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2일 월요성경학교 강의 증에서

강의 이유빈 장로
정리 고병훈 집사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 눈이 멀어 있다.
그래서 교회마다 교회성장에 대한 프로그램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S..., G..., D..., 그리고 율법주의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한국교회에 들어와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은 교회 성장주의와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에 포함 되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교회안에 들어오는 이유는 진리가 메말랐기 때문이다.

70년대만 해도 교회 어른들이 신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집사님 권사님들이 다 걱정을 했다. 저런 아이가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면 어떡하나 믿음도 없고 말씀도 모르고 그렇다고 성경을 배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걱정들을 했다.

지금도 신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보면 성경을 모르고 신학교를 가는데 신학교에서 깊이 있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깊이있게 가르쳐 주지도 못하지만 학점 만 따면 졸업이 되고 각 교단에서 정해진 과정 만 이수하고 시험을 합격하면 목사 안수를 준다.

이렇다 보니 목회를 하면서 이런 저런 세미나에 몰려다니는데 이유는 목회가 안됨으로 인해 목회를 배우기 위해서 찾아 다니는 것이다.

의사는 의과 대학에서 배워진 것으로 부족하고 환자에게서 배워진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의사가 병을 잘 고친다. 경험이 없는 의사는 진단도 잘 못하고 병 고치는 것도 서툴러서 의료사고를 내기도한다.

이처럼 목회도 신학교를 나온 것으로 만은 안 되고 교인들에게서 배워져야 한다.
전도도 교회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에게서 배워져야 한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반박을 들으면서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이 사람의 가치관은 이런 것이고 이 사람은 십자가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구나! 라는 것을 그들에게서 배워지고 변론거리가 내 안에 생기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목회를 잘하는 사람은 목회를 어디에서 배웠는가 하면 심방 가서 교인들에게 배운 사람이다. 또 심바을 가서 상담하면서 배워지는데 상담이 안되는 목회자들은 교인들과 분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제대로된 목회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양때의 형편을 두루 살피고 소떼의 형편을 두루 살피라는 말은 접촉을 하라는 말이다. 지금 교인들의 상태가 어떤 가운데 있는지 그것을 항상 내려다 보고 들어다 보며 통찰력이 있는 목회를 해야 하는데 엘리 제사장과 같이 눈이 멀면 절대로 목회를 할 수가 없다.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가 잘 먹고 있는지 혹시 먹지 목하는 양이 없는지 탈이 난 양이 없는지 물을 마시지 못하는 양이 없는지를 수시로 돌아봐야 한다. 목자는 양떼가 먹을 때인지 마실 때인지 누울 때인지 쉴 때인지 목자는 이것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양 하나 하나를 다 보면서 어떤 양이 먹지 못하는지 어떤 양이 자라지를 않는지 어떤 양이 힘들어하는지 그것 다 아는 것이 목자다.

정상적인 목회를 하면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분명하다.
정체 상태에 있다는 것은 반드시 영적으로 내적으로 외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또 이단이라든가 거짓 선지자 들에게 빠졌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교회성장주의는 냉정하게 말하면 사악한 죄악이며 이단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를 크게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영혼을 크게 하고 영혼을 성장시켜야 진정한 교회이지 교회를 크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교회성장은 양을 잘 길러서 양이 성장이 되고 살이 찌면 그 양이 새끼를 낳아서 양 무리가 많아지게 되는데 이것이 진정한 교회성장이다. 목표는 양을 성장을 시키는 것이 목표다. 그 양을 성장시킨 결과로서 교회가 커질 수도 있고 교인들이 많아 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전도해서 교인을 늘리려고 하는 것도 잘못 된 것이다.
전도는 교회를 부흥 시키는 수단이나 방법으로 이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 사랑의 결과이며 교인들 심령이 부흥된 결과로써 나타나는 행위로서, 전도가 되어지고 교회가 성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교회성장주의자들은 시간만 있으면 이만이천을 부르짖는다고 한다. 이만명의 교인들과 이천명의 평신도 사역자들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숫자가 기드온이 돌려보낸 이만이천과 일치하는지 모르겠다.

기드온이 돌려보낸 이만 이천은 용사로서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다.
삼만 이천 명 중에 두려워 떠는 사람, 연약한 사람, 싸울수 없는 사람,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 전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 이만 이천명을 돌려 보냈다.

그리고 만 명만 남았다. 그리고 이 중에서 하나님이 300명을 고르고 9700명은 돌려보냈는데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바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두려워 떠는 사람도 아니고 연약한 사람도 아니고 힘 없는 사람도 아니고 전력이 없는 사람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돌려보내 졌다. 이유는 그들의 중심이 하나님과 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백 명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하나님과 중심이 합한 사람들이다.
이 9700명은 사람이 볼 때는 훌륭한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볼 때는 쓸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교회안을 보라 영적인 전투력을 갖춘 교인이 얼마나 되는가? 그런사람들이 존재하기나 하고 있기는 한 것인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란 인격들이 있는가?

본인도 교회에서 칭찬 받고 박수 받을 때는 몰랐는데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9700명에 속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는 눈이 있고 교인들이 보는 눈이있다.
사람이 보는 눈이 있고 기드온이 보는 눈이 있다.
하나님이 보는 눈과 기드온의 보는 눈이 다르다는 말이다.

기드온이 볼 때는 쓸 만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하나님 볼 때는 쓸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저쪽에는 이십 만 대군이 쳐들어오는데 이만명 가지고도 안될 텐데 하나님이 9700명을 돌려 보내버리는 것이다.

목회는 지름길이 없다. 한 사람씩 한사람씩 변화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여러 가지 방법이나 교회성장이론 가지고 안된다.

교회성장주의가 이렇게 급격히 대두된 환경이 무엇인가?

교회는 거룩함을 상실하고 교인들의 인격의 질이 떨어진지가 오래되니 교회는 세상의 빛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된지가 오래 되었다. 한때는 전도를 하려고 애를 쓴적도 있었으나 행실이 온전치 못한 교인들이 수두룩하니 전도가 될리가 만무한 것이다.

밖에서 유입이 되는 회심자는 줄어들다가 거의 없어진 상태에서 교회를 하려는 이들이 눈을 돌리는 곳이 결국은 기성교인들을 빼앗아 오는 방법외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남의 교인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가지 프로그램과 교육적인 메리트 육신적으로 매력을 주는 체육관이나 수영장 시설들을 갖춘 교회시설의 확충 친절교육과 안내프로그램의 개발 육신적인 교인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부담을 주는 전도라든가 교리의 사족화 기독교 교리의 수준을 낮게 만들어 세상적이고 육적인 교인들의 눈높이에 맞춘 교제들이 개발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 아닐수가 없다. 이를 테면 복음을 한마디도 전하지 못하는 노인학교를 세워서 운영을 하는 것도 결국은 교인하나 얻기 위한 바리새인들의 눈물어린 노력의 일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인들에게 프로그램에 참여를 강요하고 나선것이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가 한국교회에 성행하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거의 모든 교회가 행위를 요구하고 가르친다. 봉사해라 헌금해라 전도해라 성경공부해라 모임에 와라 등등이 전부 행위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인위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있어서는 성령도 필요 없고 십자가도 보혈의 능력도 필요가 없다 저들에게는 인위적인 노력과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독려하고 행위를 강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헌금을 강요하는 일들이 더 극단적인 방법으로 무지막지하게 벌어지고 있어 연약한 교인들로 교회를 떠나가게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강단에서 사랑하지 않으면 지옥간다. 봉사하지 않으면 지옥간다. 전도하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울산에 어느 목사님이 사랑하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하자 어떤 권사님이 목사님에게 질문을 하는데 로마서 4장에 보면 믿으면 구원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목사님은 왜 사랑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말씀하냐고 질문을 하자 목사님이 당황을 했다는 것이다.

교인들은 말씀을 주면 말씀 준것 대로 성경에 있으면 있는 대로 알지 그 이상은 모른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목회를 하기 위해서,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사랑하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교인들이 혼란이 온 것이다.

그리고 믿는 사람이 자살하면 지옥간다고 말한다.
미국에 전도훈련받은 아주 똑똑한 박 집사님이라고 있는데 이 집사님은 믿는 사람이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사람인데 나에게 질문하기를 “예수 믿고 자살하면 지옥갑니까? 안 갑니까?‘ 라고 물어오는데 나는 그 말을 듣자 마자 ”이것 봐!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 해 주셨는데 우리가 구원 받고 나서 행위를 한 번 잘못 한 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무효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라고 말을 하자 이 똑똑한 집사가 단번에 말을 알아듣고 “장로님 알았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다.

(렘 31:3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은 하늘을 측량할 수가 없고 땅을 탐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행위를 인해서는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을 버린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못한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적은 없다.
우리가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행위로는 하나님을 배반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우리를 버리지 않는 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행위를 용서 해 주시는 분이시고 그 행위를 고쳐주시는 분도 시기 때문이다.

행위의 여부에 따라서 버리고 안 버리고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여부로 인해서 버리고 안 버리는 것이 결정이 된다.

아주 오래 주전에 전도 훈련을 받은 권사님이 상담을 해오는데 아버지가 충청도 어느 시골에서 목회를 했는데 목회를 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60세쯤에 조기 은퇴를 해서 집에 있는데 이 권사님이 아버지에게 오늘 죽으면 천당 갈 확신이 있냐고 했더니 성령을 거스리는 죄를 지어서 천당을 못간다고 대답을 해서 아버지에게 뭐라고 해야 될지를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분에게 해 준 말 한 마디가 성령을 거스렸다는 것은 믿게 하시는 성령을 거스리는 것을 말하고 믿지 않는 죄를 말하는 것이고 예수를 못 믿게 하는 것다. 이유는 성령은 우리를 믿게 하시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옥가는 것은 간음해서, 행위를 잘못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리 믿지 않기 때문에 가는 것이라고 말을 해주었다. 그러자 이분이 금방 알아듣고 얼굴 밝아져서 돌아갔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고쳐주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복음이 없다. 행위를 강조하고 율법을 강조하는데 율벌은 죄를 깨닫는 것이다. 율법은 행위를 요구하는데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를 이 육체가 감당 할 수가 없고 이룰 수가 없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육체 가지고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지 율법대로 행하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은 내가 열심히 행하고 일하고 돈 벌고 장사해서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자가 되면,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내가 그의 양이되면 내가 절대로 부족함이 없다. 내가 수고해서 땀흘려서 노력해서 싸워서 다투어서 이겨서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기 때문에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나를 인도하시고 먹이고 마시우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 역사하신다는 말이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지팡이와 막대기는 밖을 향해서는 사자나 곰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물리치는 도구가 되지만 안을 향해서는 양떼를 몰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바로 잡기도 하고 징계도 하는 것이다. 같은 지팡이를 가지고 양을 해치려는 짐승들을 물리치고 같은 막대기를 가지고 하나님이 그를 향해 치시는 것이다.

이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신다는 것은 내가 매를 맞아도 내가 아픔이 있어도 그 결과는 하나님이 나를 편안하게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렇게 주님이 함께 하시고 나를 먹이시고 나를 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승리 생활을 위함이다. 원수를 이기는 승리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승리생활의 결과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시편기자는 무슨 비밀을 가르쳐 주려는가 하면 생활의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대단한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 묻지 않은 믿음을 요구하신다.
주님께 받은 그대로, 바울이 가장 걱정하는것은 순수한 믿음에서 떠나 부패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기드온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이 하나님인 줄 알았다.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믿었지만 수 많은 바알 선지자와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이 하나님인 줄 알았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나서 그가 밤에 바알 신상을 다 깨어버렸다.
기드온은 기본 적으로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밀을 타작 할 때도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서 빼앗길 까봐 포도즙 틀에서 밀을 타작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후에 믿음을 가지고도 두려워서 밤에 바알들을 다 깨어 부수었다.

다음날 아침에 백성들이 바알신상을 깨어 부순사람이 누구냐! 잡아 죽이자고 하자 기드온의 아버지가 누가 바알과 다투겠느냐! 진짜 바알이 하나님이면 이 바알 신상을  깨어 부순 그 사람을 하나님이 직접 벌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하자 이 말을 옳게 여기고 돌아갔다. 그 만큼 바알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시대였다.

이스라엘백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여겼다.
이러한 것이 다른복음이요 다른 하나님이요 다른 예수인 것이다.
똑 같이 예배를 드리고 똑 같이 찬송하지만 진짜 예수에게 찬송하는 사람이 있고 진짜 예수를 믿고 진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다.

같이 예배를 드려도 다른 예수를 찬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욕심 채워주는 예수를 찬양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날 부산을 갔다 오는데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자기 좋은 것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동물적인 기도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동물은 먹을 것 주면 좋아한다. 이런 것 감사하는 것은 동물적인 감사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의 나라를 구하고 그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구하고 하나님과 살기를 구해야 한다.

어린 자녀에게 자전거를 사주면 자전거를 기뻐한다. 자전거를 사준 아빠를 기뻐하는 것이아니라 자전거를 기뻐한다. 이것이 부패한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에서 더 지나서 자기를 주기를 기뻐하시고 하나님 자신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기를 기뻐하시고 그의 얼굴 빛 비추어주시기를 기뻐하시고 그의 임재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141.2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