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의 새롭고 놀라운 발견

 

우리 교회에 거룩한 부흥이 왔습니다.”

 

이번 여름 행사에 참석한 어느 교회 목사님의 말입니다. 여름전도여행 마지막 날 하루만 참석했던 어린이집을 하는 부부가 큰 은혜를 받았는데 이어 집중코스에까지 와서 은혜를 받고 남편에게 죄를 자백하고 교회 앞에 죄를 자백하여 그동안 죄에 눌렸던 영혼이 자유함을 얻고 가정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는 이번 집중코스에는 전에 없이 열심히 참석했으며 수요예배도 약 100km 쯤 되는 거리임에도 교인들이 차를 타고 와서 집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열심도 있었습니다. 시간마다 목 놓아 우는 은혜를 받으면서 특별히 그 교회 성도들은 새 신자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오래된 집사님은 큰 소리를 내면서 외식으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지난 이십 년 동안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일이었습니다. 여름전도여행이나 집중코스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자처럼 큰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그 집사님의 기도소리만 들어도 , 저분이 왔구나하고 인식할 정도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교회에서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집을 타 도시에 둔 다른 교회 성도가 와서 새벽마다 방언으로 크게 기도를 하는 바람에 그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이 집사님도 큰소리로 기도를 했는데 교회 앞의 빌라에서 112신고를 하여 경찰이 출동을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름전도여행 때만 해도 들리던 그 기도 소리가 집중코스 중간에 사라지는가 싶더니 종반으로 갈수록 아예 머리를 숙이고 울기만 하는 집사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교회에 돌아가서도 이전에 기도하던 모습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교회에서 사람의 눈에 잘 보이려고 외식했던 죄를 아파함으로 회개했습니다.

이번 집중코스는 산상수훈을 하고 시간이 남으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교회 생활인 마태복음 18장까지 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예년 같으면 천안에 있는 병원을 숙소로 잡아서 왔다 갔다 하느라고 시간 소비가 많았는데 기도 중에 주님이 독립기념과 앞에 펜션을 준비해 주셔서 새벽기도도 인도할 수 있게 되어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편해졌습니다. 첫날 저녁에 A4 용지로 40쪽이 넘는 프린트된 교재를 저에게 넘겨주면서 이범영 간사가 이렇게 방대한 양을 며칠 동안 하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웃기만 했는데 지난해 집중코스도 산상수훈을 했기 때문에 두어 시간 끝나고 이 간사에게 어떠냐고 물었을 때 확 달라졌습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첫 시간에 먼저 주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을 가지고 입을 떼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5:19)

 

오늘날 교회 안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는 생활도 없고 주의 말씀을 순종하지도 않고 목사가 되고 지도자가 되어 그 옛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자신이 행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가르치고 설교하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팔복을 가지고 시작해서 마지막 시간까지 열한시간을 팔복으로만 마치게 되었습니다.

팔복에 관한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말 그대로 최악의 번역입니다. 그것은 번역(繙譯)이 아니라 반역(反譯)입니다. 영어성경은 잘못된 번역이라도 우리말 번역만큼은 아닙니다. 우리말 번역은 사람의 심령이 가난하면 그 보상으로 하늘나라를 주는 것처럼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팔복이 아니라 여덟 가지 의무를 말하고 그 의무가 지켜졌을 때 하나님이 보상을 해주시는 것처럼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과 주님의 뜻과 마음을 다 망쳐 놓은 것입니다. 거기다가 하늘나라는 죽은 후에 가는 것으로 가르침으로 죽어서 가는 천국이 보상인 것처럼 가르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교회 안에 율법주의, 곧 행위주의가 판을 치고 하나님의 의 대신 사람의 의를 앞세우고 또 말씀을 알아도 머리로만 알고 하나라도 순종하지 못하는 영지주의자들이 가득한 이유가 설명되는 것입니다. 번역 자체가 잘못되었으니 그것에 의지하여 주석을 내놓은 사람들의 오류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일백 년 전에 다니엘 스텔레가 말한 대로 헬라어 시제를 고려하지 않는 주석 책들의 실상을 알면 그와 같은 책들은 다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한 말이 백번 타당한 말입니다.

팔복을 포함하여 산상수훈 전체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를 따라온 제자들에게 이제 주를 좇으며 사는 하늘나라의 생활을 어떻게 사는지에 대하여 하늘나라 생활의 오리엔테이션을 하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늘나라의 생활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what manner of life) 하는가? 예수를 믿고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사람은 이렇게 삶의 스타일이 바뀌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복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며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주의 제자의 여덟 가지 삶의 스타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이번에 강의한 팔복부터라도 하나씩 하나씩 바로 잡고 고쳐가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적어도 1700년 동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번역과 해석입니다. 이 말씀은 주의 제자들과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 알고 살았던 말씀입니다. 1700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34세기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가르치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들인 영지주의자들이 교회를 장악한 때부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지고(至高)의 복 최고의 복을 말하는 것으로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받은 영생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의 생활을 살게 된 복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복을 받아서 하늘나라의 생활을 살게 된 너희는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말씀생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5:3)

 

가난한은 헬라어로 프토코스이고 형용사입니다. “저희 것임이요에서 이요는 현재 be동사입니다. 그러므로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는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 들어가는 하늘나라요, 지금 사는 하늘나라입니다. 지금 하늘나라를 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영적으로 거지가 되고 게걸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영생복을 받은 사람은 영적인 거지(영적으로 게걸스러운 사람)가 되나니 그에게는 지금 천국(하늘나라)이 현재적으로 그의 것이요.”

 

2) 기도생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4)

 

애통하는은 헬라어로 펜데오이고 현재분사 능동태 동사입니다.

위로를 받을 것은 헬라어로 파라칼레로이고 미래수동태 동사입니다.

애통하는 것은 항상 현재 진행형으로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는 것은 애통해할 때 주시는 미래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영생복을 받은 사람은 항상 계속 애통해하는 사람이니 저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기도 생활의 복입니다. 앞서 영적인 거지가 되어 하나님께서 말씀을 동냥하듯이 주실 때 -“동냥하듯”이라는 말은 “은혜로”라는 말이다- 죄인이 되었을 때 육신으로만 살아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대로 도저히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애통합니다. 그 때 슬퍼하며 애통함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땅에서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의 말씀대로 몸이 움직이는 순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늘나라 백성들의 기도 생활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8:7)

 

바울은 밤낮 부르짖는 기도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딤후 1:3)

 

밤낮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지 않는 사람은 일순간이라도 사람의 위로를 구하는 자리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위로를 잃어버리는 속임수에 빠지게 됩니다.

 

3) 교회생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5)

 

온유한은 헬라어 프라우스로 형용사입니다. 길들임을 받는 집짐승에게 쓰는 말입니다. “받을 것임이요는 헬라어 플레로노메오로 미래능동태 동사입니다. 말씀 생활과 기도 생활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딤전 4:5)

 

말씀과 기도로 고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생활을 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에서 은 교회를 은유하는 구약적인 용어입니다.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는 플레로노메오로서 미래능동태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교회 생활을 상속받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나 교회를 상속받는 것은 꼭 능동태 동사를 씀으로 공격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취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영생 복을 받은 사람은 길들임을 받아서 교회생활을 상속 받나니

 

오늘날 교회를 다녀도 성경적인 교회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사는지 그 이유를 이 말씀이 밝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길들임을 받고 거룩해진 사람만이 교회의 설립자이신 하나님이 설계하신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며 교회 생활로부터 오는 사랑과 축복을 다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속죄생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6)

 

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로 명사이며, “주리고는 헬라어 페이나오”, “목마른은 헬라어 딥사오로 두 단어가 다 현재분사 능동태 동사입니다. 능동적으로 계속해서 주리고 계속해서 목말라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부를 것임이요콜타조로 미래 수동형 동사입니다. 그 뜻은 실컷 먹임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의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을 때 처음 받았던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의 의”, “십자가의 의를 말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처음 받은 그리스도의 의로부터 멀리 덜어져 감을 느낍니다. 그때 처음 받은 의에로의 강력한 회귀를 구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행동입니다. 그것은 속죄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복을 받아서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사람은 죄를 지을 때마다 손상된 그리스도의 의, 십자가의 의로 돌아가기 위해서 지은 죄를 사함 받고 씻김 받아야 합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함의 은혜를 받는데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픈 것이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하나님 자녀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영생복을 받은 사람은 처음 구원받았을 때에 받은 그리스도의 의에 주려하고 목말라하나니 저가 그 의로 만족할 것임이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영혼의 만족함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3:5)

 

5) 문제해결

 

말씀과 기도로 길들임을 받아서 교회 생활을 상속받아서 살며 날마다 속죄 생활을 하여 십자가의 의로 배불림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은 이전에 지은 죄로 인하여 내게 일어난 모든 문제를 가지고 주께 나아가 해결을 받는다. 그것이 불쌍히 여김을 받는 생활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7)

 

이 말씀을 우리가 누구를 불쌍히 여겨주면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라는 뜻으로들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긍휼히 여기는은 헬라어 엘레오스인데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자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번역됩니다.

 

영생 복을 받은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되나니 저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불쌍한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사람이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됩니다. 가난도 질병도 인생의 어떤 문제도 우리가 죄인으로 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왔던 문제들과 죄인으로 살면서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이 다 눈이 녹듯이 해결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눈꼽만큼이라도 사람에게 동정을 구하거나 불쌍히 여김을 받고자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살면서 부단히 사람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고 누가 나를 동정해 주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사람의 위로를 구했던 존재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100% 불쌍히 여김을 받는 생활이 영생 복을 받아서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아쉬운 말도 안 하고 사람에게는 동정을 구하지도 않는 하나님 앞에만 불쌍히 여김을 받는 영적인 자존심도 내포되어 있는 말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 와 문제를 해결 받았던 모든 사람들이 주님 앞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가버나움의 두 소경이나 여리고의 바디메오나 시돈의 가나안 여인이나 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습니다. 깨끗함을 받은 문둥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자기의 종이 중풍에 들어 고생하는 것이 자기가 주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이유라고 주님 앞에 나아와 고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렇게 내 문제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불쌍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을 보는 생활

 

말씀과 기도로 길들임을 받아서 교회 생활을 하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의를 회복하는 속죄 생활을 하고 문제가 해결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죄를 짓고 문제가 생기는 것이 자기의 마음의 더러움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더럽게 한 것들을 버림으로 마음이 청결하게 되고 마음이 깨끗하면 생활 속에서 어디서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아니하고 문제를 만드는 시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8)

 

마음은 헬라어로 카르디아이며 청결은 헬라어로 카다로스인데 형용사입니다. “볼 것임이요는 헬라어 호라오로 미래 중간태동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영생 복을 받은 사람은 청결한 마음을 가지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멀리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경우를 봅시다. 베드로후서의 롯에 관한 구절은 번역이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벧후 2:8)

 

여기서 상하니라는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동사입니다. 곧 롯이 자기의 영혼을 능동적으로 상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해야 옳습니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살면서 보고 듣는 것 때문에 불법한 행실을 행하여 자기의 영혼을 상하게 하니라

 

롯은 그가 보고 듣는 것으로 마음이 더러워져서 그들이 행하는 불법한 행실을 행하여 죄를 지음으로 자기 영혼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보고 산 사람들입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6:9)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7:1)

 

다윗도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16:8)

 

7) 하나님과 평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9)

 

여기서도 화평케 하는은 동사가 아닙니다. 헬라어 에이레노포이오스로 형용사이며 그래서 화평한 자로 번역을 해야 옳은 번역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영생 복을 받은 사람은 화평한 자가 되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요

 

화평한 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 화평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걸리는 것이 없고 눈곱만큼이라도 대치상태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친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즐기는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5:1)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구원받은 것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면 화평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생활을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이 주안에서 형통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 되어 모든 일이 형통하고 승승장구하는 생활을 살았습니다.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23)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1:22)

 

이삭을 찾아온 아비멜렉과 그의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과 같은 말을 합니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26:28-29)

 

이렇게 하나님과 화평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모든 일을 형통케 하심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세상 사람들까지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8) 열매 맺는 생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5:10)

 

여기서 핍박을 받는 자가 아니라 핍박을 받은 자입니다. “핍박을 받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코라는 단어는 부정사 완료분사로서 지금까지 쭉 계속해서 핍박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곧 이날 이때까지 핍박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에서 임이요는 헬라어 에스티인데 이는 be 동사 직설법 현재동사입니다. 지금 천국이 그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영생 복을 받은 자는 이날 이때까지 계속 핍박을 받은 자니 그에게는 천국(하늘나라)이 지금 현재적으로 그의 것이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1)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됩니다.

 

영생 복을 받은 사람은 나를 인하여 너희에게 욕을 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하는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5:12)

 

여기서 기뻐하고카이로이며 즐거워하라아길리아오로 미칠 듯이 기뻐하는 것을 말하는데 두 단어 공히 현재 명령능동태 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는 말은 미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다 명사와 관사 그리고 형용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 받는 상이 아니라 지금 하늘나라 생활에서 받는 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에서 핍박이라는 단어는 부정과거동사로 과거에 일회적으로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에 기뻐하고 미칠 듯이 즐거워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렇게 핍박하였었느니라

 

하늘에서 주시는 우리가 받는 상중에 가장 큰상은 무엇입니까? 열매를 맺는 기쁨입니다. 이렇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만이 열매를 맺는 큰 기쁨의 상급을 받는 것을 저는 지금까지 쭉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일 것은 6절에서 말씀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의, 십자가의 의로 배불릴 때에 성도는 그렇게 축적된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생활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더러움에 자기의 영혼을 방치하고 버려둠으로 핍박도 없고 열매도 없는 도저히 기뻐할래야 기뻐할 수 없는 종교생활을 하면서 기계처럼 교회를 다니고 온갖 스트레스로 침울한 가운데 교회 일을 하는 저주 가운데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번역과 그것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왜곡한 자들이 받을 형벌은 이루 말로다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왜 이런 번역을 하고 또 이에 따른 주석을 내놓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소경 된 것은 육체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그래서 그들의 모자란 -여기서 모자라다는 말은 하나님과 비교해서 터무니없이 모자라다는 뜻이다- 머리로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영지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율법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린 채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자리에 들어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하는 이들이 받을 형벌이 다른 이들보다 큰 것은 그들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기도 행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을 알고도 주님의 뜻대로 살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12:47)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한 사람들 중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생활도 없고 전도를 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도 전혀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학적으로 약해 보이는 요한 웨슬레나 찰스 웨슬레, 죠지 휫필드는 사람을 낚는 어부의 생활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 외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대로 전도하는 이들을 핍박하고 훼방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11:52)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님의 부르심이 있고 주님이 그의 부르신 제자들에게 오리엔테이션을 한 그대로 하늘나라의 생활을 살고 주님을 따르는 경건 생활이 충족되어야 주님의 명령을 따라 뭇 영혼들을 전도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의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집회가 끝나고 앞에 말한 교회에 거룩한 부흥이 왔다고 말한 목사님을 찾아갔더니 그 목사님이 칠판에 써놓은 여덟 가지 제목들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렇게 사는 것이 경건 생활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그는 눈물을 죽 흘리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154.7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