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은혜

 

어느 집사님이 그에게 최근에 일어난 일을 내게 이야기를 했다. 아들이 직장에 늦어서 지각을 하지 않게 하려고 남편이 오토바이에 태워서 가다가 추돌사고가 일어나서 남편도 아들도 길바닥에 나가 떨어지는 일을 당했다고 한다.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고 진찰을 받았는데 아들의 턱에 약간의 찰과상을 얻은 것 외에는 두 사람 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장로님 방주의 은혜예요

 

그 말을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그런 일들을 이 분은 방주의 은혜라고 하는구나. 방주생활 곧 교회생활을 잘하면 주님이 세상의 재앙에서 건져 주시는 것을 이집사님이 방주의 은혜라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의인들이 온세상의 죄인들이 다 멸망하는가운데 살아 남은 것은 방주의 생활 곧 교회생활을 잘했기 때문이구나. 그러면서 교회안에 사람마다 방주의 은혜를 말하는 간증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교회생활은 주안에 거하는 사람이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교회생활은 예배당에서만 행하는 예배를 비롯한 종교성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시장에서 길거리와 버스에서 주님을 모시고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주님과 친하지도 않으면서 교회와서 주여 주여 부르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과 친한척하는 이율배반적인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안에 너무나 많이 있다. 그들은 예배와 생활을 분리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배는 생활이고 생활이 예배이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은 번역이 많이 잘못되었다. “제사가 아니라 제물이다. 몸을 제사로 드리는 것은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표현이다.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산제물이 아니다. “은 헬라어로 자오인데 우리말 성경의 번역과 같이 부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살아 있는 생활또는 사는 생활을 하는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산제사거룩하게 생활하는 제물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이 말씀은 생활속에서 거룩하게 생활을 사는 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말이다. 이 말은 생활이 거룩해야 제물도 거룩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생활이 없는 사람은 예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생활이 다르고 가정생활이 다른 이중적인 생활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방주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안에서나 세상에서 주안에 거하고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살지 않기 때문에 교회생활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노아가 방주애서 건짐을 받은 조건이 무엇인가?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의인은 여자의 후손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 곧 구원받은 사람이다. 의인은 교회만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노아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했다 곧 세상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세상사람에게 흠이 잡히는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결함이 중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살지 못한다. 방주에 들어가는 자격이 의인 곧 구원받은 사람이요 세상에서 흠이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만이 참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다녀도 참된 교회생활이 아니라 거짓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교회생활은 교회에서나 집에서나 직장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주님을 모시고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는 그와 같은 생활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방주에 들어가서 육신을 멸망시키는 여러 가지 재앙으로부터 피하여 가는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것이 방주의 은혜이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면서도 형통하지 않고 여러 가지 재앙을 당하는 이유가 참된 교회생활인 방주의 교회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교회안에 방주의 은혜가 유행어가 되다 시피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어느 성도는 뇌혈관에 이상이 와서 병원으로 가다가 괜찮아 졌다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그날 밤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다음날 몸에 마비가 오고 심각한 이상이 와서 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그다음 주일에 멀쩡한 모습으로 교회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다 놀래게 하였다. 어느 집사님의 여섯 살 난 아들은 차도에서 달리는 트럭에 관자놀이 부분을 크게 부딪혀서 인도로 나가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병원에 가서 검진을 했는데 아무런 이상도 없이 온전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트럭의 번호판은 찌그러졌고 기사는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운전을 하지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한참을 길에서 있었다고 한다. 어느 집사님은 아버지가 오늘 내일한다고 기도해 달라고 해서 기도를 했는데 연노하신 그 분이 일주일만에 일반병실로 옮기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주일후인 엊그제는 퇴원을 했다. 이런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주님이 모든재앙에서 건져주시는 방주의 은혜가 교인들의 입에 회자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서 노아와 같이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살고자하는 거룩한 욕구들이 교인들가운데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처럼 뜬금없는 의식과 교회일 그리고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없는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를 드리고 사는 것이 교회생활이 아니다.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생활을 살고 세상사람들에게 흠잡을 것이 없는 인격과 행실의 거룩한 생활을 살아서 참된 교회생활을 할 때에 성경에 기록한 모든 복이 임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세상에 임하는 모든 저주와 재앙으로부터 건져주시는 방주의 은혜가운데 사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심이 임박한 이때에 그렇게 참된 교회생활을 하는 이들이 처처에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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