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의 필수과목

 

어느 신도시에 있는 성결교회에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해서 간적이 있었다. 주일오후에 말씀을전했는데 교인들은 한 십여명 정도 있었고 여러해전에 그교회는 제자훈련으로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키면서 그신도시의 교인들을 따 빨아 들일듯한 기세로 교인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목회자가 목회를 포기할 마음만을 가진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교인들이 모여들때는 지식적인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그들에게 지식이 들어가자 곧 교만해져서 자기들끼리 여러차례 싸우고 교인들이 왕창왕창 바져나간 결과가 이제는 십여명의 교인들만 남아서 힘이 다빠져 버리고 그만두지 못해서 목회를 하면서 언제 포기를 하는가만을 계산을 하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교회 교육전도사가 평신도때에 훈련을 받고 은혜를 받았는데 이교회에 부임을 한후에 완전한 좌절에 빠져 있는 목사님을 소생시키기 위해서 나를 불렀다는 것이었다. 말씀을 전하고 은혜들을 받은후에 그목사님에게 다음주에 있는 전도훈련에 참석을 권유했으나 그는 제자훈련프로그램으로 꽉 짜여 있는 일정에 교회를 비우기가 어렵다는 말만을 되풀이 하였다. 목회자가 먼저 변화를 받아야한다는 말에는 동의를 하면서 혈루증에 걸린 제자훈련프로그램만 붙잡고 있는 그목사가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 왔는데 그후로도 안타까움에 그교회생각이 종종 나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교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제자훈련이라는 멋들어진 말과 프로그램에 속아서 교인들을 따로 모아서 그들에게 성경공부를 하게 하고 성경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으로 짝퉁제자훈련을 해온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언젠가는 부산에서 집회를 할 때에 그도시에 제자훈련으로 교인들이 많아졌다는 어느교회의 교인들 열세명이 집단으로 상담을 신청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자조섞인 말들이 터져 나왔다.

“저 사람은 제자훈련을 다 받았는데 생활의 변화는커녕 아직 술담배도 못 끊고 있습니다.”

“저사람은 제자훈련을 열심히 받고 있는데 죄가 끊어지지를 않습니다.”

“너무나 목이 마릅니다.”

“교회에서 숨이 막힐정도로 프로그램으로 부여 잡고 다른데에 못하게 합니다. 가면 혼납니다. 눈에 나면 교회안에서 사람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제자훈련을 받고 있고 제자훈련을 다 받은 사람들도 여럿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한낱 영혼의 갈증으로 목말라 애타는 심령들이었다. 그런사람들이 제자가 될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런사람들이 그렇게 지식으로만 성경을 배워서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하여도 그것은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제자훈련은 주님의 일군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들의 영혼의 목마름조차도 해소가 되지 않는 가짜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가짜 제자훈련은 결국 교회를 하는 사람들이 다른 교회와의 차별화를 통해 기성교인들을 빼앗아 감으로 교회를 크게하는 성장욕구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진실한 제자를 만들어 내는 제자훈련이 아닌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며 주님이 하신 일을 천하게 하는 것이요 주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 것이다.

 

그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내가 쓴책을 사서 읽으면서 마태복음에 큰 은혜를 받고나서 제자의 조건을 읽다가 화를 내면서 책을 덮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가 화를 매면서 한 말이 “왜 제자훈련을 까느냐?”고 했다고 한다. 이는 가히 제자훈련을 신봉하는 수준의 반응이 아닐수가 없다. 그는 아마도 주님보다도 제자훈련을 더 중시하고 제자훈련프로그램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였으리라 짐작이 된다. 만일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면 자기가 하는 제자훈련과 주님이 제자들을 가르친 제자훈련이 같지 않은 것을 시인하고 아파하며 무슨 차이가 있는지 심각하게 알아보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개혁하려고 하였을 것이지만 주님의 제자훈련은 손상이 되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기가 하는 제자훈련이 공격받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폐일언하고 진짜는 진짜고 가짜는 가짜다.

중간은 없는 것이다.

주님의 말로 다형언할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받은 우리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면 안된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지식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주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순종해서 주님을 따랐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삼년반동안을 숙식하시면서 인격과 생활을 나누셨다. 이것이 일천 이백육십일의 비밀이다. 일천 이백육십일 동안을 주님은 제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셨다. 주님은 말씀이신 주님, 주님이신 말씀으로서 제자들과 힘께 거하시고 사시면서 말씀대로 사는 인격인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따르게 하시고 본받고 닮게 하셨다. 그와같은 과정을 우리는 주님의 제자훈련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제자들을 삼년반동안 그들과 함께 사시면서 주님같은 제자들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는 주님안에 거하라고 명하신다. 처음 주님을 따라 나설때와는 다르게 저들은 주님안에 항상 거할수 있는 주님과 영적으로 같은 체질의 사람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1,2)

 

제자들을 자신의 친구로 만드셨으며 열매를 맺는 주님안에 거하는 가지로 제자들을 길러 내셨다.

 

가짜 제자훈련의 치명적인 결함이 무엇인가?

주님을 닮은 제자로 길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항상 주안에 거하는 생활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가 풍성하고 항상 열매를 맺는 제자가 될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런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가?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자 곧 산상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으나 주님은 그들을 보시기만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 나아온자들은 제자들이었다 주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제자들 곧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산상수훈을 말씀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 5:1,2)

 

그리고 제일 먼저 하신 팔복의 말씀 곧 여덟가지 복은 주님이 이제 막 자신을 따르기 시작한 제자들에게 소개한 제자훈련의 필수과목이었다.

 

세상학교에서도 필수과목을 단 하나라도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을 할 수가 없고 학교를 다니지 않은 것처럼 되며 가짜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학교에서도 단한과목이라도 빠뜨리면 가짜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필수과목을 하나씩 살펴 봄으로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주님의 눈으로 살펴 보기로 하자.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여기서 우리말 성경은 번역이 불분명하여 많은이들이 함정에 빠지고 있다. 그것은 번역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사람들의 율법주의적인 성향 곧 행위를 우선으로 하는 행위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천주교와 같이 믿음을 육신의 더목으로보는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해지면 복을 받는줄로 착각을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여덟가지 복은 복이다. 북은 우리가 노력하고 애를 써서 생산(produce)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복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기도 한다. 적지 않은 주석가들이나 설교자들이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야 복을 받는 것처럼 말하고 쓴 경우가 허다한 것은 다 율법주의로 말미암은 행위주의에 걸려서 넘어진 것이다.

 

심령이 가난해지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을 주님께로부터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의 생활을 살수 있다는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영적으로 비참해진 사람이다.” 육신적으로 비참하지 않아도 영적으로 비참해지는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많은 경우에 육신적인 비참함이 우리의 심령으로 가난하게 한다. 전자는 말씀으로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는 경우요 후자는 말씀으로 안될 때에 하나님이 육신적인 시험과 환란을 당하게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얼마나 미약하고 미천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체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두가지를 병행해서 사용하신다. 고난이 없으면 말씀을깨닫지 못하고 고난을 받아도 말씀을 알지 못하면 그고난은 의미없는 고생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의 후계자로서 학문에 능통하고 말과 일에 능한 사람이었며 그가 하나님나라를 위해 열심히 득심이어서 자기의 장래를 퓨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종의 자리로 내려와서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출애굽을 하기로 하였으나 그뜻도 의지도 재능도 그의 희생도 하나님은 무시하셨다. 그리고 그로하여금 사람을 죽이게 함으로 살인자가 되어 도망하는 비참함가운데 빠뜨리시고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년동안 모세를 말씀으로 양육했을 때에 모세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신 것도 자기 육신이 익숙한 본토를 떠나 아비집을 떠나고 친척을 떠나 홀로되게 하시고 알지 모하는땅을 헤메고 다니면서 하나님없이는 살수 없게 훈련하신 것이 심령이 가난한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삭이 아버지가 죽고 흉년이 들어 어려움을 당하게 하신 것도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시는 심령을 가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다. 야곱을 벧엘광야로 좇겨나게 하신 것도 밧단아람에서 삼촌의 종이 되어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하신 것도 야곱의 심령을 가난하게 하시는 복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요셉을 아비의 육정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평안한 집을 떠나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애굽의 감옥까지 가는 비참한 상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요셉으로 하여금 간나한 심령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마침내 복을 받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수없이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이와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비참함가운데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말씀을 구하는 가난한 심령이 되는 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고난만 받은 것이 아니라 고난가운데서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구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고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복은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이신 하나님을 향한 갈증과 목마름을 가지는 복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1,2)

 

말씀이신 하나님 하나님이신 말씀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함께 하셔서 그와함께 동거하고 동행하시면서 살아주시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소유하고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이다.

 

나는 1974년에 예수를 믿고 거듭났을 때에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을 주님이 주셨다. 나에게는 여덟살 때에 세상을 떠나신 육신의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아버지가 없는 아픔으로 열다섯살 때까지 시간만 나면 울었다. 그런데 그육신의 아버지 죽어서 세상을 떠나고 나에게 도움이 될수 없었던 아버지와는 비교도 할수 없는 하나님아버지가 생겼다. 그런데 이아버지를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이 하나님아버지네 대하여 절대로 무식한 것이 나의 상태였음을 알게하셨다. 이것이 은혜요 축복이었다. 그래서 그아버지가 알고싶어서 하루에 열몇시간씩을 성경을 읽으면서 아버지가 깨달아지고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속에 깨달아져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편지를 읽을 때보다 더 서럽게 울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 하나님이 가난한 심령을 나에게 주신 것이었다. 이것은 일방적인 축복이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두 번째 필수과목은 애통하는 복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팔복은 다 순서적으로 임한다. 앞뒤 없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복을 받은자에게만 애통하는 복을 주시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과 애통하는 복을 받은자만이 온유한 사람이 되는 복을 받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이 되는 복을 받은 사람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을 받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을 받은 사람은 그와같은 복을 아직도 받지 못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긍휼히 여기는 복을 받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복을 받은 사람은 마음이 청결함으로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얼굴을 뵈옵는 삶을 사는 복을 받는 것이요 그와같이 마음이 청결함으로 하나님을 뵈옵고 사는 복을 받은 사람은 화평케하는 복을 받아서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수행하는 복을 받고 그렇게 전도하는 복을 받은 사람은 핍박을 받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여덟과목의 필수과목은 마치 학교에서 일학년마치면 이학년으로 올라가고 이학년을 마치면 삼학년으로 학년이 올라가듯이 순서적으로 받는 복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복을 받아서 말씀을 하나님이 주실 때에 그말씀대로 살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렇게 아직 살지 못하는 자기가 단순비교만 되어도 아파하고 애통함으로 잠을 자지 못하고 부르짖는 복을 받는 것이다.

 

사실 애통이라는 것이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고 울어야하는데 울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앞에 애통하고 싶어도 애통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이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아니되고 하나님이 골라서 복을 주시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앞에 애통하는 것이다. 그애통함이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고 부르짖고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고 기도를 안하고 사는 이유가 애통함의 복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이 깨달아져서 통곡을 하면서 읽었다.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른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그때 처음으로 체험을 하였다. 그리고 성경안에 나오는 인물들 곧 믿음의 사람들과 같지 않은 영적으로 초라한 내모습이 나로하여금 울고 통곡하며 하나님게 부르짖게 만들었다. 이것이 애통함의 축복인 것이다. 그와같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영적인 키높이에 이르지 못하는 나의 아픔을 가지고 애통함으로 울고 기도할 때에 나의 애통함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나를 변화시켜 주심으로 위로를 해주시는 은혜를 받았다. 이것이 애통하는 복을 받은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인 것이다. 애통함의 복을 받은자에게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변화시켜주시고 도와주심으로 위로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고 사람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사는 것이다.

 

세 번째 필수과목은 온유해지는 축복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애통하는 심령이 되는 복을 받은 사람은 세 번째로 온유해지는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은 마음이 강퍅하고 거칠은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그리고 죄인들은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마귀의 유혹하는 말과 자기자신의 육체로부터 나오는 정욕에 길들어져 살았던 사람들이다. 온유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들임을 받았다는 말이다. 사나운 개를 훈련을 시켜서 주인의 말에 순종하고 주인을 따르게 길들이는 것과 같이 우리는 믿기전에 마귀에게 길들임을 받아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다시말해서 하나님께 대하여 사나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을 받아서 심령이 가난해지는 축복 곧 말씀을 구하고 사모하는 축복과 애통하는 복인 기도하는 복을 받은 사람은 말씀으로 순종하여 사는데에 길들임을 받은 온유해지는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유한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데에 길들임을 받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복을 받은 사람이다. 온유한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생각이 말씀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말이 말씀으로부터 나오며 모든 판단과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생활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온유한 복을 받은 사람은 말씀으로 인격과 생활이 거룩해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5)

 

말씀을 사모하는 가난한 심령이 되는 복으로 하나님이 말씀을 받아서 그말씀대로 살아지지 않는 나의 인격과 생활 때문에 애통해하는 복이 임하면 주님은 그말씀으로 살게 하시는 은혜를 주심으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유한자는 복이 있다는 말이다.

 

온유한복을 받은자에게는 하나님이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했다.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은 이땅에서 하나님이 시키신 일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할수 있는 복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고 그사명을 수행할수 있는 복을 주신다는 말이다. 그와같이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먹고 입고 마시는 것 곧 이땅의 경제활동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전 9:9)

 

아버지께서 주신 일 곧 아버지의 일을 하는자들이 저 먹을 것과 쓸 것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먹을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온유한 사람이 이땅에서 기업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길들임을 받지 못한 짐승으로는 밭을 갈고 일을 시킬 수가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랜세월동안 길들임을 받아 온유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부리시기에 여간 엉뚱한 것이 아닐수 없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도구로 쓰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한 사람에게는 이땅에서 하나님이 도구로 쓰시는 일들을 기업으로 주시는 것이다. 교회면 교회에서 직장이면 직장에서 어디서나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면 하나님이 그사람을 도구로 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나에게는 1974년 주님을 만나고 일년육개월을 하루 하루 주님하고 온전히 사는 훈련을 받으면서 나와 함께 사는 동생들이 내가 변화되는 것을 보고 이전에 나와 같았던 종교인으로서 주님을 구주로 믿고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났다. 직장에 들어가서 날마다 주님은 나를 쓰시는 것을 체험하고 살았다. 직원들이면 직원들에게 상사면 상사에게 또 업무관련하여 만나는 인사들이면 그들에게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역사를 설명하고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께로 돌아오는 일에 주님이 도구로 써 주셨다. 그때 이후로 주님은 나를 그이 손에서 놓으신 적이 없이 쓰고 계신다. 나는 아직도 무지하고 부족하고 죄가 많은데도 주님은 날마다 나를 씻으시고 고치셔서 나를 사용하신다. 이 모든 것에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네 번째 필수과목은 무엇인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심령이 가난해지는 말씀의 복과 애통하는 마음의 기도의 복을 받은 사람은 말씀과 기도로 온유해진다. 온유하다는 것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들임을 받아서 세상과 마귀를 대하여는 사나워지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는 온유해지는 것이 온유해지는 축복이요 그것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인 사람이 되면 항상 더 나은 의를 구하고 더 높은 거룩함을 추구한다. 그것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기준이다. 곧 하나님의 규격에 맞추려고 하는 목마름과 배고픔이 계속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고자하는 거룩함의 욕구를 가지는 것이다.

 

다섯 번째 필수과목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이렇게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고 영적으로 성장한사람은 자기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절대로 정죄하지 않고 불쌍히 여긴다 왜냐하면 자기도 그와같이 연약한 때 가 있었으며 그와같은 과정을 지나왔기 때문이다. 그와같이 연약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도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이다.

긍휼히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임하지만 긍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도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를 주신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로 그의 은혜의 보좌앞으로 인도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여섯 번째의 필수과목은 마음이 청결해지는 과목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연약한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과목을 통과하고 그만큼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마음이 청결해지는 복을 사모한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함께 하시는 주님을 뵈옵고 그앞에서 살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Mind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요 모든 사고와 생각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이다. 세상의 염려와 더러운 생각들과 세상문화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사라지고 깨끗해질 때에 주님의 임재를 맛보고 생활의 현장에서 주님의 얼굴이 보이며 주의 음성을 언제라도 들을수 있는 심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취미나 오락이나 만나는 친구들이 정리가 되어야 한다. 마음을 더럽게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들을 깨끗이 함을 받는 것이다. 순순하고 단순한(Simple)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만나고 따르고 그와함께 살면서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할 것들을 다 버렸다. 텔레비전은 물론이요 세상책과 지식들과 보고 듣는 것들을 다 버렸다. 아니 버리지 않을수가 없었다 눈앞에 주님이 보이는데 어찌 그런것들을 모고 따라갈수가 있겠는가? 생각하여 보라. 그와같은 것들을 아직도 고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얼굴을 보고 주님의 입재를 체험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식에대한 눈꼽만큼의 애착도 허락하지 않고 다 가져가셨다.

자식에게 마음을 주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음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요 주님이 그것도 전심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애 2:19)

 

그것도 전심을 요구하신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전심으로 돌아와야 승리생활을 할 수가 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

 

그래야지만 주님을 사랑할수 있는 것이다.

이복잡한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많은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려면 전심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일곱 번째 과목은 화평케 하는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앞에말한 모든 복을 받고 영적으로 성장을 하면 그때는 화평케하는 과목을 받게 되는데 화평케 하는 것은 전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들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8-20)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그의 화목제물되심과 하나님이 그의 몸을 제물로 받으심으로 하나님과 죄인사이를 화목하게 하시는 것이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죄로인하여 원수된 우리와 하나님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0-23)

 

바울과 같이 이복음의 일군이 되어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화목하게 하시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원수된 삶을 살며 지옥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과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이며 그것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순종하는 사람이다.

아무나 전도하며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앞에 말한 여섯가지 과목을 이수한 사람만이 형식적인 전도나 교인얻기 위한 전도가 아닌 실제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이다.

 

믿음의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전도를 못해도 항상 전도를 해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주님에게 반드시 쓰임을 받는 전도를 하는 것이다.

 

나도 그와같은 부담으로 가득할 때에 교통사고가 나고 죽음을 직면한후에 주님과 계산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그때부터 전도를 했으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 과목은 핍받을 받는 과목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전도하지 않는 사람이 핍박을 받을 리가 없다. 성경책만 끼고 교회를 왔다갔다만하는 사람이 핍박을 받을 리가 없는 것이다.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영혼들을 손아귀에 잡고 종노릇을 시키던 마귀의 나라에 비상등이 켜지게 된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귀의 손에 붙잡혀 있는 영혼들을 빼앗아 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복음전도는 마귀에게 가장 치명적인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를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마귀는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시켜서 복음전도자를 핍박을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과 자기에게 속한 조직들 교회에서도 자기말을 잘 듣는 사람들을 시켜서 복음전도를 훼방한다.

 

나는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더 많이 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핍박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화평케 하는 복음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를 모른다.

 

교회사를 보다라도 교회밖에 있는 네로황제나 도미시안황제가 또 그리고 공산당이 죽인 것보다는 캐토릭과 캐토릭이후의 교회가 죽인 사람들이 훨씬 더많은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처럼 하나님과 맞지 않는 교회와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 믿음으로 사는 신실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핍박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육체에 속한 사람들이 교회안에서 경건한 사람들을 핍박하는 일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경건하게 살며 일곱가지 필수과목을 전수하고 전도를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는다.

그러므로 주님은 핍박을 받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는 그만큼 성장을 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이와같이 여덟가지의 필수과목을 전수한 사람만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땅에서 주님을 따르면서 이와같은 여덟가지의 필수과목을 다 전수하였다. 그래서 포도나무된 주님이 인정하시기에 합당한 가지가 된 것이다. 우리도 이와같이 여덟가지 과목을 이수함으로 주님과 꼭맞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의 일군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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