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망이 없는 나를 찾아 오신 주님의 은혜

 

 

본문 : 5:1-15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5: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 들어가는 말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주님은 도저히 가망이 없는 죄인을 찾아 오셔서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 오늘 읽은 말씀에 주인공인 사람도 우리들과 같이 최악의 조건을 두루 갖춘 죄인이었다. 그는 모든 조건이 절대로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의 사람이었다. 그런 죄인을 찾아 오시기 위하여 주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유대땅을 두루 다니시는 중에 예루살렘을 찾아가셔서 베데스다 연못까지 심방하시고 그를 만나주시고 말을 걸어 주시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병을 고쳐 주시고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이 하늘보다도 더 높고 바다보다도 더 넓은 인간이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들의 형편이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삼십팔 년된 병자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죄인이지만 내가 알지도 못할 때에 하나님은 나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고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위하여 그 아들을 구주로 보내시사 나를 찾아 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나의 몸과 마음이 병 들어서 죄악가운데 불편하게 사는 저주의 인생을 건져 주시고 고쳐 주신 것이 그리스도의 재창조하심의 능력과 권능이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꼭 나의 모습이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절망적인 모습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사람답게 살수 있는 가망성이라고는 0.00001%도 찾을 수 없는 비참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람답게 살수 없었던 이유는 그의 병이 너무나 오래된 병이었으며 그는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천사의 기적을 기다리는 잘못된 믿음의 소유자이었으며 그는 자기를 못에 넣어 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불평을 하던 사람이었고 그는 병을 절대로 고쳐서는 안되는 안식일에 주님을 만났으며 그의 근본적인 인생의 문제는 죄를 짓고 사는 그리고 죄를 안 짓고는 절대로 살수 없는 죄인으로 이 땅에 태어 난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상고함으로 주님이 찾아 오셔서 고쳐 주신 삼십팔 년된 병자의 모습속에서 그보다 더 악한 내 모습과 그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를 받기 원한다.

 

 

2. 너무나 오랜 병

 

주님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가셔서 만난 이 병자는 병력이 너무나 오래 된 사람이다. 그는 삼십팔 년을 병상에 누워 신음을 하면서 인생을 다 보낸 사람이다. 그는 중풍병자이었는데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반신불수가 아니라 전신불수의 병자이었다. 몸의 반쪽만 마비가 온 것이 아니라 양쪽이 다 마비가 와서 스스로 몸을 옴짝 달싹도 하지 못하는 중병에 걸린 사람이다. 그리고 그때 당시의 일반인의 평균수명이 60전후라고 생각을 할 때에 그는 인생을 막 시작할 때인 이십대때에 병에 걸려 사람구실이라고는 해보지도 못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침을 오십년 이상을 놓으시고 많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명의(名醫)이신 장로님도 어떤 사람이 중풍에 걸려서 일년 이년만 지난 사람이 찾아오면 고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드시는 일을 나는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전신불수가 되어 삼십팔 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세상에 어떤 의사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깊은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은 고침을 받지 못하고 죽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각 사람이 너무나 오래된 죄인으로 살면서 몸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한 인격이 마비되고 마음도 마비되어 사랑이 안되고 용서도 안되고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이 전신불수가 되다시피 하여 일생을 살아 온 죄인들이다. 어떻게 보면 눈으로 보이는 몸이 병든 자보다도 더 악한 내적인 병에 걸려서 일생을 살아 온 것이다.

몸이 아픈 병보다 더 무서운 병은 마음의 병이며 마음이 병든 것보다 더 무서운 병은 영적인 질병인 죄의 병이다.

우리들도 그랬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고 병든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다가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사랑이 놀라운 것은 자기 자신도 포기한 죄인을 찾아 오시고 이세상 어느 누구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삼십팔 년된 병자를 찾아 오신 것이다.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거기 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삼십팔 년된 병자 한사람을 찾아 오셨고 그 한사람만 고쳐 주셨다. 같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다섯의 행각에 저마다 자리를 펴고 있었으나 주님은 이 한사람을 찾아 오시고 만나주시고 말을 걸으시사 상대해 주시고 그의 병만 고쳐 주신다. 그것은 토기장이가 흙을 가지고 마음대로 빗는 주님의 주권이다.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45:10)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것이 주님의 택하심이다.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주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은혜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사람이 받고 싶다고 주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받으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고 힘쓴다고 받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주셔야지만 받고 주님이 안주시면 못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날에 불쌍히 여기심을 받은 삼십팔년된 병자와 같이 오늘도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33:19)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날에 삼십팔 년된 병자만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은 것이다. 은혜를 받고 못 받고의 차이가 그것이다. 병고침을 받고 못 받고의 차이는 그것이다. 사람이 필요하다고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님은 거기 많은 병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은혜를 아니 주신 것이다. 주님이 필요로 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곧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주님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만이 오늘도 은혜를 받는 것이다. 교만한 자는 주님의 눈에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삼십팔 년된 병자같은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이 삼십팔 년된 병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신 나머지 그 아들을 보내사 만나 주시는 것이다.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날 주님의 눈에는 삼십팔 년된 병자외에는 아무도 보이지를 않았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내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구원을 받던 어느날 주님의 눈에 나만 보이는 동일한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5: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3. 비뚤어진 믿음

 

그러나 이 사람은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뚤어진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잘못된 종교인들의 영향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들의 말을 들어서 어느새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하나님을 기다리기 보다는 천사의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지 삼십팔년된 병자의 잘못된 믿음을 고쳐 주시는 것도 주님이 해주시고 그에게 믿고 순종하게 하시는 믿음을 주신 것도 주님이시다.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주님은 그사람 앞에 있는 주님을 믿게하는 믿음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를 구원해 주시고 고쳐 주신 것이다.

 

 

4. 사람을 구함

 

예수님이 삼십팔년된 병자를 보셨을 때에 그의 병이 벌써 오래된 것을 아셨다. 그 때에 주님은 그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질문을 하셨다. 주님은 그가 대답을 잘못할 것도 알고 계셨다.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불행히도 이병자에게는 산에서 내려 오실 때에 문둥병을 고침받은 문둥병자의 믿음만한 믿음도 없었다. 그는 주님앞에 엎드리어 주께서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수 있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이 이제 원하시기만 하면 자기의 문둥병이 더 이상 병이 아니라는 주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사람은 그런 믿음도 없는 사람이었다. 오랜 병과 절망속에서 낫고자하는 소망까지도 다 잃어버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절망이 소망을 삼켜 버린 형국이었다.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처음에는 자기 부모나 식구들이 천사가 물을 동하면 못에 넣어 주려고 자기 곁을 지켰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물이 동할 때에 힘써서 그를 먼저 물에 들어가게 하려고 애를 쓴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실망을 하고 고칠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자기를 떠나갔던 것이다. 이 사람은 고침을 받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거기 아직도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고침을 받아야 하는 절박감보다는 자기를 버리고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만 남다보니 하나님도 천사도 아닌 사람의 도움에 목이 말라있는 상태가 되어 바린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도 오히려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불평으로 엉뚱한 대답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보다 먼저 못에 내려가는 사람만 바라보는 경쟁심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비뚤어진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도 주님은 그런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셨다. 그런 그에게 그냥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이 사람에게 마지막으로나마 남아 있었던 것은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순종했다.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자기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무서운 병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해방된 것이다. 삼십팔 년동안 한걸음으로 옮기지 못했던 그가 삼십팔 년만에 일어나서 침상을 들고 걸어가게 된 것이다. 말이 삼십팔년이지 그동안 병상에 누워서 살은 것이 얼마나 지옥같은 생활이었던가? 그는 아마도 이날에 찾아 온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가슴이 터질 것같은 기쁨으로 뛰면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5. 병 고칠 수 없는 날

 

그러나 그 날은 병을 고칠 수 없는 날이었다. 유대인들의 말대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핀잔을 주었다.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그 사람에게 유대인들의 이 말은 얼마나 황당한 말이었겠는가? 하나님을 떠난 종교는 이렇게 황당한 것이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없는 종교는 이렇게 사람들의 아픔조차도 헤아리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아닌 기독교는 이렇게 한영혼의 아픔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은 한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병을 고쳐 주셨다.

 

(12:9)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2:10)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일로 예수를 죽이기를 도모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잃어버린 종교는 악한 것이다. 오늘날도 그와같은 일들이 교회안에 많이 있는 것을 본다. 병나은 사람은 하도 황당하여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하나님이 그아들로 말미암아 고쳐 주신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지 말라고 할 사람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네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는데 네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옳지 안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역행하고 반역하는 것이다. 그들은 눈이 멀어서 자기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것이 그날에 유대교에 속한 종교인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패역한 족속이기 때문이라고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셨다.

 

(12:2)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하나님이 없는 종교인들은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5: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들이 만약 그 중한 병자가 고침을 받은 사실을 보았다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치신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권능앞에 오히려 두려워 떨며 회개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함이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권능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된 것이다.

 

6. 죄를 지은 병

 

병이 나은 사람은 자기의 병을 고치신 이가 예수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믿음을 도우시기 위하여 다시 그에게 나타나 주신다. 그리고 그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신다.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가 삼십팔 년전에 자기의 인생을 흑암으로 몰아넣게 된 병을 얻은 것은 그가 범한 죄를 인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죄를 지으면 더 심한 것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권면하시면 그의 믿음을 세워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그에게 다시 나타나신 것은 이 말씀을 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이제는 주를 따르는 거룩한 생활을 살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우리의 병만 고쳐 주시고 문제만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고 불쌍히 여김을 받은 후에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병 나은 사람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오늘도 성령으로 우리안에 내주하시면서 어떻게 살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하나까지도 일일이 가르쳐 주심으로 믿음으로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병이 나은 이 사람은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나 주시자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당당하고 담대하게 예수를 사람들 앞에 고백한다. 왜냐하면 그의 병을 고쳐 주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들을 아예 찾아가서 예수님이 자기의 병으로 고치셨다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7. 재창조주이신 예수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가 세상의 구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하나님과 본체시다.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그가 사람들과 같이 되어 천사들보다 잠깐 못하게 하심을 받으신 것은 죄인인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시기 위하심이다. 그것을 성경은 재창조라고 말하는 것이다.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그래서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죄인을 구원하셔서 영생을 주심으로 사람만을 새롭게 하신 것이 아니라 만물을 새롭게 하신 것이다.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재창조의 능력으로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바다위를 걸으시고 문둥병을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오늘의 삼십팔년된 병자를 재창조하시고 각색병과 모든 병자를 다 고치시는 능력이 주와 함께 한 것이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나사로를 살리시고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것도 주님의 재창조의 권능이 역사한 것이다. 그 권능으로 오늘 삼십팔년된 병자가 고침을 받고 완전히 낳아 새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가 믿은 예수는 이와같이 재창조의 권능과 역사를 우리안에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사람이 되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8. 맺는말

 

주님은 이와같은 권능을 가지시고 하늘보좌의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그의 일과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이 나가서 말씀을 전할 때에 주님의 재창조의 능력이 제자들에게도 임했다.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힘없는 창백한 지식이나 말이 아니다. 주님의 재창조의 권능이 역사하는 말씀이다. 주안에 거하는 거룩한 주의 제자들에게는 지금도 이와같이 동일한 권능이 역사하는 것이다.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주께서 아버지께 가신지가 이천년전이다. 그 말은 그의 언약의 사자가 우리안에 보혜사로 임하신지가 이천년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지나간 이천년동안 이와같은 권능과 역사가 한결같이 나타나고 역사한 것이 아니라 많은 세월동안 방해를 받고 가로막혀 왔다. 그것은 유대인들과 같이 종교인들의 방해 때문이다.

오늘은 내가 그 종교인이며 방해꾼이 되지 않았는지를 철저하게 돌아보고 회개함으로 그런 사람이 되기보다는 오늘 병이 나은 사람과 같이 불쌍히 여김을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 되고 주를 찾지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하는 나를 찾아오신 그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사람이 되고 다시금 찾아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그를 세상사람들에게와 종교인들 앞에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아 가서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당당하게 고백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은혜를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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