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길은 질러가는 길의 준말이다.

사람이 가고자하는 곳에 힘들이지 않고 쉽게 빨리 갈수 있는 길이 지름길이다.

지름길은 좋은 것이지만 목적지가 어디냐에따라서 좋을수도 있고 해로울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을 한다.

예수전도협회만 갔다 오면 교만해진다고

그뿐이 아니다. 협회의 간사를 하면 교만해지고 간증을 해도 교만해 진다고 말을 한다.

또 해외선교를 갔다와도 교만해 진다고 한다.

어떤 목사는 미국에 갔다 온 사람들은 다 교만해졌다며 자기도 그랬다고 변명을 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를 가까이 하면 반드시 교만해 진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왜 누구누구를 가까이 했느냐고 나에게 질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그런사람을 간사가 되게 했느냐고 질책도 한다.

왜 그런 사람을 간증을 시켰나고 힐문을 하기도 한다.


얼마전에 협회와 소속한 교회에서 교만함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들을 말하면서 어느 목사님이 나에게 왜 그런 사람들과 밥을 먹고 그들의 차를 타고 다니기도 했느냐고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왜 그런사람들을 가까이 해서 교만하게 만들었냐고 나에게 책임을 묻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목사님에게 그들이 내가 데리고 있던 간사에게 피해를 보고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한동안 그렇게  만나서 밥도 먹고 치유가 될까하여 그런시간들을 가지고 그리고 집회가 끝나면 지척의 거리이지만 차로 태워 주겠다고 하면 봉사를 받기도 했었다라고 해명을 하기도 했다. 나는 주님의 사랑으로그렇게 했지만 그들은 육신으로 그것을 받기도 하고 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대놓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분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어떤이는 뒤에서 수근수근하면서 비방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예수전도협회가 어느 누구가 교만해지라고 주님이 만드신 것은 아니다.

또 누구를 교만해 지라고 간사를 세운 것도 아니다

또 누구누구를 교만해지라고 간증강사를 세운 것도 아니다.


확실한 것은 예수전도협회도 나도 위험한것은 사실이다.


이세대에 듣기 어려운 말씀을 들으면서 듣는 바 그 말씀이 자기의 믿음인줄로 착각을 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간사를 하고 간증을 하면서 사람들의 칭찬이 자기의 모습인줄로 착각하고 사람의 말에 속아 넘어가기도 한다.

또 자기들의 믿음이 협회수준인것처럼 착각하고 세상의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을 내려다 보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생기고 침몰하면서 30년이 넘는 오랜기간을 지내온 것도 사실이다.

돌아 보면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끊임이 없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같은 의견들은 고맙지만 그것은 전혀 동의를 할수 없는 틀린 말들이다.


누가 협회 간사를 하고 또 누가 나를 가까이 하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가 생활속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교만해 지는 것이다.

협회에서 은혜를 받아서 교만해 지는 것이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은혜를 받은대로 생활을 살지 않기 때문에 교만해 지는 것이다.

이시대에 듣기 쉽지 않은 귀하고 좋은 말씀을 들어서 교만해 지는 것이 아니라 들은바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교만해 지는 것이다. 

간증을 하기때문에 교만해 지는 것이 아니다. 간증을 힐 때마다 그 후에 자신이 간증을 한대로만큼도 살지 못하고 간증한 것 이하의 생활을 살기  때문이다.

나와같이 밥을 먹어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지를 않기 때문에 교만해 지는 것이다.

나를 섬기기 때문에 또 협회에서 봉사를 하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희생할줄을 모르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이다.  


성도들의 교제와 공동체인 교회와 세상사이에서 어느쪽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사느냐가 믿음의 관건이다

어느쪽의 영향을 받아야하고 어디에 영향을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그것을 교회안에 가져다가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은 교회에서 영향을 받고 세상에서 영향을 끼치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앞에 교만한 것이고 후자는 사람앞에서도 겸손한 것이다.


협회의 간사를 했던 사람들이나 훈련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말씀을 듣고 통회하고 아파함으로 울면서 회개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은밀한 공통점은 집에서 직장에서 세상으로 회귀하는 악성생리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간사들중에도 집에가서는 성경도 안보고 기도도 안하고 텔리비젼과 세상의 안일함에 빠져 살았던 사람들이 허다하다.

간증강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며칠에 또는 일주일에 한번을 만나도 변화가 된 모습을 볼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는 항상 그와같은 것들을 보면서 살았다.

그러니 몇개월이나 몇년만에 만난다면 어떻겠는가 그결과는 뻔한 것이다.


어저께 목사님들과 마태복음 25장의 비유와 요한 계시록의 예언의 일치성을 공부하면서 어차피 하나님의 나라는 키질하는 것이라고 했다.

키질하는 것은 알곡을 가려내기 위해서 쭉정이 곧 가짜를 날려 보내는 것이다. 

생명이 있으면 생활도 있다.

생명이 있노라하고 생활이 따르지 않는 사람은 가짜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세가지 비유 곧 열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것을 말한다.

믿음과 생명과 생활은 일치하는 것이다.

그비유를 통해서 믿음과 생명과 생활이 어긋나는 사람은 가짜가 틀림이 없다는 기준을 주님이 제시하신 것이다.  


가짜는 교만의 키질로 드러나게 되고 주님은 그것을 날려 보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수를 믿노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세상에 빠져서 사는 것과 같은 교만은 없다.


잠언기자가 그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다.


오래전에 실족하고 협회를 떠난 간사에게 내가 여러번 한 말이 있다

"나는 너를 보면 이해가 전혀 안되는 일이 있다"

"그게 무언데요?"

"얘 교만해 진다면 내가 교만해져야지 왜 네가 교만해 지냐?" 

"......"


나는 그에게 이런말도 자주했었다.

"내가 직장생활을 오래하면서도 너같은 사람을 불신자들가운데서조차도 본적이 없다"

"........"


나도 그렇지만 주님앞에 온전한 사람은 없다/.

나는 자격도 없고 무능하고 힘도 없는 나를 써주시는 것은 그로 인하여 높은 마음을 가지고 교만해지라는 뜻이 아니다.

더 겸손하고 낮아져서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가까이 하고 살라고 써주시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은혜를 주실 때마다 부르는 찬송이 이것이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수 없도다........"

지금까지 살고 일하면서 관찰한 결과 교만해짐으로 주께 버림을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결론은 이것이다.


무엇이 있어서 또는 많이 배워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다.

교만은 주님이 없기때문에 교만해 지는 것이다.

주님이 없는 생활은 거기가 마귀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예수전도협회는 지름길이 아니다.

어떤이들은 예수전도협회가 지름길인줄로 착각을 한다.

잘못된 길이 하도 많으니 상대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가 보다.

그러나 협회는 지름길이 아니라 바른 길이다.


믿음으로 살고 주님을 따라가는데 질러가야 주님보다 앞서는것밖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주님보다 앞질러 가니까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교만하여 망한 무수한 사람들이 다 그길을 갔다.


아담과 하와도 주님을 질러갔다.

가인도 주님을 질러 갔으며

함도 율법주의로 아버지의 실수를 정죄하면서 하나님을 질러가서 그의 사랑하는 막내자식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만들었다.

그외에도 6000년동안 주님을 앞질러간 사람들은 한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버림을 받았다.


지금도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연약하고 허물많고 부족한 나를 써주시는 주님앞에 기도가 하나있다.


"주여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맨 끝에라도 나를 붙여 주셔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를 사랑하고 따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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