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 ㅇㅇㅇ 목사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느 전도사님이 나에게 요즈음 설교를 잘해서 목사들에게까지 인기가 있는 목사라는 사람에 대하여 질문을 했다.


"예 나는 잘 몰라요"


그런데 그 분에 대해서 알아 보니 사실 인기 있는 설교자들의 공통점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설교를 하는 것인데 그분도 딱 그런 분이었다.

공감을 국어 사전에서 찾아 보면 남의 감정이나 의견이과 주장에 자기도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공감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공감을 하는 차원에서 끝난다면  그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공감이라는 것은 사람이 말하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하는 사람이 먼저 하나님께 받은 영감을 가지고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사람이 설교자가 주께 받은 영감과 동일한 영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된다.

그래야 그 말씀에 순종도 할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설교는 공감이 아니라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


교회안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사라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없어지면 하나님이 어느 누구에게도 말씀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영감있는 설교자들이 교회안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자리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설교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쓰시는 설교자가 아니라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사람들,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그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을 하고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로 설교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런 사람이 옛날에도 있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 관하여 이렇게 제자들을 경계하셨다.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 경계했다.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는 입술의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교인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주를 따르는 생활과 인격으로 하는 것이다.

그 생활과 인격은 주를 본받고 닮는 것이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바울은 자기를 본받으라고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본받은 자들에게 너희를 본받은 자를 보여달라고 했다.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면 생활이 없는 설교는 무엇이 되겠는가?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을 따라가라고 했다.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이십여년전에 훈련을 받은 어느 집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던 고백이 생각이 난다.


"저에게 주님이 다시 교회를 선택할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설교를 잘하는 목사님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목사님의 교회를 선택하겠습니다"


공감은 사람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영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공감은 쉬이 목마르지만 영감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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