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생각,바른해석
최근에 어떤 선교단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Back to Jerusalem)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나라의 법을 어기고 무리하게 사역을 하다가 반사회적인 단체로 낙인이 찍히는 일을 당하였다고 한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Back to Jerusalem”이라는 말은 성경에도 없는 말이요 전혀 성경적인 말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말이다. 왜 그런 말을 만들어 내었는지 그 동기는 알 수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지만 성경을 모르는 무지한 목사들과 교인들이 그런 캐치프레이즈에 넘어가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번역과 해석도 잘못된 것들이 많은 가운데 특별히 주의 재림에 연관된 종말론의 해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서 잘못되는 이유는 해석의 맞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훨씬 깊은 곳에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에 그 근원이 있다.
성경번역도 율법주의자들이 함으로 행위를 강조하는 식으로 번역을 해 놓았다. 그리고 해석도 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행하여 짐으로 행위를 권장하는 해석을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믿음으로 사는 생활과 인격의 실체가 없이 가정과 추정에 의하여 스스로도 책임을 질 수 없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오늘은 그 단체에서 주장하는 것 중에서 잘못된 것 하나만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땅 끝을 예루살렘이라고 말을 한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다시 도달하는 것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이유로 그들은 복음은 서쪽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과도 다르고 역사적으로도 책임을 질수 없는 말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서쪽으로만 간 것이 아니다. 스가랴는 세상의 영혼들을 살리는 복음의 생수가 서로만 아니라 동으로도 갈 것을 예언했다.
(슥 14: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복음이 서쪽으로 가는 서진(西進)을 한 것이 아니다. 패권이 서진을 한 것이고 문화와 경제력이 서진을 한 것이다. 패권을 따라서 선교사들이 파송이 되었으나 그들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본국의 앞잡이로 패권주의에 이용을 당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함을 받게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시대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상하이 외국인 거주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을 조직하여 내륙 깊숙한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사실은 선교라는 말도 개념도 잘못된 것이다.
“선교”(宣敎)는 글자 그대로 교를 선전하는 것이다. 종교를 선전하는 것이 선교라는 말이다. 전도(傳道)는 도를 전하는 것이지만 선교는 기독교를 선전하는 것이다. 전도는 예수를 전하고 증거하는 것이지만 선교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선전하려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종교적인 충돌이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보도자료에 의하면 앞서 말한 그 선교단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느 교회 교인들이 선교를 가는 것을 주선해서 목사와 교인하나가 죽임을 당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또 그들은 절에 가서 땅밟기를 하여 국민적인 공분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2014년에는 인도의 불교사원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찬양을 해서 국제적인 물의를 빚기도 했다고 한다.
중세기독교가 십자군 원정에 가서 죽으면 천당을 간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 일으킨 것과 같이 그들은 선교를 하면 상을 받고 복을 받는 다는 말로 열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지들을 이슬람이 차지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공분을 불러 일으킴으로 그것으로 뭉치고 또 그것을 다시 찾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예루살렘에 제3성전을 짓는다고 기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인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장소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지 못하여 불법한 자들의 손을 빌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 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보좌에 앉아 세상나라를 다스리신다. 다시는 제사드릴 필요가 없고 제물이 필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로마제국으로 하여금 그 성전을 돌하나도 돌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리신 것이다. 모세는 신명기 32장에서 그와같은 일들을 세세히 예언하면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기쁨으로 노래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망해야 그리스도가 세우시는 새 이스라엘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을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선교라는 말이 그렇듯이 오늘날 선교사들이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아니다. 항상 그래 왔듯이 교회에서 학교를 세우면 학원선교라는 말을 붙이고 교회에서 병원을 세우면 의료선교라는 말을 하지만 그들에게는 복음전도가 주가 아님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바울과 같이 기승전결이 예수인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오늘날 찾아보기 힘들다. 현지에 가본 사람들은 알지만 그들은 복음전도는 하지 못하고 선교라는 글자 뜻 그대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이슬람권에서 선교를 한다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이슬람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 이슬람은 요한계시록 9장에서 하나님이 요한을 통해서 예언한대로 이 세상에 나왔는데 그것은 극도로 타락한 기독교를 하나님이 징벌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은 기독교를 싫어하고 미워하여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자체가 기독교를 증오함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계 9: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계 9: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계 9: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6세기말에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태어난 무하메드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50년동안 전쟁을 일으켜서 기독교국가들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일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을 맞지 못한 사람들 곧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구원받지 못한 기독교인들이 무수히 희생되었다. 그들이 칼과 코란을 들고 코란이 아니면 죽음이라고 외쳤던 것도 기독교인들의 개종을 종용한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기독교하면 이를 갈고 죽이고자 하는 것이 무저갱에서 사단이 그 일을 하라고 내어 보낸 황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성도는 절대로 건드리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복음을 전하러 제자들을 보냈지만 교회는 2세기이후에 복음을 거의 잊어버리다 시피하고 교부철학자들의 변론과 교리적인 다툼만 가득한 교회가 되었다. 그들은 신학적인 변론을 가지고 교회를 수호하려고 하였으나 성령이 없는 교회, 복음을 잃어버리고 아가페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자기와 생각이 다른 교인들을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기독교 단체로 변해 있었다. 그 때에 모슬렘이 기독교 타도를 외치고 나왔을 때에 기독교지역인 크리스텐돔(Christendom)에서 사는 사람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되어 기독교 국가는 하나씩 하나씩 그들의 칼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유럽의 기독교가 동쪽으로는 다뉴브강 인접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스페인까지 정복을 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지금도 이슬람이 이와같은 DNA를 가지고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것은 그들의 태생을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로 그들에게 접근을 하면 100% 실패를 하는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접근했을 때에 아무런 무리 없이 받아 들이는 것을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필리핀등지에서 경험을 하였고 나는 비행기에서 사우디 왕족 중에 한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가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을 하는 일을 경험한 적도 있었다. 성령의 열매로 하는 전도는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들은 마태복음 24장 14절 말씀을 가지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면 그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을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말씀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기서 “세상”은 “코스모스가”(κόσμος) 아니다.
또 땅을 말하는 “게”(γῆ)도 아니다. “오이쿠메네”(οἰκουμένη)이다. 오이쿠메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로마제국을 말하는 것이다. 곧 로마제국안에 있는 모든 여러 종족들에게 복음이 증거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와는 달리 마가복음 16장 14절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천하”는 “코스모스”로 말씀하셨다.
(막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로마서에서 바울이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로마제국의 경내를 말한다.
(롬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땅끝까지”가 “호 페라스 호 오이쿠메네”이다. “페라스”(πέρας)는 장소와 일의 끝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는 말은 복음의 말씀이 로마제국의 경내 모든 끝까지 다 전파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의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말씀에서 “끝”은 “텔로스”(τέλος)이다. 텔로스는 한계로서의 도달점이며 이 말씀의 앞뒤 문맥과 함께 보면 예루살렘의 멸망의 끝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의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 10장에도 나온다.
(마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나중까지가 “에이스 텔로스”이다. 이것이 세상의 끝이 아닌 것은 그 다음 구절이 증명을 한다.
(마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 모든 동네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은 주님은 이땅에 오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전도를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마 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하여 복음이 로마제국의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 그제야 끝이 오겠다는 말씀이다. 바울이 3번의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로마제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다 제공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다고 “오이쿠메네”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 “끝이 오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교회 곧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루살렘에 아니 가도 괜찮다. 지금 생활의 현장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예수가 인격과 생활에 보여 지는 증인의 생활을 살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주님이 오신다는 거짓말을 다시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미 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좋은 말이지만 그것으로 주님을 빨리 오게 한다는 교만한 말도 하면 안 될 것이다. 주님이 오시고 안 오시고와 주님이 빨리 오시고 늦게 오시는 것을 우리의 열심과 행위로 결정을 지으려는 것이 교만한 율법주의자들의 행태인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도나 선교라는 미명아래 뭇사람들이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복음은 전하지 않고 기독교를 선전하고 교회를 선전하는 일을 그만두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어디를 가든 누구든지 나를 보고 저절로 예수를 믿는 역사가 나타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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