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성경번역
땅의 소금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의 소금”이라는 번역은 성경원문자체를 훼손한 번역이다. 원문에 “땅의 소금”(호 할라스 호 게)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어 번역본들은 이 부분을 “땅의 소금”(salt of the earth)이라고 바르게 번역을 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주석가들은 그것을 세상의 소금이라며 해석을 달고 있다. 그 이유는 구약에서 말하는 땅이라는 단어의 성경적인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땅은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교회를 땅의 개념으로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신약의 교회는 하늘에 속한 교회이다. 그래서 신약교회를 말할 때에는 하늘이라는 말이 자주 쓰여진다. 그 반면에 구약의 교회는 땅의 교회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언약을 하신 것이다.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여기서 “네 자손”은 단수인 “제라”로서 메시야를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교회는 할례를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사는 땅의 교회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시면서 그 경계를 정해 주신다.
(창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 15: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창 15: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창 15: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땅을 언약의 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땅에서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살면서 구약교회의 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땅은 교회를 은유하는 예언적인 용어이다. 신구약을 통틀어 교회를 말씀하실 때마다 땅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교회가 땅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소금은 땅의 소금이고 빛은 세상의 빛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는 번역이다.
“너희는 교회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은 맛을 내는 것이다. 교회의 소금은 교회에서 맛을 내는 사람을 말한다. 그것은 교회안에 있는 '맛이 있는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인격을 닮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각 사람이 주님께 받은 은혜와 주님을 닮은 인격으로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간증이 있고 생활이 있으며 인격이 있는 것을 가리켜 땅의 소금 곧 교회의 소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누구를 만나면 만날 때마다 항상 새로운 간증이 있고 성도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영적인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 땅의 소금이다.
교회는 맛을 내는 성도들이 모이는 맛집이다. 세상의 맛집은 다른 식당과 비교해서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그리고 거기 오는 손님들을 기대하게 만들고, 즐기게 만들며,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맛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교회는 교회에 오는 사람들에게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주님을 닮은 인격들이 뛰어난 맛을 보여 주는 곳이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또 다른 사람도 다 저마다 주님을 닮은 인격의 맛과 향을 가지고 모이는 곳이 교회이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보고 듣고 대화할 때마다 은혜를 받는 곳이 소금이 된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이다. 주님은 “소금이 되라” 또는 “맛을 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을 따라가면 저절로 맛이 나는 인격이 되고 그 인격으로 사는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그 맛을 잃으면”은 “모라이노”인데 그것은 기억한다는 뜻이 있고 어리석게 행동한다는 뜻이 있다. 소금의 맛은 사람들마다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된(memory) 맛이 안 나오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맛이 없는 소금이다. 욥은 소금이 없으면 닭의 알의 흰자가 맛이 없다고 말한다.
(욥 6: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은 아무개 집사에게서 항상 받던 맛을 기억하고 있다. 또 아무개 장로에게서 나오는 은혜의 맛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기억 이하의 맛이 나오면 실망을 한다. 그러나 기억했던 것 이상의 맛이 나오면 즐거워하고 사람에게 그런 맛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래서 교회에 또 오고 싶어하고 자주 오고자 하며 할 수만 있으면 만나고 싶고 보고 싶어지는 것이 땅의 소금이 된 교인들이다. 같은 말씀을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막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성도는 교회의 소금이 되어서 서로 맛을 내야 서로 화목한 교회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그 맛이 서로를 끌어 당기고, 가까이 하게 되고, 사랑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교회가 으르렁 거리고 피차에 싸우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저마다 맛을 잃은 소금이 된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소금은 거룩하게 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출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레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겔 16: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성도들이 모여서 맛을 내는 것은 서로 거룩함의 영향을 끼치고 서로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의 소금의 중요한 역할이다. 소금이 된 성도들의 모임은 서로 대화도 거룩하게 하고 서로 언어도 행실도 깨끗하게 한다. 피차에 더러운 것은 입밖에도 내지 않음으로 모일 때마다 거룩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거룩한 모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이렇게 사는 것이 교회의 소금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땅의 소금” 곧 “교회의 소금”으로 살지 않고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주님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서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히운다고 말씀하셨다.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지는 것이다. 주님은 땅에 버려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 땅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밖에 버려지는 것은 땅 밖으로 버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밖으로 버려지는 것이다. 교회밖으로 버려지는 것은 교회에 적응이 안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맛을 잃은 소금은 교회에 적응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말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시점을 생각하면 주님을 따르는 데에 불성실한 사람이 곧 맛을 잃은 소금이다.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 잘 안 되는 사람은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교회안에 있지만 정상적인 교회생활이 안 되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다니지만 서로 맛을 내는 교회생활은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는 종교인들이 모이는 외식하는 공허한 단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밖에 버려진다는 것은 정상적인 교회생활 곧 영적인 교회생활이 안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예배당안에는 있을 수 있어도 주님의 교회안에는 없다.
“아무 쓸데 없어”는 “우데이스 이스퀴오”인데 “우데이스”는 “아무것도 아닌” “하나도 아닌” “절대로 아닌”이라는 강한 부정을 말하는 단어이다. 쓸데라는 뜻으로 사용된 “이스퀴오”는 “강하다” “능력이 있다” “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데이스 이스퀴오”는 절대적으로 힘을 잃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밟힐 뿐이니라”에서 밟히는 것은 “카타파테오”인데 카타는 철저히라는뜻이 있어서 짓밟는다는 뜻인 파테오와 합성이 되어 철저하게 짓밟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사람에게라는 번역은 섬세하지 못한 번역이다. 사람이라는 단어인 “안드로포스”는 여기서 복수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번역을 해야 한다. 주의 제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짓 밟히는 일은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수없이 많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의 죄인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맞지 않고 교회생활이 안되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경멸함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주님을 따라오는 제자생활의 오리엔테이션을 하시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제자들은 교회안에서 맛을 내는 “땅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땅의 소금은 당연히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주님의 말씀과 같이 땅의 소금이 된 성도는 교회에서 맛을 내는 생활을 산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에서는 빛으로 사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영적인 맛이 전혀 나지 않고 주님을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빛으로 살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세상의 죄인들을 감화시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안에서 성도에게 은혜를 주지 못하고 성도를 감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죄인을 어떻게 감화 시키겠는가?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교회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는 주를 따르는 제자는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착한 행실”이 있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그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행실이다. 그래서 그 행실을 본 세상 죄인들이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실이다. 오늘날 교회안에 착한 행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실이 교회안에서 그사람에게 칭찬이 돌아가는 일이 많이 있다. 그것은 세상의 빛이 되는 행실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행실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받아야할 영광을 사람이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사람이 교회의 소금도 되고 세상의 빛도 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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