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장차 목회를 하고 주님의 일을 하고 싶어 했던 사랑스러운 한 영혼이었습니다. 

코로나 때에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코로나가 끝나고도 집이 멀어서 온라인예배를 참석했습니다. 

한참을 지나는 중에 그가 십일조를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대로 가르쳐야 하는 나로서는 그에게 십일조를 어떻게 하는 지를 점검해야할 의무가 주님 앞에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에게 십일조를 어떻게 하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소득의 십일조를 은행에 저축을 해두고 있으며 장차 하려고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그후로부터 저를 피하는 기색이 역력히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전화를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던 사람이 그 때부터는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화했을 때는 "잠시 후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라는 문자가 오고나서는 더 이상 아무런 연락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반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나는 그의 영혼을 사랑해서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서 십일조 이야기를 그에게 한 것이며 그것도 그의 평생에 단 한번을 말을 건넸는데 그는 아마도 내가 그의 십일조를 탐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던 것 같습니다. 혼탁한 교회 생활 속에서 헌금과 십일조를 강요하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드리는 사람이 임의로 드리고 안 드리고를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강요해도 안되고 사람의 강요에 의해 드려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그것은 진리의 바른 길로 인도하는 마지막 마침표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라기는 십일조를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 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말 3: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나서 이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말 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그리고 십일조를 받은 교회는 하나님의 돈을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거룩한 소용에만 써야 합니다.   

단지 진리를 가르치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기피를 당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그와 같은 속임을 베푸는 마귀를 미워하고 대적합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 마귀를 대적하는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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