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 다시는 예수전도협회를 안와야지 안와야지 하면서 굳게 결심을 해도 나도 모르게 오게 됩니다."
"왜 안오려고 해요?"
"말씀을 듣는대로 살아지지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그래요."
"그럴수록 더 와서 말씀을 듣고 더 아파해야 말씀대로 살아지는거 아닌가요?"
"글세 그런줄은 아는데...."

월요성경학교가 끝나고 어느 목사님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나눈 말이다.
말씀을 듣고 공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문제는 들은바 말씀대로 살고 순종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되어서 고통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어느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월요성경학교를 가지 말라고 종용을 하더란다. 사모님이 하도 안타까워서 왜 성경학교를 못가게 하느냐고 묻자 "가서 말씀을 들어도 그렇게 살아지지를 않는데 가면 뭐해?"라고 반문을 하더란다. 그리고는 그사모님이 하시는 말씀이 하루종일 인터넷만을 하면서 그런말을 할 때에는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고 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심령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으며 애통하는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는 세 번째로 온유한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이말씀을 깨닫고 체험하는자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복이라는 것은 주님이 주셔야지만 하는 것이고 우리는 주는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나 그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아파하고 애통해하는 것이나 말씀에 길들임을 받아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이지 우리가 일을 하고 열심을 내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먼저 심령이 가난한 복을 받아야 한다. 내가 심령이 가난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복을 받아야 하는데 그복은 말씀을 사모하는 복이며 그 깊은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거지처럼 사모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앞에 나올때마다 그날 그날 주님앞에서 "주님 나는 아무것도 없는 영적인 거지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지입니다." "주님이 안주시면 나는 받을수 없습니다."라는 심령이요 그심령으로부터 나오는 고백인 것이다.
언젠가 대구에서 이말씀 곧 거지같은 심령에 대해 말씀을 전하고 났을 때에 어느 목사님이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장로님 마태복음 5장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과 '거지 나사로'의 거지가 같은 어원입니다."
우리는 거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복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면 주님이 말씀을 주시는데 그말씀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인격과 생활이 아파지는 것은 그다음으로 오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사모한만큼 아픔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말씀을 공부하고 성경공부를 하며 무슨 훈련이다 무슨 집회다를 참석하면서도 애통해하는 심령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애시당초 심령의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참석을 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배우고 알고 또 막연히 은혜를 받으려고 참석을 하여 영적으로 파산된 거지같은 절박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주님이 주신 신령한 복의 원칙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자 마자 하루종일 말씀만을 읽었다 종일토록 눈물을 시냇물처럼 흘리면서 말씀을 읽었는데 그것은 내가 말씀에서 도저히 눈을 뗄수가 없었으며 내손에서 성경을 놓을수 없는 절박한 심령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것이 힘든 일이냐의 사실을 말하기전에 주님이 심령이 가난한 복을 주시지 않으면 사모하는 마음조차도 가질수 없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깨닫고 행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을 주시면 거지가 구걸을 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것과같은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복을 주시면 그렇게 아니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고 세상즐거움에 빠지고 운동에 빠져 살고 인터넷에 빨려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은 일의 문제가 아니라 심령의 문제다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존재 곧 영적생명을 받아 영적세계를 사는 사람에게는 말씀을 사모하고 일고 듣고 행하고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 되는 것이다. 전도가 쉽다 어렵다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자신의 영적인 위치를 모르는데에서 오는 엉뚱한 말들인 것이다. 지금은 천당에 가셨지만 오래전에 같이 전도를 하시던 77세되신 원로장로님이 주일오후에 공원에 전도를 가면서 가파른 언덕길을 같이 올가다가 내가 여쭈었다. "장로님 힘드시지요?" 그러자 하시는 말씀이 "아니야 오히려 전도를 안하는 것이 더 힘든 것이지."라고 대답을 하셨다.
그렇다 어떤 것이 힘드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전도나 목회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힘이들고 안들고를 말하기전에 먼저 내가 말씀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기도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전도자가 되지 못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일이 쉽고 수월하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사람이 영적인 일을 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다. 항상 주님안에 거하는 것이 어려운가? 지속적인 성령의 충만으로 사는 것이 어려운가? 쉬지말고 기도하는 사람을 사는 것이 쉬운가 어려운가?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영혼을 사랑하는가? 말씀속으로 몰입해 들어가고 발씀에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은가?
이와같은 것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앞에 나아올때마다 거지와 같은 심령으로 주님이 아니주시면 받을수 없는 심령으로 주님앞에 나아오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자의 축복인 것이다.
어느날엔가 아들과 함께 경건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잠자리에 누었는데 잠자는 중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얘야 '다윗이 내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노래를 하였는데 그잔을 누가 채워 주었겠니?"  
"그야 주님이 채워 주셨지요."
"내가 주지 않으면 한방울도 받을수 없는 것이 다윗이요 그것이 너희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부요한 마음, 살찌고 교만한 마음으로 내앞에 나오는 것을 내가 참아 볼수가 없구나."
이렇게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말씀을 구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신다. 그말씀을 받고 깨달을 때에 그말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나의 영적인 상태를 아파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그아픔이 더해갈 때에 애통하는 복이 임하고 그렇게 되면 주님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지 않을수 없고 기도하고 부르짖는 일이 항상 쉬지 않고 되는 은혜가 임하는 것은 잘때나 깰때나 앉으나 일어서나 내가 알고 깨달은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내게 아픔이 되기 때문이며 주님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아픔의 깊이가 더해가기 때문이다. 무시로 무릎을 꿇지 않을수가 없게 된다. 길을 걸을 때나 잘때에도 영적인 아픔과 부담을 가지고 주님앞에 엎드리는 심령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렇게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순종해가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되는 축복을 받는데 그것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온유하다는 것은 사나운것의 반대말인데 사나운개를 데려오면 길을 들이는 것이 우선인것과 같이 죄인들이 죄가운데살며 공중에 권세잡은 자에게 순종하고 마귀를 따르던 인격과 생활에서 단번에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본 경험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순간부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영적생활이 시작이 되는데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주님과 나만의 시간을 통해서 말씀으로 사는 훈련이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럴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온유한 사람 영적인 사람이 되며 말씀으로 거룩해진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될 때에 내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 일절 복종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의 임재가운데 사는 영적인 사람이 되며 일마다 때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따라가며 성령의 도구로 쓰임을 받으므로 내가 수고하는 모든 일에 주님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그의 안에 거하느냐에 가장 큰 관심이 있으시다. 왜냐하면 거룩한 사람은 주님안에 거하고 거룩하지 못한이들은 주님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3,4)
많은 사람들이 무턱대고 열심히 배우면 되는줄을 알고 열심히 설교하고 전도하면 되는 줄로 알고 열심히들 하고 있다. 그러나 열매도 없고 기쁨도 없고 만족도 없는 일을 하는 이유는 먼저 주님안에 거하는 사람이 되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16년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전도협회에 와서 울고 통곡하고 주님앞에 잘못살은 것 때문에 영혼을 사랑하지 않은 것 때문에 회개하고 돌아가서 가정도 회복이 되고 교회도 회복이 되어서 전도를 하다가 하나씩 둘씩 전도현장을 버리고 떠나갔다. 어떤이는 3년동안 전도를 하면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을 한 것을 듣고 삼년동안 자신은 변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지는 않고 삼년동안 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것을 보고는 전도현장을 떠나가기도 했다. 어떤이들은 전도를 해도 부흥이 안되고 교인수가 늘지를 않는다고 전도를 그만두기도 했다. 그리고 사욕을 좇을 스승들이 많이 일어나서 그들이 말하는바 교회를 부흥시켜주겠다는 달콤한 말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혈루병여인과 같이 많은 의원에게 고난을 받고 있던것도 다 허비하며 재물도 잃고 시간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만둘 것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전도를 그만두고 말씀과 기도로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포기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힘들다고 하여 그것을 그만두는 어리석음에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일들이 우리주변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와서는 협회에 와서 은혜를 받은 것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어 "그래도 그때가 가장 좋았다" "그래도 그때에 교회가 부흥이 되었었다"라는 말들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사백년만에 애굽에서 나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삼십년이나 연장을 해가시면서 모세를 그의 사람을 만드는데에 미디안광야에서 사십년이라는 세월을 쓰신 하나님이시다. 사울을 바울로 만들기 위해 주님은 삼년의 아라비아의 해와 8년이상의 영적생활의 훈련을 다소에서 가지신후에 그를 하나님의 일에 투입을 하신 것을 기억하자. 믿음의 사람이 어디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시간을 갖지 않은 사람이 성경에 있는가를 보라.
십년전에 전도훈련을 단한번 받고 지금도 전도를 하며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는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장로님 저는 예수전도협회를 만나기전에는 열심히 목회를 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목회를 했는데 주님안에 거하는 것은 몰랐습니다. 뭐가 부족하다 싶으면 더 열심히 안해서 그런줄알고 더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훈련을 받고 잘못살은 것을 회개하면서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주님이 일하시기 시작을 했습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내주변에서도 전도를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이유는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훈련을 받고 죄를 회개하고 영혼이 거룩해지니까 전도가 되었습니다.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씻지 않고 경건생활을 아니하고 영혼이 더러워 지니까 주님안에 거할수 없었고 그러니 주님이 도구로 쓰실수가 없었고 전도의 열매도 없어지고 시들해졌는데 사람들은 그이유가 전도방법에 있다고 핑계를 대고 전도를 그만두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입니다. 계속 전도를 했다면 자기 영혼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영혼을 고칠수가 있었는데 이것처럼 마음아픈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도 더 이상 마귀의 속임수에 속아서 살지 말고 잃어버린 광야생활과 전도현장으로 급속히 돌아오는 것이다. 사람의 가르침을 받겠는가? 아니다 성령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밖에는 유효한 것이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없는 것이다. 날마다 죄를 자백하고 죄를 씻지 않으면 깨끗하고 성결한 도구로 주님께 쓰임을 받을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시바삐 줄기의 규격에 맞는 가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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