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하지 말것

 

 

본문 : 15:3-7

 

(15: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15: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 들어가는 말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다. 교회는 교인들의 죄를 고치는 곳이다. 주님은 의사가 되신다. 교회와 병원은 공통점이 많다. 병원은 사람들의 몸의 병을 고치는 곳이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의사에게 자기의 병을 숨김없이 말해야 하며 병원은 병을 말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곳이다. 그래야지만 의사의 도움을 받아서 병을 고칠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더더욱 자기의 죄를 말하기를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죄를 내 놓고 불쌍히 여김을 받고 용서받는 곳이 교회이며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수 있는 곳이 교회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무엇이든지 우리를 죄인이기 때문에 사랑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다. 의사도 자기를 찾아 온 환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가리어 가면서 치료하지 않는다.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그가 병들어 자기를 찾아 왔을 때에 의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환자의 병을 고쳐 주는 것이 인술이다. 의사는 환자가 도덕적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고 묻지도 않으며 병든자를 불쌍히 여기고 고쳐 준다.

하나님은 이세상의 죄인들이 어떤 죄인이든지 무슨 죄를 지었든지 말로 다할수 없는 흉악범인지 파렴치범인지를 막론하고 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사 십자가에 죽기 까지 사랑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구원해 주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유일하신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어느 누구든지 무슨 죄든지 불문하시고 용서를 하시는데 교회에서 가정에서 죄인들이 같은 죄인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가정은 사랑이 있는 곳이고 사랑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죄가 드러났을 때에 상대방의 약점을 잡았다는 듯이 공격하고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도 가정도 용서가 없고 사랑이 없는 지옥과 같은 곳이 되는 것이다.

만일 그 가정이 예수를 믿는 가정이고 교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반드시 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그와 같은 잔인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이 죄인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함으로 교회가 사랑이 없고 가정이 사랑이 없음으로 교회도 가정도 영혼들이 살수 없는 가정이 되어 죄를 이기지 못하는 육신을 가지고 살면서 사랑도 받지 못하고 고침도 받지 못하며 죄를 숨기는 것이 최선인 생활을 함으로 영혼을 죽이는 일을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만드시고자 하신 가정과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살펴 봄으로 큰 은혜를 받고자 한다.

 

 

2. 소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

 

가정은 죄인들이 사는 곳이며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산다. 죄를 안 짓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도 죄를 짓지만 사람에게도 죄를 짓는다. 그모든 죄는 하나님께 짓는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한다.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또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에게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안 그렇지만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때에 용서를 해주지 않는 것을 두려워 하여 사람에게는 죄를 감추기가 쉽고 용서를 구하지 않고 살기가 쉽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도 연약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죄가 드러날 때가 있고 또 스스로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죄를 용서하기 보다는 그 죄를 비방하고 책임을 묻는 일을 함으로 죄를 자백한 소자들이 실족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교회나 가정에서 죄를 자백하기가 꺼려지고 사람들이 무서워서 죄를 자백하지 못하고 감추고 살기가 쉽다. 그결과 은혜를 잃어버리고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가정과 교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다시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또 다른 죄르 짓고 죄에 깊숙이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주님은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다투고 났을 때에 그들 가운데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고 이와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소자중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과 같이 잔인한 짓이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낮추는 어린아이 같은 소자가 교회 안에서 자기 죄를 자백하는 사람이다.

 

 

3. 갑질 하는 자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소자가 죄를 자백했을 때에 그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이다. 소자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것이 갑질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드러난 소자의 죄를 약점을 잡아서 공격을 하고 용서하지 않음으로 실족을 시키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남의 약점을 잡아서 어려움에 빠뜨리는 것은 더럽고 비열한 일이다.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을이고 그 죄를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이 갑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용서를 하고 안하고가 자신에게 달린 것같이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올라가는 교만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자에게 갑질하는 사람은 자기는 마치 용서를 받을 죄가 없는 의인인 것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것이다.

예로부터 교회안에서나 가정에서 죄를 자백하는 일이 무섭고 힘든 일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 죄를 사해주시는 하나님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주지 않고 갑질을 하는 죄인이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죄를 자백하기가 힘든 것이다.

사실은 죄를 지은 죄인보다 죄를 용서하지 않는 죄가 더 더럽고 무서운 죄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요 그 사랑을 스스로 믿지 않음을 나타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를 자백한 소자에게 갑질을 하는 것은 지옥불에 들어가는 죄와 동등한 죄이다. 그래서 주님은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오른 손이나 발을 찍어 버리고 한 쪽 눈을 뽑는 일이 있어도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지옥 가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8: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것은 소자를 업신여기는 것이며 그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항상 뵈옵는 하늘에 계신 아비지를 무시하는 무서운 일을 범하는 것이다.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3.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

 

주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과 이흔아홉마리의 양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회개할 것이 있는 양이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서는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라고 말씀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은 없다 지은 죄를 감추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은 없다. 길을 잃지 않은 것처럼 외식할 뿐이다. 그들은 죄를 자백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 없어 보이는 사람들일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는 그들을 들에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간다. 마태복음에서는 산에 두고 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들이나 산은 들짐승도 있고 위험한 곳이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의인들이기 때문에 목자이신 주님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의인들이다. 차라리 주님이 찾아 가는 길을 잃어버린 양이 행복한 것이다.

이와같이 날마다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여 용서를 받는 사람은 주님의 찾음이 되는 사람이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이다. 그와 같은 사람이 주님이 말씀하신 소자이다. 회개할 것이 있고 길을 자주 잃어버려 주님이 찾도록 찾으시는 소자와 같은 사람은 찾았을 때에 주님에게 기쁨을 주는 양이다. 그러나 의인 아흔아홉은 찾을 것도 없고 돌볼 것도 없는 주님 없이도 혼자서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종교인들이요 율법주의자들이다.

열 손가락중에 하나가 아프면 그 하나를 집중적으로 돌보듯이 자주 죄를 짓고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주님의 애틋한 사랑의 대상이 되고 주님이 날마다 찾아 주시는 은혜를 받는 것이다.

 

 

4,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다툼이나 허영으로 교회생활을 하지 말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한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소자라도 나보다는 나은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항상 뵈옵기 때문이다.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그러면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죄를 자백한 자녀들과 남편이나 아내를 주님은 귀히 여기심으로 그를 위하여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했다면 우리는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의 아래에 들어가서 그들을 용서하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영어로 이해한다는 말은 “understand”이다. 언더는 아래를 말하며 스탠드는 서는 것이다. 그의 아래에 서는 것이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죄인의 아픔을 이해애야 죄인을 용서할수 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은 죄인의 아래에 들어가셔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아버지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음부에까지 아래로 내려 가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5. 맺는 말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라고 명령하셨다.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가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용서하라는 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은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지은 죄보다 더 더럽고 악한 죄를 짓는 것이다.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죄이다.

 

(요일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일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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