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과 같이 부활주일이 다가 오면서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활은 이벤트적인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2000년전에 일어난 일을 기념하는 것도 아니다.  

부활은 교회가 일년에 한번씩 치루는 연례행사도 아니다.  

부활은 칸타타로 축하하고 기념하는 일이 아니다.

부활절은 문화도 아니다.

부활절은 풍습도 아니다.


부활은 부활의 사실을 입증하고 누구로 하여금 그사실을 믿게 하는 것도 아니다.

부활은 빈무덤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빈무덤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부활을 축하한다면 누가 축하를 받아야 하는가?

부활을 기념한다면 누구를 기리는 것인가?

부활을 기뻐 하고 즐거워 한다면 누구에게 그 기쁨이 돌아가는가?


오늘날 교회는 천주교라는 중세시대에 타락했던 단체(그것을 교회로 보는 것은 성경적으로 여러가지 무리가 있다)의 부활절을 문화로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 명칭이 이교도적인 것도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부활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부활을 지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지키는 부활이지 체험하는 부활이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천년전에 무덤문을 열고 나오신 사실에 더 열광을 한다.

그러다 보니 영적인 생명은 뒷전이고 육체의 부활이 사실만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그에게 사망에 매여 있을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신 사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말은 부활과 생명은 동격이라는 말이다.

주님은 생명이시며 부활이시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부활하시기 전에도 부활이셨다.

주님은 이세상에 오실 때에도 부활이셨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도 부활이셨다.

주님은 그의 몸을 장사지낼 때도 부활이었다.

그는 무덤에 누워 게실 때에도 부활이셨다.

그가 무덤문을 열고 나올 대에도 그는 부활이셨다.


유대인들은 부활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부활은 죽는 것이 아니다.

몸은 죽어도 주님안에 있는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을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도 그의 생명에는 변함이 없었다. 단지 육체만 잠을 잔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 자기의 생명을 빼앗을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몸만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셨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누구를 위하여 죽었으며 누구를 위하여 다시 살아 나셨는지에 있어서 그 "누구"가 제일 중요한 것이다.

다시말해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누구의 부활이 되어야 그것이 부활을 믿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주님의 부활이 나의 개인적인 사건이 될 때에 주님의 부활이 부활이 되고 부활절이 일년중의 하루를 말하는 날자가 아니라 내인생이 되고 내 인격이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예수 부활의 주인공이 내가 되는 것이다.

 

부활은 생명이다.

이 부활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주님이 이천년전에 무덤을 열고 나오신 사실에 열광을 하지 않고 내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 곧 내안에 있는 예수생명에 감격을 하는 것이다. 그 생명이 내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믿어지고 체험되고 죽었던 나의 영혼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생명이 내안에서 나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잘못된 부활이 교회안에 들어 오게 된 것은 타락한 교회가 한 일이다.

그리고 신학자들과 주석가들이 그렇게 되도록 거들은 것이다.


그로 인하여 오늘날 사람들은 부활을 미래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사상으로 부터 온 것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 부활을 미래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 메시야가 아직 이땅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부활을 미래적인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아직 그들의 메시야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유대인들과 같이 믿음이 없는 교회와 사람들은 지금도 부활을 미래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부활은 과거에 일어난 것이다.


아직도 교회안에 미래적인 부활을 믿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며 신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이 그렇게 만들은 것이다.

그것을 나는 "어음적인 부활"이라고 말하고 싶다.


약속어음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발행자가 나중에 현금으로 바꾸어 주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에는 그것을 현금화 할수 없다.

그래서 급한 사람들은 어음을 할인하여 액면가 이하의 돈을 받기도 한다.


어음적인 부활은 지금 부활 곧 현재적인 부활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혹시 부활을 믿는다 해도 할인된 부활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부활의 믿음은 과거에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지금 그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부활을 사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부활은 어음이 아니라 현찰이다

예수를 믿어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나중에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앞에서도 부활을 말씀하시면서 미래시제를 쓰신 적이 없다.

마르다도 마리아도 나중에 마지막 때에 오라비가 다시 살것을 말했다.

그들의 믿음은 미래이지 지금이 아니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지금 나사로가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셔야지만 했다.


나사로의 죽음앞에서도 주님은 나사로의 육체의 죽음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부활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육체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다.

바울도 그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육체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잠을 자는 사람이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래서 바울은 주님이 잠자는자들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신 첫열매가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은 구약시대에 메시야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육체가 죽어 잠자는자들이다.

그들가운데서 사망의 문을 열고 나오시는 첫열매가 되신 것이 부활의 주님이요 그것이 주님의 부활이다

 

오라비의 육체의 죽음으로 믿음의 눈이 어두워진 나사로의 자매들에게 주님은 나중부활이 아니라 지금부활을 말씀하시는데 그부활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속에 이미 있는 죽을 수 없는 부활의 생명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앞에서도 육체의 부활은 단 한마디도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나사로가 이 부활의 생명을 이미 받은 사실을 자매들에게 설득하신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주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다음 말씀의 시제를 보면 더 분명해진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VIAA) 나는 부활이요(VIPA) 생명이니 나를 믿는(VPPA) 자는 죽어(VSAA)도 살겠고(VIFM)
(요 11:26) 무릇 살아서(VPPA) 나를 믿는(VPPA) 자는 영원히 죽지(VSAA)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VIPA)


이말씀을 시제를 고려하여 풀면 이렇게 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믿는 사람은 이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어서 나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믿고 있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이미 가진자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생명은 나사로가 예수를 처음 만나서 믿었을 때에 받은 것이다.

주님은 그사실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VIPA) 내 말을 듣고(VPPA)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VPPA) 자는 영생을 얻었고(VIPA) 심판에 이르지(VIPN)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VIRA)


이말씀을 풀이하면 이와같다.


"지금 내말을 반복해서 듣고 나 보내신이를 계속해서 믿는자는 지금 영생이 있는 사람이고 지금 심판을 받지 않는데 그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옮겼느니라"는 부정과거로서 지금 막완료된 상태를 말하는 시제이다.

이와같이 잘못된 주석들이 부활을 미래의 부활로 미루어 버리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다니엘 스텔레의 말과 같이 한사람도 예외없이 주석가들은 헬라어 시제를 고려하지 않고 틀린 주석들을 했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일이다.


이렇게 부활은 막연한 미래를 바라보는 요행적인 것이 아니다.

부활은 이미 믿는 이안에 이루어 진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적인 부활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미래적인 부활을 선호하고 그렇게 말하고 미래적인 부활에 동조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확실한 것은 지금부활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사람이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부활하느냐 아니하느냐가 문제가 될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미 부활을 믿고 그 부활과 연합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부활의 믿음은 이미 내안에 일어난 부활을 어떻게 오늘 하루를 그 능력을 가지고 사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번 부활절을 지내면서 지금 부활의 생명이 내안에 있느냐 아니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명제가 되어야 한다.

나사로에게는 이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육체의 죽음을 주님은 잠들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미래적인 부활을 믿는 사람은 육체가 죽으면 그것은 몸도 영도 다 죽은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그사람을 가리켜 잠들었다는 말을 하실리가 없다.


부활의 능력은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종의 복음을 믿는 순간에 역사한 것이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나는 그때 이미 살아났다.

이미 부활의 생명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영생이다.


부활의 주인공은 주님이지만 내가 예수를 믿을 때에 나도 주님과 함께 부활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없는 부활은 나에게는 부활이 아니다.


믿는자는 이와같은 부활의 생명을 선물로  받아 부활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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