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도구화하는 위험

하나님 나라의 상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통치 질서는 파괴 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실한 것은 하나님을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없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저주 가운데 빠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떠났으니 무능하고 힘없는 죄인이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으니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무질서한 인격과 생활을 사는 죄인이 되었다.

사랑의 아버지를 떠났으니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는 무자비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아담을 찾아오셔서 그와 변론하심으로 그가 지은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그의 죄의 결과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흙이 된 사람에게 영적인 사망과 이마에 땀을 흘리고 일을 해야 하며 종신토록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저주를 알게 하신다. 그리고 그의 아내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 곧 자녀를 낳고 기르는 저주와 죄인인 남편을 사모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아서 사는 죄인의 다스림을 받는 저주를 알리신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의 언약을 주신다. 그 언약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회복하시는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심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짓는 죄를 용서받고 씻김 받는 거룩한 생활을 살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교회생활의 시작이다.

 

하나님 나라의 대안인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대안(代案, Alternative)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교회생활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천국 생활을 산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 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 찬송가 가사와 같이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그와 동행하는 생활을 이 땅에서 사는 것이다. 교회는 에덴 동산은 아니지만 한 죄인이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을 완벽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나 큰 것이기에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

 

아담은 여자의 후손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의인이 되었다 그리고 날마다 일상생활 속에서 짓는 죄를 어린양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피의 제사를 드려 속죄함을 받고 가죽옷을 입고 구별된 교회생활을 함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교회생활을 살았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다시 찾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날마다 주와 동행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이 참된 교회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아담은 주와 동행하는 교회생활을 했다. 아담은 그의 교회의 족장(Patriarch)이었다. 족장이라는 말은 목회자라는 말이다. 아담은 교회의 족장으로서 자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믿게 하는 신실한 목회자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의 아들 셋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 셋의 아들 에노스도 아담의 교회의 족장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살았다. 게난도 마할랄렐도 야렛도 그렇게 살았다. 야렛의 아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누구에게 배웠겠는가? 그 믿음은 그의 선조들의 믿음이다. 에녹의 아들 므드셀라와 므드셀라의 아들 라멕 그리고 라멕의 아들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6:9)

 

 

하나님을 도구화한 죄인들

 

사도행전 3장의 성전 미문 앞에 앉은뱅이는 구걸해서 먹고 사는 거지이었다. 그 일의 결과를 볼 때에 그에게 필요한 것은 몇 푼을 구걸해서 입에 풀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일어나 걷는 것이었으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예수가 필요했다. 예수를 그에게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침받기 전의 앉은뱅이와 같이 오늘날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당장에 그들이 당하고 있는 저주를 하나님이 풀어주실 것을 구하고 사모한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나 재산이나 병 고침이나 문제 해결이나 사람이나, 그런 자기의 당한 문제, 곧 저주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죄인들은 자기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모든 것을 도구화한다. ()를 도구화하고 학연과 지연과 혈연을 도구화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을 도구화 한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도구화하는 우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편적인 상식에 맞게 세련되게 다듬은 것들이 종교이다. 영생이 없는 종교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만든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노아의 시대 이후에 사람들은 대 홍수의 재앙으로 전 인류를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섬겼다. 우상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 내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가짜 하나님을 만든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부어 만들고 새겨 만든, 여러 가지 신상들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이름하고 섬긴 것이 우상숭배의 시작이다. 우상은 하나님을 인간의 도구로 전락을 시킨 것이다. 그로 인하여 노아의 홍수이후에는 온천지에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우상숭배자들이 넘쳐 나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리는 반드시 우상으로 채우는 것이 죄인들의 행태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3:11)

 

 

아브라함의 교회

노아의 홍수 후에 하나님을 상실한 죄인들로 인하여 온 세상에 우상숭배가 들끓고 창궐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신다. 아담에게 허락하셨던 그의 교회를 아브람을 통해서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의 언약인 여자의 후손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또 하란에 있을 때에 재차 부르심에 응답하여 가나안으로 간 것은 그에게는 그의 조상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여자의 후손의 언약을 믿음으로 하란을 떠났지만 그는 오늘날의 교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보다도 세상살이의 현실에 더 급급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긴 여정을 통하여 아브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아브라함이라 이름 바꾸어 주시며 할례의 언약을 주셔서 세상과 구별된 아브라함의 교회를 세우신다. 그러나 인간은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이삭도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 고생을 한다. 그리고 그도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아비멜렉과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의 고백을 통해 이삭이 마침내 하나님과 함께 사는 믿음으로 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26:28-29)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믿음의 유산으로 아브라함의 교회의 족장으로서 세워진다.

 

 

장자의 명분의 도구화

아브라함의 교회 안에서 이삭의 두 아들은 벌써부터 하나님을 구하는 믿음이 아니라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구하고 그것으로 서로 다투는 일이 일어난다. 어린 그들에게도 하나님보다도 그가 주시는 축복을 더 필요로 했으며 그로 인하여 장자의 명분을 도구화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둘은 그것을 위하여 모태로부터 싸우고 다투다가 결국은 야곱이 집에서 내어 보냄을 당한다. 에서는 믿음이 없이 장자로서 아버지의 유산을 취하였으나 아버지의 믿음은 물려받지 못함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믿음의 장자가 된다.

 

하나님은 이일을 통해서 장자의 축복을 도구화하는 인간의 정욕과 사상을 철저하게 파괴하시는 것이다. 장자의 믿음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믿음을 물려받는 것이다.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상급으로 받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도구화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도구화함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섬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열두지파가 땅을 나누어 가진 후 사사시대에 끊임없이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바알신상을 섬기며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이방사람들과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함으로 왕을 도구화하는 일을 하고 그들은 결국 왕들의 타락과 우상숭배로 하여금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손에 망하고 남 왕국 유다도 바벨론에 의하여 패망한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칠십 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다니엘의 예언대로 칠십 이레의 때인 사백구십 년 동안 곤란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정작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을 때에는 그들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으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들의 아비는 마귀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책망하셨고 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요한도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조상의 유전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의 교훈으로 도구화 한 것이 조상의 유전”, “사람의 유전”, “장로의 유전이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도구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었으며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들이요 오직 종교적인 욕구만을 채우면 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이었으며 모든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사람에게 문안을 받는 것과 칭찬을 받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물도 제단도 성전도 다 도구화시킨 사람들이었으며 성전에서 장사를 하게 함으로 막대한 이권을 챙기던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믿음의 내용이 없기 때문에 불가불 외식할 수밖에 없는 속이 빈껍데기 같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도 도구화하여 이용하였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23:29-31)

 

주님은 그들이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을 하겠다고 미리 말씀하셨다.

 

이것이 도구화된 유대교 신학의 정체이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사울이라는 청년은 자기가 배운 대로는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일이 마땅히 여겨지는 것이 되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화한 유대교 신학이요, 가말리엘 신학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죄인들임에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자들이요, 하나님이 필요 없는 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구하기보다는 유대교라는 한 종교를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교를 도구화함으로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악을 행한 것이다.

 

 

현존하는 도구화의 위험

 

그 후로도 그와 같은 일들은 계속되어 왔다. 지난 세대에 중세기와 근현대시대에 주님이 보내신 신실한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이 교회 안에서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한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인 로마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 때부터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의 일이 성직화되는 일을 통해서 사명이 직업이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를테면 사명을 도구화 한 것이다. 사명이 직업이 되다보니 직분이 계급화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교회 안에 일어났다. 다음으로는 직업이 되고 계급이 된 일군들을 감당해야하기 때문에 교회가 조직이 되어야 하고 경영체가 되어야하는 필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는 재산에 눈을 돌리고 재산을 축적하게 된다. 재산이 많아진 교회는 이권의 대상이 되고 그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교권을 사용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교권을 차지하기 위한 더러운 암약과 쟁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조직과 교권을 지키기 위해서 중세교회는 성도들을 오천만 명이나 넘게 죽이는 일을 자행하였다. 철의 제국인 로마에 의해 열 번의 핍박을 통해 일천만 명의 순교자가 난 것에 비교하면 이는 놀랍도록 악한 일이다. 그것이 주님이 밧모에서 요한에게 주신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첫째 짐승의 정체이다. 다니엘서에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타난 네 번째 짐승이 철의 제국의 본체이다. 세상 제국인 로마제국은 그 짐승의 전신일 뿐이며 본체는 중세 카톨릭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도구화 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예의 유대교의 일들과 같이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일들이었다. 그들은 교회조직을 위해서라면 성도들의 피를 흘리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천사숭배와 순교자숭배 등이 도구화되는 일들도 3,4세기경에 일찌감치 나타났다. 그들은 성상을 만들어 교회 안에서 우상숭배를 본격화하는 어리석은 일들을 감행하였으며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그들은 예배당도 도구화시키고 예배도 성례전도 다 도구로 만들어 버렸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의식과 예식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들만의 종교를 위해서 미술도 음악도 다 도구화시켜서, 그것들을 가지고 영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영혼들에게 감동을 주는데 이용했다. 교황권이 약해지자 그들은 종교회의를 만들어 그것으로 교권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개혁가들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반종교개혁운동을 일으켜 성경 본문을 훼손하고 신학을 조작해서 신학도 도구화시키는 악한 일을 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나와서 안 되는 거짓말인 과거주의와 미래주의가 세상에 나옴으로 헛된 종말론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세상을 혼란 가운데 빠트리는 일의 근원이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로도 교회는 신학을 도구화하고 교회를 도구화하고 목회를 도구화하고 직분을 도구화하는 일들을 함으로 주의 몸 된 교회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가게 하고 배반하게 하였다. 그들은 오늘날도 예배를 도구화하고 설교를 도구화하고 또 말씀을 도구화하여 여러 가지 성경공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기도와 찬양과 은사를 도구화한다. 그들은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집회를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의 흔적이 없다. 지상명령인 전도는 으레 아니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전도하는 교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전도를 도구화하여 전하라는 복음은 전하지 않고 바리새인들과 같이 교인을 모집하는 전도만을 하고 있다. 또한 전도를 교회를 크게 하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악한 일을 하고 있다. 심지어는 종말론도 도구화 하여 무지몽매한 교인들을 두렵게 하여 자기의 말을 듣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모름지기 성도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교회가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영생이 없고 하나님도 없으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도 없고 그들의 인격에 주님을 닮은 거룩함이 없다는 증거가 된다.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도구화시키며 교회도 하나님까지도 도구화할 수밖에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이 깊이 빠져 있었던 신플라톤학파가 그와 같은 일을 부추겨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원전의 플라톤학파는 정치를 도구화 했고 기원후의 신플라톤학파는 종교를 도구화하는 데에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개혁이후에 개혁자들은 왜곡된 카톨릭의 신학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채 그들의 것들을 그대로 답습해 왔다. 특히 종말론 같은 경우는 트랜스 종교회의의 음모인 반종교개혁운동의 산물인 거짓으로 조작한 과거주의와 미래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왜곡된 종말신학의 재앙을 교회 안에 쏟아 부은 양상이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2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인 톨레미(Cloudius Ptolemy)가 만들은 잘못된 연대기로 인하여 유명하고 유능한 많은 신학자들과 주석가들을 미치게 만들고 어리석게 만들어 버렸다.

근현대 신학에도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응한 것이다.

 

거짓말하는 자의 징조를 폐하며 점치는 자를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그 지식을 어리석게 하며” (44:25)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자신을 주시기를 원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도구화하고자 하는 마귀의 유혹에 쉽게 빠져 버렸기 때문에 초래된 것들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일꾼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없다는 말이 된다. 믿음은 생활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을 생활로 아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시는 것은 세상에서 이기는 승리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각 사람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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