡성들에게 가르쳤다. 곧 자신이 순종한 믿음만을 가르쳤다는 말이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7:10)

 


창세기의 이름

 

히브리인들은 창세기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창세기를 시작하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태초에”(in the beginning)의 히브리어 단어인 베레쉬트를 창세기의 명칭으로 써 왔다. 그런가 하면 창세기 책의 이름은 영어로는 제네시스”(Genesis)인데 이 단어는 헬라어인 “geneseos”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헬라어 성경인 셒투전트 번역이 24절의 말씀인, 히브리어 토레다”(창조의 대략)를 번역하여 창세기 책의 제목으로 쓰고 있는 말이다. 그것은 51절에서 아담 자손의 계보로 해석이 되고 있으며 372절에는 같은 단어를 야곱의 족보라고 번역함으로 족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라는 이름을 제네시스(Genesis)라고 할 때의 말의 뜻을 대략이나 계보혹은 족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의 저자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이다.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등 성경의 앞에 나오는 다섯 권의 저자는 모세임을 히브리인들은 믿어 왔다.

 

창세기의 저자에 있어서도 마귀는 많은 혼란을 일으켜 왔다.

여기서는 그 모든 혼란스러운 이론을 소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혼적인 자극을 줄지는 몰라도 믿음을 주는 데에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믿음을 버리도록 충분히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위조지폐를 감식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위조지폐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하나만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 가짜는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많은 신학자들의 이론과 주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를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지식은 헛된 것이며 악한 것이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있던 믿음도 다 없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음의 진리의 확신이 결여된 상태에서 온갖 가짜들을 다 접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물론이고 믿음이 조금 있는 사람들도 다 마귀의 궤계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모세오경에 포함된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라는 증거는 성경에 가득하다.

 


창세기가 쓰여진 시기


창세기의 내용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요셉의 죽음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연도는 아담으로부터 2,328년으로 보고, 거기에 현재의 서기 2, 016년을 합하고, 1,446년의 구약시대를 합하고 애굽의 생활 400년을 합하고,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의 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학자들마다 나라마다 주장하는 것이 다르고 현저한 차이가 나는 것이나 성경에 근거하여 대강의 시기를 알아 본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

 

창세기는 성경의 시작이다.

 

나훔 사르나는 창세기를 가리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가장 근본적인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그 중심 사상이 모든 성경에 생기를 주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의 본질적인 가르침은 우주전체가 자연세계 밖에서 우주공간과 시간을 다스리시는 초월적으로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지식으로 목적을 가지고 지으신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비롯해서 이 천년동안 신학자들의 공통된 사실은 그들은 창세기를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를 창조한 것으로만 보고 있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창세기에 있어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통치 시스템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신 것이다. 에덴동산이 풍광이 아름다워서 에덴동산이 아니다. 아름다움 꽃이 있고 각종실과가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것들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다. 그것이 천지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 목적을 하나님은 창세기에 분명히 기록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6-31)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거의 한사람도 빠짐이 없이 창세기를 연구해 온 학자들은 창세기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약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생명하나님 나라교회이다.

 

 

생명

 

대부분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생명을 말할 때에 처음 창조된 아담이 죽지 않는(immortal) 생명을 받았는데 죄를 지음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mortal being)가 되었다는 말을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영적인 존재, 곧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받은 사실을 말 할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생명의 개념만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를 자연세계만을 창조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어리석음을 여지없이 나타낸다. 적어도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은 이생명의 개념이 분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 학자들이나 주후 2,000년 동안의 유대교나 신구교의 신학자들은 영생에 관한 개념이 희박하거나 거의 없다. 근 현대 신학의 외도가 이에서부터 말미암은 것이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래전부터 불신자들이 신학자가 되어 신학을 연구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셨음을 자주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듯이 예수님시대의 신학자들인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니고데모도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을 육신적으로 이해하였기에 그것을 두 번째 모태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으로 질문을 하여 주님으로부터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느냐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2:15-17)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여 즉시 영적인 생명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둘째 아담이신 예수는 온 세상의 죄인들에게 잃어버린 영생을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생명을 모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에덴동산도 천지창조도 물질세계로서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창조는 단지 자연세계를 만드신 것에 국한하여 사고하고 가르치는 폐단이 따르게 되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세계는 물론 신성이 가득한 피조물이며 인간을 포함해서 신묘막측하게 창조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만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아름다움의 극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다스리시고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는 질서를 창조하신 것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지으신 것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도구로 세워진 것이다. 창세기에서 실종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시대에는 극한 상황을 이루게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땅에 나라로 생각을 하며 다윗의 자손이 땅의 임금으로 오시는 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 결과로 예수를 잡아 죽이는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심판을 받는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도 지난 수세기동안에 수많은 종말론 학자들이 잘못된 종말론을 쏟아 냄으로 교회만 아니라 세상까지도 어지럽힘으로 원수마귀의 궤휼에 빠지게 된 것이 그 신학자들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나라의 개념이 없으며 하나님 나라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악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에덴동산,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낙원(paradise)은 꽃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각종실과가 있어서 아름다운 동산이라서 에덴동산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완전히 다스리시고 사람이 자연세계를 완전히 다스리는 영적인 질서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낙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구원을 받은 성도는 주님의 완전한 통치를 구하고 그렇게 살아감으로 아름다운 인격으로 무질서한 흑암의 인격들에게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아름다운 인격을 보여 주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빛으로 사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낙원의 생활을 다시 찾으려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 생명이 하나님이 다스릴 수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스릴 수 없는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생으로만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8:13)

 

그래서 우리에게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구주로 오신 주님의 처음 말씀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이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4:17)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아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인격이 되어 이 땅에서 지금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살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성경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한 달란트 받았던 종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없이는 창세기를 비롯하여 모든 성경, 66권이 심령에 들어 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심령 속에 없는 사람이 니고데모와 같이 머리로만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기이히 여기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교회

 

창세기에 교회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개혁신학자들 가운데 교회는 창세전에 계획된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조금 있다. 그러나 지나간 이십세기동안에 있었던 그렇게 많은 신학자들이나 주석가들 중에 창세기에서 교회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는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고 시작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가하면 어떤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시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는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이 상실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즉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교회의 복음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짓던 날에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상실한 아담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앰블란스와 같이 즉각적이었다. 그날이 가기 전에, 곧 서늘할 때는 해가 기울었을 때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와 그 죄의 결과를 알려 주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가죽옷을 해 입히심은 그들에게 어린양의 피로서 속죄함을 받는 제사를 가르쳐 주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찾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잃어버렸던 영생을 다시 찾아 주는 것이다.

교회는 다시 찾은 영생을 가지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유지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믿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믿음을 가르쳐주는 것이 교회이다.

 

그것을 정리하면

 

구원을 받는 믿음

하나님과 함께 사는 믿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아 영혼들을 살리는 믿음

 

이 개념은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사실 속에 잘 기록이 되어 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3:13-15)

 

부르심을 받은 믿음은 구원을 받는 믿음, 곧 영생을 얻는 믿음이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는 믿음은 주님과 함께 사는 믿음 곧 하나님 나라를 사는 믿음이요,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는 것은 헌신하고 희생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교회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담의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는 영적인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려울정도로 타락을 했을 때에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노와같이 다시 시작하는 것이 노아의 교회이다. 그리고 노아의 교회가 타락했을 때에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심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교회를 시작하신 것이 아브라함의 교회이다. 그리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축복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시작된 것이 이스라엘의 교회이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교회가 예수를 영접치 아니할 때에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다고 착각을 했던 당시의 신학자들인 이스라엘의 선생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오순절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자손인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신약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교회의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언약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세상의 구주이신 그리스도 곧 메시야의 언약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없거니 믿지 않는 것은 교회가 될 수가 없다.

 

아담의 교회에는 여자의 후손의 언약이 있다.

노아의 교회에는 무지개의 언약이 있다.

아브라함의 교회에는 할례의 언약을 주셨다.

이스라엘의 교회에 주신 언약은 율법이었다.

 

구약교회의 모든 언약은 아담에게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는 언약이었다. 그것은 각기 다른 언약이 아니라 인간들이 언약을 배반하고 타락할 때마다 그 언약을 새롭게(renewal)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오순절날 부어 주신 성령이다. 그것을 새 언약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새 언약의 중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인이 하나님께 내어 보냄을 받은 것은 그가 이 언약을 믿지 않고 아버지에게 약속하신 언약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절하고 아담의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이었다. 노아의 막내아들 함도 저주를 받아 노아의 교회에서 내어 쫓김을 받은 것도 은혜의 언약을 믿지 않고 율법주의자가 되어 아버지의 행실을 정죄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이 내어 쫓김을 당한 것도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할례를 받았으나 그 할례의 언약을 믿지 않고 손할례당의 시조가 되어 율법주의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교회에서 버림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이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세대가 다 가기 전에 심판을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르지 못하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와 같이 창세기는 이세가지의 시작이 다 들어 있는 귀한 책이 되는 것이다.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교회가 있는 것이 창세기이다.

아담의 죄로 죽은 생명과 그로 인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즉각적으로 회복시키신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가 창세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모르면 영생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육신의 생명의 개념만을 가지고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 어리석음과 무지몽매함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흑암가운데 있기 때문에 눈이 가리워져서 생명을 모르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육신적인 사두개인들과 같은 책망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모르면 하나님의 나라도 알지 못한다.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는 사람은 교회를 모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나에게는 구원을 받고 나니 거듭나기 전에 23년을 교회를 모른 채 교회를 다닌 것이 그야말로 큰 재앙이었다. 교회를 모르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재앙이라면 교회를 모르고 목회가 아닌 교회를 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재앙가운데 빠뜨리는 것이다. 교회를 모르고 신학을 하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15:14)

 

20년전 에 에베소서 사경회를 할 때에 어느 장로교 목사님이 교회도 모르고 십 칠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라고 부르짖던 일이 생각이 난다.

 

창세기에서 교회를 배반하는 일들과 우상이 시작되는 일이 있다. 그것이 소위 범신론의 시작이다. 율법주의도 창세기에서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훨씬 전에 율법주의가 나왔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이 교회를 등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율법주의에 빠지고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것이 당연히 여기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의 66권에 다 기록이 되어 있다.

 

하나님이 없는 육신들은 육신을 신뢰하기 때문에 율법주의에 빠지고 육신이 의지할 것이 없기에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오늘날의 수많은 종교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의 진리를 아는 믿음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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