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부활 주일 아침에 한 고등학생이 감사 헌금을 했습니다. 그 봉투에는 감사의 제목이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이 나의 배에 선장이 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글을 읽던 목사님이 울먹였습니다. 교인 중에도 몇 명은 감격해서 우는 듯했습니다. 나도 울컥하며 눈물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그 학생은 아마도 요즈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관광선 침몰사고를 생각하면서 자기 인생의 항해에 항상 인도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한 것 같습니다. 

 

관광선이 사고로 위기를 당하자, 선장이 죽어가는 어린 학생들을 뒤로하고 먼저 구조된 것은 누가 보더라도 비난을 면치 못할 일을 한 것이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사고에서 많은 학생이 희생을 당한 고등학교의 수학여행 인솔자로 갔던 교감 선생님은 구조되었음에도 자기만 살아났다는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서 나무에 목을 매달아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는 교감으로서 자기의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학생들을 구조하고 여러 명을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구조되었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후문을 들을 때에 더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2년 전에는 이탈리아의 유람선이 좌초되어 많은 희생자를 내었는데 선장이 제일 먼저 탈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고로 32명의 생명이 희생됐습니다. 그리고 그 사고가 난 후 프란체스코 스케티노 선장은 "배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끝내 어기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2009년 1월 15일 영하 7도에 매서운 바람이 불던 추운 겨울에 승무원과 승객을 합해 155명을 태우고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으로 가기 위해 라과디아 공항을 이륙하자마자 엔진에 철새가 들어와 끼어서 조난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에 기장은 관제탑의 지시를 따라 가까운 공항에 착륙하려 했지만, 또 다른 사고를 유발할 우려가 있어서 허드슨 강에 불시착하게 됩니다. 체슬리 설렌버거 기장은 기내 방송을 하고 강에 불시착했는데 단 몇 명의 찰과상은 입은 경상자 외에 승객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이것을 미국인들은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체슬리 설렌버거 기장이 승객들을 다 밖으로 대피시키고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비행기 안에서 객실을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면서 구조되지 못한 남은 사람이 있는지를 차분하게 확인을 하는 모습은 온 세계를 감동에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1912년 4월 10일, 세계 최대 초호화 유람선이었던 타이타닉호는 처녀항해를 위해 사우샘프턴 항을 떠났는데, 한밤중에 빙산에 부딪혀 승객 2,224명 중 710명만 구조되고 1,514명이 희생되는 사고를 당합니다. "이 배는 안전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고 장담하던 교만이 한 번의 항해에 꺾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에서도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승객들에게 구조의 우선순위를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의 순서로 정해 놓고 "Be British, boy, Be British"라고 말하며, 영국인들답게 행동하라고 독려하면서 나머지 구조되지 못한 승객들과 함께 배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영국 국민들에게 영웅이 되었고 그의 동상에는 그의 마지막 말인 "Be British"를 새겨 놓고 그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세상 죄인들을 위해 마지막 죽음이 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주님이 선장이 되신 삶을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거친 세상에서 진리의 항해가 결코 녹록지 않음을 우리는 오랫동안 경험을 해왔습니다. 진리를 대적하고 우리가 탄 배를 침몰시키려는 마귀의 궤계와 적지 않은 타락한 종교인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물에 거반 잠긴 채로 이 사역을 하면서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슬픔과 절망감에 얼마나 많은 해를 눈물로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같이 사역하던 사람들이 핍박을 피하여 도망을 가는 것을 자주 보아왔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만 살겠다고 배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교인들이 무서워서 떠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핍박하고 대적하는 교단이 무서워서 떠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회개가 싫어서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전도가 싫어서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를 하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능력을 보여주려는 은사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율법으로 겁을 주는 것을 배우러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여러 모양으로 주님이 선장이 되시는 진리의 배를 떠났습니다.

 

 최근에도 떠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다 떠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저는 영혼 사랑을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교회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어서 아픔이 됩니다.

그들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양들을 먹이고 치는, 영혼을 사랑함으로 목회를 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교회를 하려 한다면 가깝게 또는 멀게 이 배를 떠날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회개하지 않고 떠난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혹 나는 그들과 함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 장로를 사랑합니다. 그 권사를 사랑하고 그 목사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해서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제가 안 쓰면서 섬기고 내게 없는 것도 주었습니다.

아낌없이 사랑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이용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나를 이용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을 주님이 명하신 대로 내 몸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나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말에 그들도 동의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떠나고 지금은 없습니다.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그와 같은 일을 겪으면서 아프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파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얼마나 그들을 아파하실까 하면서 나는 주님을 아파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정죄하면 나도 같은 일을 당할 수 있는 교만에 노출할까 두려워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과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영적으로 배반하고 육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아프게 한 사람들과 교제의 악수를 하는 것이 주님의 아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내가 인정 때문에 육정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사람들을 붙잡으면, 진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우리 주님이 외롭고 슬퍼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다가 순교를 당한 나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이 슬퍼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잡을 수 없습니다.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 거칠고 힘들었던 십자가의 길을 먼저 간 나의 친구들이 슬퍼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 떠나도 나는 안 떠납니다.

아주 나중에는 나 혼자만이라도 남을 겁니다.

나는 타이타닉호 선장이나 체슬리 설렌버거 기장과 같이 훌륭한 사람도 아닌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오늘같이 모든 교회가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리고 배반하는 시대에 주님을 혼자 배 안에 계시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외롭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항해해 가시는 주님과 함께 최후를 같이 할 것입니다

끝까지 나는 "Be British, boy, Be British"가 아니라 "Be Brother and Sister of Jesus"를 조용히 마음속으로 깊이 부르짖으며 주님과 함께 최후를 같이 할 것입니다.

  

연약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나를 알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간절한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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