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집을 나서는데 동네에 사시는 목사님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20년전에 훈련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가까이 사는 줄을 몰랐다고 하시면서 아주 반가워 했습니다.

그리고 훈련받을 때에 혹독하게 받았던것을 말했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그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질문하시는 말씀이 "근데 왜 이렇게 교회가 부흥이 안되지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여러말을 할 게재가 되지를 않아서 "변화되지 못해서 그렇지요"라고 답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헤어지고나서 그분의 질문을 곰곰히 생각을 하면서 되새김질을 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걸어가면서 주님이 생각을 정리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것은 교회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변화되지 않은 것은 교인들 하나하나가 변화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변화되지 못하는 것은 담임목사로부터 변화된 모습의 본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담임목사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인들이 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는 말을 하고 듣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믿음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감동을 받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생활을 본받는 것이 믿음입니다.


목회일을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는 일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 목회를 잘하고 교인들을 많이 모으고 큰교회를 해도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이 없거나 목회자를 본받는 교인이 없으면 그것은 목회가 아닙니다.  


물론 이렇게 온세상의 교회가 전반적으로 상태가 않좋고 불신자들에게 욕을 먹어도 어느 한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변화되었으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나 직장에서 내가 변화된 복음을 전할 때에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변화된 것이 사실이며 그사실이 생활속에서 그들에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어떤때는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들 가운데도 충분히 변화되지 못하고 목사가 된 사람들을 보는 것은 가장 큰 안타까움입니다.

그들이 이미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기 때문에 목회의 목마름은 크고 상대적으로 자기자신이 변화를 받아야 하는 심령의 가난함은 가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변화되지 못한 미달된 거룩함과 미달된 인격과 서툰 모습으로 사람을 다루어야 하고 심령을 고쳐주어야 하는 중책을 맡은 자로서 그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목회는 사람을 다루는 것인데 사람을 모르면 할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모르는 것은 자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악함과 죄성과의 투쟁을 통해 믿음으로 이기고 자기를 십자가로 굴복시키고 변화를 받지 못하면 자기 자신도 알수 없고 사람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목회가 불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낳은 자녀들조차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아마 그런 분들은 오랜세월동안 은혜를 거듭해서 받아도 왜 변화되지 않을까 의구심을 가질 것입니다.

자신도 변화되지 않고 교인들도 안변하고 자녀들도 안변하는 것에 아픔을 가질 것입니다.


그와같이 변화되지 못하는 단 한가지 중대한 이유는 모두가 다 율법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느교회나 어느 사람이나 할것없이 다 율법의 행위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이 받은 은혜를 실종하게하는 주범입니다.

율법주의는 은혜에 반하여 작용합니다.

율법주의는 십자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합니다.

율법주의는 은혜를 받지 않은 상태로 되돌립니다.

율법주의는 은혜를 싹쓸이 해갑니다.


놀라운 것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율법주의적인 언어와 가치관과 행습에 빠져 있습니다.

율법주의로 외식을하면 변화를 받지 않아도 교회는 나태함에 빠집니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교회안에 사랑이 식어 집니다.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을 저버리고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에 치우칩니다.


그러므로 변화를 사모하는 가난한 심령이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십년을 교회를 다녀도 변화받지 못한 인격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주의의 경계선을 넘는 것이 십자가의 은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경계선을 거꾸로 넘어갔던 사람들이 이제는 십자가의 선을 다시 넘어서 은혜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한사람 한사람이 변화됩니다.

한사람이 변할 때에 교회도 변합니다.

교회가 변화되면 전도가 됩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교회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종합적인 영적인 상태가 복음이고 전도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를 보면 알수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를 타파하고 변화되는 생활을 사는 은혜를 받읍시다.

십자가의 복음을 입에 발린 말로 전하지 말고 나의 변화된 생활로 십자가를 증명하는 전도자가 되는 은혜를 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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