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모든 학자들은 단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이 말씀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치는 시험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지나간 세대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자랐다. 그것은 바치는 행위를 중시하는 율법주의로부터 나온 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위험한 말이며 본질에서 빗나간 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쳤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상숭배자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이삭을 번제물(burnt offering)로 드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지 않는다. 번제물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아들, 네 독자”(Take now thy son, thine only son Isaac, whom thou lovest)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만약 이삭이 죽는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가 그의 후손에서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도 이삭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구원의 후사인 이삭을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은 구원을 받는 것과 구원받은 후에 지은 죄를 속죄하는 것의 비중이 똑 같다는 말이다. 구원을 받지 못한 죄인은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한다. 구원을 받은 의인도 지은 죄를 속죄하지 않고 영혼이 더러워지면 하나님과 함께 살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이삭을 번제로 드렸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잡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났다.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내게는 원문에 없다. 다른 번역들에는 없는 것을 우리말 번역과 KJV 번역과 옥스퍼드 번역등 몇몇 번역에만 원문에 없는 내게라는 말을 끼워 넣음으로 이 사건을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헌신의 개념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이삭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이었으며 하나님은 번제물로 죄 용서함을 받은 거룩한 아브라함이 필요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말씀은 온 인류를 구원할 복음의 후사인 이삭이라도 번제로 드려서 죄를 용서받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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