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모든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이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엡2:3).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의 신앙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인식, 그리고 죄에 대한 통회와 자복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죄인은 무엇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또 죄인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다. 그래서 성경은 범죄한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그 죄를 고백하라고 명하신다. 따라서 죄의 자백이 없는 회개란 있을 수 없다. 물론 회개 없는 자백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있을 수 없고, 믿음이 없는 행함이 있을 수 없음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자백 없는 회개는 공허하며, 회개 없는 자백은 맹목적이고 무의미하다.

 

죄인은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죄를 용서받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회개가 죄의 용서의 궁극적인 원인인 것은 아니다. 죄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베푸신 자가 회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회개해서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회개하여 용서받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의해 십자가의 대속에 대한 믿음이 주어졌을 때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용서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행위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의해 주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느냐 아니면 사적으로만 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진실로 회개했느냐가 문제이다. 즉 자신의 죄를 아파하며 진실로 뉘우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고백했느냐가 문제이다. 죄의 고백에 앞서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죄에 대해 통회하는 심령이라는 말이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 죄를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개적인 죄자백은 바로 그것, 죄에 대해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하다. 따라서 통회하는 마음이 없는 죄의 자백은 자백이 아니다.

 

따라서 공개적인 죄고백과 관련하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 거쳐야 할 의식이라거나 죄를 용서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했느냐 아니냐가 죄를 용서받느냐 못 받느냐의 기준이 절대로 아니라는 말이다. 진실로 죄를 뉘우치고 고백했다면 그것이 사적으로 하나님에게만 했다 하더라도 주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따라 죄를 용서받는다. 또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해야만 완전히 회개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참된 회개의 기준이 공개 죄자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개적인 죄의 자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 용서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거룩한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성화(聖化)의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공개 죄자백은 로마 카톨릭의 고해성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카톨릭의 고해성사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거쳐야 할 의식으로서 죄의 자백으로 인해 가져올 수 있는 종교적이고 인간적인 부담을 고려한 제도이다. 그것은 죄를 은밀하게 고백하게 하고 또 고백한 죄를 은밀하게 용서받았다는 인간적인 위로와 종교적인 평안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위로부터 내리시는 주님의 위로와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평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공개 죄자백은 이미 은혜로 사함 받은 죄를 속죄의 은총 가운데 기쁨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즉 고해성사는 죄사함을 얻기 위한 수단이지만, 공개 죄자백은 죄사함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공개 죄자백의 의미와 그 영적인 유익함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공개적인 죄자백은 속죄의 은총을 베푸신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다. 사람들 앞에 자기의 죄악들을 고백하는 것은 분명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죄들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로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그래서 그 죄로부터 해방되었음을 확신할 때, 사함 받은 죄를 사람들에게 고백하는 것은 그 죄를 씻어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고백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둘째, 공개 죄자백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자기의 수치스런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다. 죄인이라 해도 그 죄가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사람은 교만할 수 있지만, 자기의 죄가 공개된 사람은 교만할 수 없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 의해 들통난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아파하여 버리기 위해 스스로 고백한 사람의 경우에는 바로 그 죄로 인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겸손은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감싸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죄악과 실수를 용서할 수 있다.

 

셋째, 공개적인 죄자백은 양심을 자유케 한다.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함으로 회개했다 해도, 양심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받기란 쉽지 않다.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다시 동일한 죄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 그러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하고 죄의 줄을 끊을 수 있다. 공개적인 죄자백은 습관적인 죄를 제거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가 영적인 힘을 발휘하듯이 죄의 고백도 그와 같은 힘이 있다. 그것은 곧 죄를 끊는 힘이다.

 

넷째, 공개적인 죄자백은 때때로 주님을 증거하고 전도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한다는 말은 죄를 열거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용서해주신 죄를 말하는 것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자백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자기가 지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사함 받은 죄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즉 “주님은 나의 이런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당신도 그 주님을 믿기만 하면 나와 같이 죄사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복음을 자연스럽게 증거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섯째, 공개적인 죄자백은 다른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친다. 사함 받은 죄를 자백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죄의 확신 가운데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사람을 보면서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도 거리끼는 죄들로부터 자유함을 받고자 하는 영적인 욕구를 불러 일으켜 진심어린 회개를 하게 하기도 한다. 부흥의 역사 가운데 진행된 계속적인 공개 죄자백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죄자백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자백이 이어지는 현상을 단순한 분위기로 치부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인간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죄악이다. 단순한 분위기에 이끌려 자신의 추악한 죄악을 들추어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여섯째, 공개 죄자백은 성도의 거룩한 삶의 과정이다. 주님의 말씀처럼 한 번 목욕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발은 계속해서 씻어야 한다. 날마다 씻어야 한다. 오래도록 씻지 않으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회개(悔改, repent)와 회심(回心, convert)은 다르다. 회심은 믿음으로 중생한 자에게 일어나는 일회적인 사건이지만, 회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것이다. 그리고 회심은 구원과 관계되지만, 회개는 성화와 관계된다. 물론 회심이나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칼빈(J. Calvin)과 아르미니우스(James Arminius)의 견해가 다르다. 전자는 신앙과 중생이 회심에 선행한다고 하지만, 후자는 회심이 중생에 선행한다고 한다.

 

공개적인 죄자백은 바로 회개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죄악 세상을 살아가는 하늘의 백성인 성도들이 항상 빛 가운데 거하면서 천국의 시민답게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 자신을 씻는 삶의 과정이 회개요 자백이다. 항상 주님의 밝고 투명한 빛 가운데 사는 성도는 자신의 죄를 숨길 수가 없다. 주님 앞에서 어떠한 죄도 숨길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도 자연스럽게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죄를 사람들 앞에 자백하는 것은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빛의 자녀로서 주님과 사람 앞에 투명하게 내놓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