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를 다시 해야하나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질문조차도 외면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전도를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은 맞지만 이전에 하다가 그만두고 실패한 것들에 대한 트라우마(정신적 상처)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냥 주님의 뜻이나 소명, 지상명령등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산지가 오래되다 보니까 그런대로 전도하지 않고 교회생활을 하는 생활에 적응이 된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세상과 구별된 생활도 살지 못하고 그렇다고 한편으로는 세상에 빠져서 타락한 생활을 사는 것도 아니니 이와같은 영적인 중립지대에 살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미워하지 않으시리라는 막연한 위로를 받고 사는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 주님의 현실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주님은 이와같은 나의 생활 곧 주님의 뜻대로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생활에 동의하실수 있으실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고 주님에게도 확실한 답을 들어야하는 시점에 와있는 것이 분명하고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의 영적인 현실이 너무나 어둡고 암울하다 못해 앞이 안 보이는 흑암이 칠흑같이 둘러 있는 모습입니다. 말그대로 교회안에서도 의인을 찾기가 어렵고 구원받은 사람이 누구인지가 의심이 되는 이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도 아니고 교회의 현실을 마울이 로마서에서 잘 기록을 해 놓고 있습니다.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전에는 길거리에서 전도를 할 때에 교회밖에 있는 불신자들이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아우성을 쳤었는데 요즈음은 교회안에 있는 이들 거의 모두가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가 잘못된 것을 알고들 있습니다. 보는 것이 있고 듣는 것이 있지만 입을 다물고 서로간에 말을 아니할 뿐이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은 그가 주신 은혜와 그가 가르쳐 주신 그의 뜻때로 살기를 원하는 경건하고 진실한 자들을 찾으십니다. 생각이 없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영혼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확신하는 구원받은 의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이 무엇인지를 진중하게 생각하면서 연약하지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순종해 가는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세상이 너무나 흉흉하여 진 것을 볼 때에도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주님의 마음이 너무나 급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자기 손으로 파리잡듯이 죽이는 일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인천에서는 십대의 소녀가 여덞살난 초등생을 죽이고 시신을 훼손하고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모습이며 남자가 여자를 죽이고 여자가 남자를 죽이며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성연애를 하는 자들이 연약해서 죄를 짓는 것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것을 공공연히 자랑하듯이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은 소돔의 타락상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고 또 그와같은 일들을 당하는 교회는 롯과 같이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그들을 회개시킬수 있는 거룩함이 교회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한수 더 떠서 그와같은 자들을 정죄하는 율법주의적인 일을 서슴치 아니하므로 교회가 앞장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하는 일을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와같은 현실안에서을 보면서 롯과 같이 고통만하고 의로운 심령을 상하고만 있다면 교회는 롯과 같은 최후를 당할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벧후 2: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벧후 2: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이렇게 가다가는 소돔의 멸망같은 하나님의 진노가 이땅에 아니 떨어진다고 아무도 장담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진노하시기에 충분한 극단적이고 엽기적인 흉악한 죄악들이 이 땅의 처처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들은 차치하고라도 교회는 세상을 죄의 심판으로부터 건지고 영혼들을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가 힘이 없어 이일을 못한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받은 성도는 각자 하나님앞에서 이와같은 세상의 영혼들에 대한 부담과 책무를 받아가진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명받은 사람들입니다. 노아와 같이 멸망해가는 세상의 한영혼을 위해서라도 구원의 방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노아시대에 한사람도 노아의 복음전함을 듣지 않았으나 노아는 최소한 그의 가족들을 하나님이 홍수에서 건져 주시는 복을 받았습니 이와같은 일은 우리가 그나마도 전도할 때에 내가정 내 자식이라도 죄악의 홍수에서 건짐을 받는 은혜를 받을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현실속에서 우리는 머뭇 머뭇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유사 기독교인이 아니고 교회만 다니는 허울 좋은 종교인이 아니고 참성도라면 주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건지는 일을 날마다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복음전함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그이유를 하나씩 하나씩 짚어 보는 시간을 가짐으로 추수할 일군이 없어서 안타까워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추수하는 날의 시원한 냉수와 같이 해드리는 충성된 사자(메신저-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이와 같은 충성된 전도자만이 폭염같은 날씨에 얼음냉수와 같이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도 천하를 잃어버려도 그와는 바꿀 수 없고 잃을 수 없는 한사람의 영혼에 목말라 하시며 주님의 마음을 얼음냉수와 같이 시원케 해주는 충성된 사자(메신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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