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지난 천수백년동안 신학자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성령께 서 새롭게 조명해주셨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그만이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히실수 있으신 분입니다.

지난주간에 마친 안산연합집회에서는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 집회"라고 말할정도로 노아의 방주에 대한 전혀 새롭고도 깊은 영감을 물붇듯이 부어 주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일날 오전시간에 말씀을 전한 원고를 소개합니다.

간절히 구하오니 오직 주께서 어두운 우리들의 눈을 열어 주시사 하늘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 



방주의 은혜


본문 : 창 6:13-22


(창 6: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창 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창 6:15)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창 6:16)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창 6: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창 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 6: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창 6:20)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창 6:21)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창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1. 들어 가는 말


아담이후로 노아까지는 십대이다.

노아는 아담의 구대손이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여자의 후손의 언약을 받음으로 아담의 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는 아담의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의 대안(Alternation of The Kingdom of God)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죽은 생명들인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그 받은바 영생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고 동행하는 믿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같은 믿음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사귐을 살게 하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기능이다.


그와같은 하나님의 뜻대로 아담의 자손들은 여자의 후손의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가인은 믿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이 그를 아담의 교회에서 쫓아 냈으며 가인에게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하나님은 아담에게 셋을 주심으로 교회의 계보를 잇게 하신다. 그리고 그 이후의 족장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들이었는데 기록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을 했으며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 에녹의 아들이요 노아의 할아버지가 무드셀라고 므두셀라의 아들 곧 노아의 아버지가 라멕이다.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가정은 여자의 후손의 복음을 믿는 의인의 가정이었으며 그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사는 것을 본을 보이고 가르친 가정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만이 아니라 에녹의 아버지 야렛도, 야렛의 아버지 마할랄렐도, 마하랄렐의 아버지 게난도, 게난의 아버지 에노스도, 에노스의 아버지 셋도, 그리고 죽은 아벨과 그의 아버지 아담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살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무리가 없는 것은 에녹이나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음을 누구에게 듣고 누구로부터 전승을 받았으며 누구를 본받았는가를 생각하면 이는 자명한 일이다.


그러는 중에 사람의 딸들이라고 일컫는 가인의 후예의 딸들의 타락이 셋의 계보를 더럽히고 믿음과 상관이 없는 정욕적인 결혼을 하고 잘못된 가정을 꾸림으로 성적인 타락을 가져 왔다. 그리고 그와같이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이 보시고 패괴하다고 말씀하시는 강포와 폭행이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창 6:11)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창 6: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끝이 이르렀기 때문에 물로서 이 땅의 모든 생물을 포함한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심판을 하시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같은 사실을 그세대에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유일한 한사람인 의인 노아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도록 명하신다.


(창 6: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노아는 방주를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대로 순종함으로 방주를 예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짐승들을 암수 짝을 맞추어 방주에 들어가게 함으로 홍수심판으로부터 건짐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사람에게는 이 방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그 옛날 노아의 방주안에 있었던 사람들만 구원을 받은 것처럼 앞으로도 마지막 한번 남아 있는 심판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의인들만을 건져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땅에서의 생활은 방주안에 있는 노아의 생활과 유사한 점이 너무나 많이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노아의 방주속에 있는 영적인 비밀들을 길어 올림으로 은혜를 받아 우리도 방주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을 방주안의 노아와 같은 동일한 믿음으로 사는 은혜를 하나님아버지께 받고자한다.


특별히 한해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지난한해동안 우리가 하나님이 설계하신 노아의 방주에서 지냈는지 아니면 나름대로 자기가 스스로 만들은 배를 타고 살았는지를 살펴 봄으로 큰은혜를 받고자 한다.



2. 노아의 방주


우리는 방주를 쉽게 말하기를 “노아의 방주”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방주”이다. 또 다른 말로 말하자면 “구원의 방주”라고 할수 있다.


방주는 하나님이 설계하신 것이다.


방주는 온땅에 물이 창일하여 산과 봉우리들을 다 덮어 사람을 포함한 지면의 생물들을 다 죽이는 무서운 홍수가운데서 노아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노아와 그의 식구에게는 구원의 복음이었다.


그러나 방주는 배처럼 아름답고 멋있는 유선형이거나 쾨속정도 아니었다. 방주는 운항할수 있는 동력도 없으며 방향조차도 조정할수도 없는 배이었다. 그것은 단지 거대하고 투박한 상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 길이는 300규빗으로 135미터이었다.

넓이는 50규빗으로 22.5미터이었으며

높이는 30규빗으로 13.5미터이었다.



1) 유선형이 아닌 배


노아의 방주는 요즈음의 배들과 같이 유선형이 아니었다.

배의 앞도 뒤도 잘라진 단면으로 상자의 그것과 같은 모양이다.

바닥도 배모양의 바닥이 아니었다.

그냥 편편한 바닥이었다.

그것은 그냥 직육면체의 거대한 상자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 누가 배를 그런식으로 만든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만한 물건이었다.



2) 돛이나 노가 없는 배


요즘은 엔진이 동력이 되어 배가 운항을 하지만 옛날에는 배가 움직이는 힘은 노와 돛에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저어가는 배이든지 아니면 돛이 바람을 받아 풍력으로 가는 범선이든지 두가지 중의 하나이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는 배로서 노나 돛이나 이무것도 없는 그냥 떠다니는 동력이 없는 배이었다.



3) 키가 없는 배


배에는 방향을 바꾸는 키가 없어서는 안된다.

키가 없으면 원치 않는 곳으로 배가 흘러 가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면 생각지도 않은 위험을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는 키가 없는 배이었다.

당연히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성능이 전혀 없는 배이었다.



4) 닻이 없는 배


닻은 자동차로 말하면 브레이크와 같다.

원할 때에 설수 있고 원할 때에 갈수 있는 것이 닻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닻이 없으면 배가 표류할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배는 운항을 멈추고 정박하고 싶을 때에 정박을 할수 있는 닻이 있어야한다.

폭풍우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킬수 있는 것이 닻이 하는 역할이다.

사람이나 배나 오랜 항해에 피곤함을 풀기 위해서 닻을 내리고 정박을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배에는 닻이 없는 그야말로 이상한 배이다.



5) 선장이 없는 배


노아는 배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배를 만들었으나 그것을 부릴 수 있는 경험도 없고 기술도 없는 사람이다.

노아의 방주는 선장이나 항해사도 없고 승무원도 없다.

또 선장도 필요 없고 항해사도 필요 없는 것은 동력도 없고 키도 없고 닻도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할수 있는 사람은 이세상에 단한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에는 승객들만 있는 것이다.

노아는 다른 동물들과 같이 승객으로 이방주에 올라 탄 것이다.



3. 방주안에 있었던 노아


노아와 짐승들은 일년 십칠동안을 방주안에서 살았다.

노아가 그의 가족들과 생물들이 방주에 들어간지 칠일만에 홍수가 났다.


(창 7:10)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창 7:11)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홍수가 난것이 이월 십칠일이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날은 이월 십일이다.

그리고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날은 그이듬해인 노아가 육백일세되던 해의 이월 이십칠일이었다.


(창 8:13) 육백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창 8:14) 이월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창 8: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창 8: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창 8:17) 너와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창 8: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창 8:19)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그래서 노아가 방주에서 지낸 날수가 일년하고도 십칠일이 된다.

그는 방주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았다.

무서운 폭우소리와 배에 물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일년 십칠일을 그안에서 살았다.

돛도 없고 키도 없는 상자곽안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주의 선하심만을 믿고 살은 것이 노아의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일곱식구와 생물들이 먹을 양식을 배에 실으라고 하셨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먹을것과 마실것이 부족함이 없었다.


(창 6:21)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창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그는 산소의 양 때문에 호롱불조차도 킬 수 없는 어둡고 냄새나는 상자곽안에서 일년여를 짐승들과 함께 생활을 한 것이다. 삼층으로 만들고 칸을 막았지만 또 오물을 처리하는 방이 따로 있어서 그렇게 모든 짐승들이 질서를 따라서 살았다 하더라도 냄새를 막을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게나 짐승들에게나 그와같은 상태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견뎌낼수 있는 환경이었다.



4. 방주되신 예수


이사야는 메시야이신 예수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을 했다.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에게는 노아의 방주보다도 더 세상에서 초라해 보이고 볼품이 없어 보이는 한분이 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사야는 그의 모습을 그렇게 영감을 받아서 표현한것이다. 그와같이 주님은 아름다운 모습도 없이 그냥 노아의 상자곽 같은 투박한 모습이셨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죄인들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도 믿기도 어려운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가 왜 그런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는가?


그의 모습과 같은 초라하고 더럽고 추하고 보잘것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인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를 죄인취급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한 것이다.



1) 갈릴리 사람


그는 유대사람들이 다 싫어하고 천히 여기는 갈릴리 사람이었다.

나중에 그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도 예수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여지없이 말한 적이 있다.


(요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나사렛은 갈릴리에 속한 성읍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이렇게 말했다.


(요 7: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요 7: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그리고 주의 제자 베드로는 이런말도 들었다.


(마 26:69)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그렇게 주님은 갈릴리 사람이라고 천대를 받았다.



2) 배우지 못함


주님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천대했다.


(요 7: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요 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3) 촌스러운 사람


주님은 예루살렘의 사람들에게는 시골사람이었다.

시골사람만이 아니라 그들이 쓰는 용어인 히브리어보다는 투박하고 천스러운 아람어를 많이 쓰셨다.



4) 머리둘 곳도 없으심


주님은 머리둘곳도 없으셨다.

곧 집도 없었다.


(눅 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가버나움의 집도 셋집이었다.

주님은 재산도 돈도 없으신분이었다.



5) 굶기도 하심


그는 제자들과 함께 여러날을 굶기도 하셨다.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막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6) 죄인들의 친구


주님은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셨다.

세리 마마태의 집에서 잡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비방했다.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고 실족하여 넘어진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멋있고 위풍당당한 메시야를 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인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다.

그 예수를 믿지 못한 사람들은 노아의 시대에 물에 멸망한 자들과 같이 다 멸망을 당했다.

앞으로도 예수가 그인줄을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다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된다.


그와 같은 사실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5. 예수안에 있는 성도


예수안에 있는 성도는 방주안에 있던 노아와 같은 것이다.


예수안에는 돛도 없고 노도 없으며 키도 없고 닻도 없다.

그리스도가 돛이고 노이며 키이며 닻이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믿는 이들은 방주안에 있던 노아와 같은 전폭적인 믿음으로 사는 생활을 산다.

믿음도 같고 생각도 같으며 말도 생활도 노아와 같은 것이 예수를 믿는 성도의 생활이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방주에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절대로 뒤집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수메르전설 길가메쉬(Gilgamesh)에 나오는 바벨론의 노아는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이다. 거기 나오는 방주는 일면의 길이가 120규빗인 정육면체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면의 길이가 54미터인 주사위모양의 상자이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엎어졌다 뒤집어졌다는 반복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는 공학적으로도 증명이 된 것은 절대로 뒤집어지지 않는 가장 안정적인 설계로 된 것이다.


예수안에 있는 성도는 세상에서 뒤집히지 않고 가라앉지 않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러나 예수밖에서 사는 생활은 믿는자나 안믿는자나 바벨론의 우트나파쉬팀의 방주와 같이 요동하며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생활을 살게 되는 것이다.


배가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뒤집어지면 침몰한다.

뒤집어지지 않는 배는 절대로 침몰하는 법이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흔들려도 절대로 뒤집어 지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뒤집어지지 않는 생명을 받았다.


(요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세상의 유혹과 영향을 받아도 전복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가기 때문이다.


(시 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시 37: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뒤집어 지는 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멎저 그의 나라와 그의의를 구하지 않고 먼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것을 구하는 것이 뒤집어지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는 두주인을 섬기는 사람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할지라도 흔들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절대로 세상에 가라앉지 않는다.

세상에 빠져서 살수 없는 생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에는 올릴 돛도 없고 저을 노도 없다.

노아의 방주에는 키도 없다.

노아의 방주에는 닻도 없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이 운항하시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의 선장은 하나님이시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노아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음으로 노아의 방주에서 안식하는 생활을 살았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주권이 없다.


오직 주권은 주님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우리의 날마다의 생활에 선장이 되셔서 나를 항해해 가시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안에 들어간 성도는 노아와같이 모든 일을 쉬는 생활을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히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6. 맺는 말


우리는 지나간 일년동안을 어떻게 살았는가?

노아와 같이 전폭적인 믿음으로 살았는가?

하나님이 끌어 가시는 내인생을 내가 방향을 바꾸어 보려고 아무 쓸데 없는 노력과 부질없는 걱정과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없는 근심으로 보내지는 않았는가?


그리스도이신 방주에 들어 왔으면서도 착각하여 내가 노를 저으려고 하고 내가 내인생을 또는 가정이나 교회를 내힘으로 스스로 조정하려고 하고 방향을 틀어 보려고 하는 의미없는 노력을 하고 애를 쓰면서 살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혼잡된 생활을 살면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성령을 소멸시키는 어리석은 생활을 살지는 않았는가?


그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고 그는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하고 살았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렇게 우리도 바울과 같이 천국문에 들어갈 때까지 전적인 믿음으로 인생길을 항해해가는 주님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62.188.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