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변화되지 않는 이유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영적인 변화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다 주님의 제자들과 같이 되고 싶고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싶고 이사과 야곱과 같이 승승장구하는 믿음으로 살고 싶어하고 모세와 같이 여호수아와 같은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교회안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믿음으로 살기를 사모하고 바라지만 그렇게 살지를 못한다. 그이유는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영적인 욕구불만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영적인 욕구불만을 가지는 것이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교회안에 이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해할수 없는 말은 아니지만 체험이 안되고 생활이 안되는 말씀이 성경안에 많은 중에 이말씀도 그렇게 썩 와 닿지 않는 말씀이다.

이말씀은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을 주께로부터 받는 것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것은 영적인 욕구불만을 가지는 것이다. 영적인 욕구불만을 가지고 가난한 심령만 되면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의 다스려주심과 도우심을 받고 사는 하나님나라를 경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말씀을 체험하기가 어렵고 가난한 심령이 잘 안되는 것은 이유가 다른데에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자기중심적인 죄인들은 욕구불만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도 자기중심의 인격과 생활이 하나님중심으로 변화디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타인에 대한 욕구불만으로 가득한 삶을 살기 때문에 변화를 받을수가 없다는 말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앞에 비추어지고 보여지는 나의 행실을 미워해야하는데 다른 사람의 행실을 미워한다.

죄인의 속성을 가지고 살았던 옛사람인 나를 미워해야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행실이 거스리고 그들의 말과 그들의 생활과 그들의 인격이 거슬리는 삶을 사는한 자신에게 가난한 심령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은 남에게 대하여 가난한 심령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욕구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자기문제를 가지고 절박함으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이와같이 자기자신의 영적상태와 자신의 믿음이 부족함에 대한 가난한 심령이 아니라 남에 대한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사람은 끊임 없이 불평하고 원망을 한다.

다른 사람의 행실을 트집을 잡고 환경을 탓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이 힘든 것이 다른 사람때문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변사람들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삶을 살고 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불평과 원망을 했던것도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모세가 자기들을 인도한다고 생각을 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를 대적하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과 원망을 한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신을 향한욕구불만을 가질겨를이 없었던 것은 모든 원인을 모세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말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내었기 때문이다.

 

요셉의 형들도 자기들이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요셉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고 요셉을 향하여 언사가 불평했다고 한다.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창 37:4)

 

믿음이 적은 자기들을 향하여 욕구불만을 가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성을 미워하고 자기들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였으면 그래서 가난한 심령이 되었으면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 되었을 터인데 그들은 요셉을 미워하였고 요셉을 향하여 불평과 원망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만 제거하면 자신들이 나아질 줄로 착각을 하여 아버지의 마음에 평생에 못을 박는 아픔을 가져오는 일을 벌이고 만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인하여 머리를 풀고 통곡하며 요셉을 따라 음부로 내려가겠다고 난리를 피웠을 때에 그들은 요셉이 당한 아픔이나 아버지 야곱이 당한 아픔보다도 더 천배만배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돌이킬수 없는 무서운 결과를 바라보고만 있는 자신들의 악함과 무능함을 평생을 아파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나를 미워하고 나의 무능함과 한계를 아파하는 것이 곧 타인에 대한 욕구불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욕구불만을 가지는 것이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영적인 욕구불만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엎드리어 자신에 대한 아픔을 아뢸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고쳐주실 때에 변화된 인격과 생활을 사는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나라를 사는 형통하고 평탄한 삶을 사는 것이다.

 

형들과는 달리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칫 교만해지고 부요하고 살찐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심령으로 살지 못하였을 터인데 하나님이 그형들의 손을 빌어 그를 애굽에 팔음으로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은 도저히 현실에 만족할수 없는 환경속에 자신을 집어 넣으신 하나님의 뜻대로 가난한 심령으로 살았다. 거기에서도 보디발의 총애를 받으면서 혹시 내가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으면 그가 나를 풀어 자유하게 하면 아버지 집으로 가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 요셉을 하나님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현실에 만족할수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가난한 심령으로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구하는 믿음으로 길러 주시기 위해 그를 애굽의 감옥으로 보내신다. 거기는 전옥이 사랑하고 인정을 해도 결코 만족할수 없는 감옥이었다. 자신에 대한 무능함과 자신의 한계에 대한 욕구불만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난한 심령을 가지게 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은혜를 베풀은 술관원장에 대한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까지도 그가 요셉의 생각을 잊어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제해버리셨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구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렇게 이년이 지나서야 하나님이 바로에게 신하들에게 술관원장에게 그리고 애굽 온나라에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리고 애굽에 팔려간지 13년만에 요셉은 자기를 불행하게한 나라의 전권을 통째로 바로의 손에서 인수를 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멋있는 분이시다. 요셉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애굽 온땅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까지도 흉년에서 건짐을 받는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위해 요셉에게 그의 나라를 주시기 위해 그를 애굽의 감옥까지 가게하시면서 요셉으로 가난한 심령을 가지게 하신 것이다. 그가 자기를 애굽에 팔았던 형들을 만나서 형들을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고 그와같은 일이 다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고백하는 그의 믿음이 가난한 심령의 고백이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창 45:4-10)

 

이와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일먼저 주시는 복이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이다. 심령이 가난해야 하나님나라를 소유할수 있기 때문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육신적으로 잘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 내시어 수십년동안 순례자의 길을 기게하며 믿음을 배우게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난한 심령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갈대아 우르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가난한 심령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삭에게 흉년이 들게 하여 먹을 것이 없어 애굽으로 가려고 하는 번민하는 마음과 아비멜렉에게 구박을 받고 쫓겨난 일과 우물을 파는대로 사람들에게 빼앗긴 사실들이 다 이삭으로 하여금 가난한 심령을 가지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야곱으로 하여금 아비집을 떠나 벧엘광야에서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한 것도 하나님이시며 그를 밧단아람에서 자기를 사랑해줄수 없는 삼촌의 식구들사이에서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구하게 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스라엘을 사백삼십년동안 애굽의 종을 삼ㅇ신 것도 마침내 그들의 심령을 가난하게 함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으며 사람이 살수 없는 광야에서 사십년을 살게 한 것도 가난한 심령으로 준비될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고 오래 참으신 것이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도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한 것도 하나님이 그에게 가난한 심령을 부어주시기 위함이었다. 히스기야에게 병이들어 중년에 죽음앞에 서게 한것도 교만한 히스기야에게 가난한 심령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유다를 패망시키고 바벨론으로 유배를 당하게 하여 70년동안 종노릇하게 한 것도 그들로 하여금 교만하고 완악한 심령을 버리고 연하고 부드러운 살과 같이 가난한 심령을 다시 찾아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들은 다 한가지로 자신에 대하여 영적인 욕구불만을 가지고 가난한 심령으로 돌아가서 하나님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도 하나님은 동일하신 역사를 행하시고 계신다. 당신에게 주어진 사람들과 환경과 일들을 통해 주님은 당신이 가난한 심령의 복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행여 주님의 뜻을 모르고 무지함으로 사람들을 원망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건들과 일들과 환경을 불평하면서 주님이 주신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복된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자리에 들어가서는 아니될 것이다. 가롯유다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다른 제자들과 같이 삼년반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도 그는 가난한 심령이 되는 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소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선생님을 은삼십에 파는 자리에 들어갔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헤롯이나 빌라도는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버림받은 길로 가고 말았다.

 

가난한 심령의 복을 받는 것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다. 우리 모두 날마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을 주시는 주님앞에 이복을 받음으로 하나님나라를 소유하는 그의 친백성이요 그의 자녀들이 되자.

(*.8.21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