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순위의 아픔

 

“장로님 인도네시아 가거든 립스틱하나만 사다주세요 돈은 드리겠습니다.”

“선교비는 한푼도 아니 주면서 립스틱값만 주겠다고?”

“죄송합니다. 잘못되었습니다. 기도하고 회개하겠습니다.”

 

일전에 어느분하고 통화를 한 내용이다.

인도네시아에 갑자기 복음을 전하러 갈일이 생긴 것을 알고 쓰던 립스틱이 다 떨어졌다고 사다달라는 순진한 요구에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매몰차게 답을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과 복음전하는데 쓰는 비용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을 하고 생각없이 말한다.

이는 오랫동안 세상에서 육신을 갖고 살면서 몸에 배고 익은 물질적인 가치관으로부터 나오는 말이라는 것에 더 아픔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다.

 

어떤이는 선교비를 헌금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요즈음 형편을 말하는 분도 있었다. 또 교회에서 리모델링 헌금을 거두기 때문에 선교헌금을 하지 못해 대단히 죄송하다고 정중히 못한다는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현실을 말하면서 헌금을 하지 못하는 변명을 한다.

차라리 그냥 "기도해보니 이번에는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다음에 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와같은 물질적인 가치관과 우선순위로부터 부지불식간에 하는 말이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한다는 사실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또한 헌금이라는 것이 형편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돈이 있기 때문에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없는 중에 주님이 우선 쓰실 것을 생각하고 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없는 중에 힘써 헌금을 하면 주님이 그것을 채워 주시고 더 주신다는 계산을 하는 것도 악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사이에서도 부도덕한 일로 받아 들여 질 것이다.

 

야고보장로는 형제자매의 필요를 알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믿음도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했고 죽은 믿음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주님의 필요를 알고도 희생할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요 죽은 믿음인 것이다.

 

교회리모델링도 해야하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쓰는 선교비와 비교하고 그보다 앞세운다면 그 또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누구나 즐거이 드리는 헌금을 주님은 받으신다.

억지로나 부득이 함으로 드리는 헌금은 주님이 받으실수 없다.

 

또 주님은 세상일도 주께 하듯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골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 드리는 것도 사람에게 하듯이 눈치를 보고 마지 못해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헌금을 하지 하나님앞에서 헌금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가 내는 헌금을 어떻게 생각을 할까?”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을 할까?”

“내가 장로라면 이만큼은 해야 체면이 서지”

“내가 권사인데 교회에서 바라는 기대치만큼은 해야지”

이와같은 생각들이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생각들이다.

이런사람들은 즐겨내는 은혜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선교비든 헌금이든 주님이 쓰시는 돈이다. 그의 자녀들인 우리는 먼저 우리의 소용을 따지기 전에 주님이 무엇이 필요하실까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나의 필요보다도 먼저 주님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달아 보기전에 믿음을 달아보시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임금의 오른편과 왼편을 가리는 것은 주님의 필요를 먼저 채웠느냐 아니면 자기의 필요를 먼저 채웠느냐에 의해서 갈라진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필요를 채우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서도 자신들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왼편에 있는 자들은 “주님이 어려우신 줄 우리가 알았다면 왜 우리가 안했겠습니까?” 라고 오히려 반문하는 사람들이다.

 

무슨 행위를 하면 오른편으로 가고 아니하면 왼편으로 간다는 것은 율법주의자들의 행위주의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육신적인 것이며 그것은 아니다. 틀린 것이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주님의 필요를 알고 채우는 삶을 산다. 그것은 영생을 얻은 그사람의 신분이요 그사람의 생활이요 그사람의 인격이다. 반면에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주님의 필요도 모르고 주님의 아픔도 알지 못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도 알수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살은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아픔도 알고 주님의 필요도 알고 그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알고 그주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사는가?

아니면 나의 필요에 절박하고 나의 기뻐하는 것들과 나의 원하는 것들에 절실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를 살펴 보는 것이 가장 급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왼편에 있는지 오른편에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의 소속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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