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와 죽어서 행복해지려는 사람들

 

얼마전에 택시를 콜해서 탔다. 교회앞에서 불러서 탔기 때문에 친절한 택시기사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설교를 틀어 주었다. 그설교의 내용을 들으면서 참으로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성도 여러분 힘들더라도 어렵더라도 조금만 참읍시다. 그러면 눈물도 없고 이별도 없고 슬픔도 없는 하늘나라에 가서 살게 되는 날이 곧 오게 됩니다.” 아마도 교회 예배를 녹음방송을 하고 있는듯한 설교인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어려운 현실을 잔뜩 이야기해 놓고는 어느듯 그렇게 설교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설교는 잘못된 설교가 아니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도 그와같은 설교를 듣고 자랐으며 어른들의 대화가운데에도 그와같은 내용이 있었으며 우리들도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도를 하고 외침전도를 하는 내용에도 “예수믿고 천당갑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설교를 들으면서 “아 이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죽어서 행복해지려는 믿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와같은 말을 불신자들이 들으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생각을 하게 될까하는 깨달음이 왔다. 현실과는 괴리된 믿음, 현실로부터 도망을 가려는 믿음,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후에 이상향을 구하는 믿음은 이방종교와 한치도 다를바가 없는 기독교가 아닌 일반의 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소름까지 끼칠정도로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죽음후에 내세의 소망만 있지 지금 소망을 가질수 없는 절름발이 신앙이요 현실성이 없는 신앙인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그런 예수가 아니다. 내세의 소망도 죽음후에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사는 부활신앙도 있지만 지금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고 그부활의 생명과 능력으로 사는 것이 복음인 것이다. 죽어서야 행복해지는 믿음만을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들은 복음은 그와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고 살고 체험한 것도 그와같은 믿음은 아니었다. 그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꾸로 듣고 생각을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죽어서 천당을 가기 전에 지금 회개하면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나에게 찾아오고 나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신 것은 다 현재시제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 한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또 하나님나라의 비밀은 주를 따르는 제자가 아니면 다 비유로 말하고 그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알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만 따로 비밀을 풀어 주셨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막 4:11,12)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신앙의 전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고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예수를 믿고 죄사함을 받아 죄로인하여 떠나갔던 하나님의 성령이 다시 회복됨으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통치를 받음으로 무질서한 인격이 거룩함의 질서가 잡히는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죄를 짓던 인격이 죄를 이기는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자아를 이기지 못하던 생활이 이제는 자아를 이기는 생활로 바뀌는 것이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거룩함으로 회복이 되고 그거룩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면서 그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현실이 하나님나라를 사는 현실인 것이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서는 전적으로 영적인 현실가운데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지만 지금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적이고 육적인 환경가운데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그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으면서 말한마디도 행동 하나 하나가 그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될 때에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살음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선물로 받은 영생이 얼마나 귀하며 저들과는 생명이 다르고 생활이 다르고 인격이 다른 것을 보여 줌으로 그들로 예수를 믿고 싶고 세상을 이기고 싶은 마음을 줌으로 그들도 이악한 세대에서 저주로부터 건짐을 받고 구원을 받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하는 인격과 생활을 하나님이 다스려주시는 하나님나라의 생활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복음전도인 것이며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세상 현실을 이기는 이세상 현실 위에 있는 복음인 것이다. 세상종교들과 같이 인생이 당하는 어려움과 슬픔을 피해가면서 죽음이라는 결국을 향해서 소망이 없이 가는 그런 나약한 복음이 아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죄와 저주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는 것도 저주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모든 질병과 날마다 일어나는 온갖 사건과 불행한 사고들 그와같은 것들을 피해가면 다행이고 그것을 자기들의 믿음의 결과요 그것을 인간의 행복으로 여긴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는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믿음 곧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잃었던 생명을 찾고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그영생을 가지고 하나님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거수 일투족 말한마디 한마디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으면서 일상생활의 죄를 하나씩 하나씩 이기면서 사는 것이다.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만을 바라는 현세와는 달리 좋은 환경을 가진 곳에 현실을 피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실속에서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삶으로 날마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주님을 지속적으로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성경책을 끼고 교회만 다니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성경책속에 있는 말씀으로 인격과 생활의 변화가 있어하고 자아에게 지면서 살던 생활이 이제는 자아를 이기는 삶으로의 전환점이 분명해야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인 것이다.

 

물에 떠야 배지 가라앉는 것은 배가 아니다.

 

말씀으로 내안의 자아와 죄성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세상과 우리를 날마다 시간마다 유혹하여 죄를 짓게하는 마귀를 이기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이 필요하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에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말씀으로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삶이 필요하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이와같이 말씀으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생활이 없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만일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말씀으로 날마다 나를 복종시키고 말씀에 굴복시키는 생활을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세상사람들과 다른 생명인 영생이 있는지를 의심해보고 내가 믿음에 있는가를 시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이세상에는 가짜가 많은 중에 교회안에서 조차도 가짜가 되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가짜로 증명되는 것은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가장 슬픈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1260일의 양육이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햇수로 삼년 반 달수로는 사십이개월 날수로는 1260일을 주님을 따름으로 그 결과로서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이 자신의 가지로서 곧 자신의 영적인 거룩한 분신으로서의 제자들을 인정하시는 말씀을 주님께로부터 직접 듣는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친구라고 말씀을 하신다. 지금까지 주님을 따를때에는 종과같은 제자였으나 이제는 친구같은 제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지 곧 줄기이신 주님의 분신으로서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명하신다. 이와같이 주님의 분신이 되는데에 주님의 친구가 되는데에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는데에 1260일이 걸린 것이다. 가용한 열매를 맺는데에 걸린 시간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맺을수 있는 제자들이 된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12장에 보면 여자가 아들을 낳는데 그는 장차 철장권세로 만국을 다스릴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여자가 용의 낯을 피하여 광야로 가서 1260일의 양육을 받았을 때에 양육을 받은 하늘에 거하는 자들 곧 영적인 사람들이 되어 마귀와 싸워 이기고 그들을 하늘에서 쫓아내는 역사가 일어난다. 여자는 교회이다. 교회가 곧 주님의 제자들이 양육을 받고 오순절날 성령을 받고 나서는 교회는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것은 교회가 죽기까지 싸워 세상마귀를 이긴 것이다. 사도행전의 어떤 사건이든 영적으로보면 다 이기고 승리한 것이다.

 

이와같이 마귀를 대적하고 그를 상대로 싸워 이기는 영적인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를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길리우심을 받는 것이 교회생활이다. 아브라함도 영적인 사람으로 길리우심을 받고 하나님이 직접 그를 양육하셨다. 이삭도 야곱도 양육을 받았다. 요셉도 애굽의 감옥에서 믿음으로 길리움을 받았으며 모세도 미디안광야에서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양육을 받았다. 다윗도 사무엘도 다니엘도 에스라 느헤미야 성경의 모든 영적인 사람들은 다 주님께로부터 영적인 양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기에 일상생활에서 하나님나라의 승리를 맛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은 것이다. 사도바울도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광야로가서 삼년동안 말씀만을 보면서 자기가 오해하고 있었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을 다 씻어 내는 일을 한다. 그리고 다소에서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고 자기의 허물과 약점을 잘아는 동네사람들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음으로 그들로부터 “사울이 변화되었다”는 증거를 얻은 후에 그는 바나바와 함게 안디옥에 가서 주님이 크신 역사를 보고 경험하게 된다.

 

세상 불신자들이 볼 때에 변화된 증거를 얻지 못한 빈약한자들은 하나님이 쓰실수도 없고 마귀를 이기지도 못하고 죄를 이기지도 못하는 조잡한 종교생활을 하는 종교인에 자나지 않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사람들은 같이 사는 식구들에게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주의 제자로서 증거를 받지 못한다. 자녀들에게도 내가 믿은 예수 때문에 존경을 받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사는 사람인데 그와같은 존경을 받지 못하는 주의 제자가 아닌 교인들이 교회안에는 너무나 많이 있다. 직장에서도 내가 빋은 예수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달리보고 나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예수를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 천국의 제자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처음부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세상사람들이 나의 행실을 보고 나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볼수 있는 행실을 살고 있는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을 시험하고 확증하여 버리운자로 발견되지 않도록 힘쓰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버림을 받는 것은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주님에게 버림을 받는 것은 더 아픈 일이 아닐수가 없다. 육신적으로도 모자란 것은 아픔이지만 영적으로 모자란 것은 얼마나 그아픔이 클것인가? 지금 믿음안에 있는가? 주님의 가지요 분신으로서 주님께로부터 인정하심을 받았는가? 바울과 같이 아라비아의 생활이 있었는가? 여호수아와 같이 모세가 집으로 돌아간후에 회막에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이 친구처럼 대해주시는 은혜를 자기에게도 부어 달라고 부르짖고 기도했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친구로서 인정함을 받았는가? 1260일의 양육을 주님께로부터 받았는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있었는가?

 

세상을 탓하지 말고 이제는 자기자신의 부족한 믿음을 탓하라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고만 하지 말고 이제는 믿음을 배울 때이다. 겸손히 믿음을 배울 때이다. 아브라함이 배운 것을 배우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겠는가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뻔뻔한 짓이다. 요셉이 감옥속에서도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굴복시키겠는가? 요셉은 자기를 불행하게한 나라의 모든 권력을 나이 삼십살에 다 송두리째 인수하게 하시는 은혜를 받는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십년을 하나님을 배웠을 때에 세계에서 그당시 가장 큰나라의 왕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고 통곡을 하게하는 그야말로 멋있는 사람이 된다. 여호수아는 낮에 모세를 따라다니며 시키는 일을 하고 수종을 다 들고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막에서 잠도 자지 않고 모세가 받은 은혜와 동일한 은혜 곧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믿음을 달라고 간구하기를 사십년이 지나서야 불쌍히 여기심을 받고 이스라엘을 가나안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다.

이와같이 예사람들과 같이 동일한 믿음을 받아야 세상을 이길수 있다. 그래야 힘들게 사는 것들이 형통하고 평탄해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앞서말한 죽어서 행복해지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나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중에 어느 누구도 그와같은 삶을 바라는 이는 한사람도 없다. 지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이 하나님나라의 생활이요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이요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권능이다.

 

 

(*.8.21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