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전에 어느 목사님이 먼저 훈련을 받은 선배목사님의 권유로 전도훈련을 받는데 간증을 하는 강사들이 목회를 너무나 엉터리로 한 경험을 말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서 ‘목회를 어떻게 저렇게 엉터리로 했는가?’라는 정죄하는 마음이 들고 해서 이튿날 집으로 돌아 가야하겠다는 생각을 굳게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한다.
“얘 너 목회를 정말 열심히 했지?”
“예 주님 저는요 저 사람들 하고는 다릅니다. 저는요 먼저교회에 있을 때에 동네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고요 목회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 그동네사람들이 퇴직금을 거두어 줄 정도로 열심히 목회를 했습니다.”
“그래 나도 네가 열심히 한 것을 알고 있단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이 나를 위해서 했니 아니면 너를 위해서였니?”
“.....”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대답대신 눈물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하나님의 판단이 임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간증이나 말씀이나 그내용과 상관이 없이 자신의 영적인 참담함 때문에 시종일관 눈물을 흘리고 숨을 죽이고 소리를 죽이며 울면서 시간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씀이 들어오기 시작 하면서 전도를 못한 것이 한이 되고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울고 회개했다.
교회로 돌아가서 교인들앞에 교회앞에 회개했다.
자신의 목회욕심을 이루기 위해 교인들을 다그치고 마음에도 없는 종교행위를 가르치고 율법의 행위의 무거운 짐을 지워 준 것을 아픔으로 회개했다.
그리고 즉시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서 전도를 했다.

주님하고 사는 것이 먼저인데 주님하고 살지도 않으면서 우선 전도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고 주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전도를 했다.
주님하고 사는 영적생활은 너무나 멀어 보이고 우선 할 수 있는 행위를 생각했는데 그것이 전도였다.
주님하고 사는 신앙생활은 살아본적이 없고 교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가르쳐 전하게 하는 것도 시간이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했지만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서 외치는 외침전도는 오히려 간단했다. 그것은 흉내만 내면 되는 행위로도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도훈련을 받은 거의 99%가 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고도 왜 실패했는지 이유조차도 모르고 전도의 방법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그리고 전도를 싫어하는 이들이 반대하고 핍박을 하는데 그것을 견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이내 전도를 접고 또다른 방법을 찾아 헤메게 된 것이다.

전도를 핍박한 사람이나 핍박을 한다고 전도를 그만둔 사람이나 그허물은 주님앞에 동일하게 같은 것이다.

왜 전도를 그만 두었을까?

명백한 것은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로부터 나오는 생활로서의 전도가 아닌 행위로서의 전도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전도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다. 전도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시간마다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줄기안에 거하는 가지가 되는 주님과 연결된 생활, 생명이 연결이 되고 생활이 연결이 된 삶을 사는 것을 들었지만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그리고 전도하는 행위를 흉내내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주님하고 사는 영적생활은 시간이 필요하고 믿음으로 사는 경건의 훈련을 요하는 것이지만 나가서 외치는 것은 그냥 흉내만 내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그레이스백화점앞에서 외치던 전도자들이 그랬고 남원 춘향제에서 강릉의 단오제에서 복음을 외치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의 욕구불만 때문에 더 강력하게 외치는 전도를 했다. 그러나 열매는 없었다. 왜냐하면 주님안에 붙어 있는 가지로서의 영적인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도여행을 할 때면 의례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자신은 개인전도보다도 외치는 전도가 체질에 맞다며 외침전도하는 무리들에게 가서 합루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중에 유심히 보면 하나같이 일대일로 전도하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있어서의 외침전도는 배워서 하는 것도 흉내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외침전도를 하기전에 일년육개월의 세상과 단절된 주야로 주님만을 만나는 광야생활이 있었고 5년10개월동안 교회에서 교회생활로 목사님과 교인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직장에서 들어갈 때에 신앙고백을 한 이유 때문에 불신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앞에 말씀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면서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주님과 계산할 것이 없는 것을 깨닫고 즉시 주일오후마다 청년들을 데리고 전도를 다니면서 조직적으로 전도를 하고 병원전도 축호전도를 한지 4년 6개월이 지나서야 85년 8월에 처음으로 외침전도를 전라도 광주에서 주님이 허락하셨다.
그리고 외침만을 위한 외침전도가 아니었다. 일대일로 개인전도를 하기 위한 외침전도였다. 그리고 열매가 항상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이들이 전도훈련을 받고 외침전도만을 했다. 모양만 낸 것이요 흉내만 낸 것이다. 골방으로 들어가 주님과 함게 살고 영적생활과 경건생활이 견고히 서는 역사가 우선인데도 그것은 뒤로 미루고 밖에 나가서 전도만을 일삼았다.

생활은 멀고 행위는 가깝기 때문이었을까?

주님이 갈릴리바다에서 부르신 제자들을 즉시 모아서 외침전도를 했다고 생각을 해보자 하나라도 남아 있었을까? 다 도망을 갔을 것이다. 도망을 가지 않았어도 괴로워하면서 전도를 부담스럽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런 전도를 시키는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을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독자적으로 나가서 전도를 하기 전 곧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주님과 함께 사는 믿음을 삼년반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주야로 가르치셨다. 다시말해서 삼년반동안 합숙훈련을 하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주님도 시키지 않은 일을 교인들에게 시킨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다져진 교인들에게, 육신의 행위로 종교생활이 몸에 배어 있는 교인들에게 전도의 행위로 흉내를 내는 것은 너무나 체질에 맞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도 교회안에서 교인들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 찬송을 부르는 것, 봉사하는 것들이 행위로서 가르쳐지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하고 사는 영적생활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도 주님하고 사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러니 교인들이 어찌 주님하고 사는 영적생활을 살수가 있겠는가?
실생활은 세상사람들과 비슷하게 살고 교회생활은 교회생활대로 하다보니 이중적인 생활로부터 진실한 것이 나올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도 주님을 만나는 예배가 아닌 종교화된 천주교의 그것과 유사한 행위로서의 예배가 되고 기도도 응답이 없고 일방적인 주문수준으로 끝나고 기도한 것으로만 만족을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찬송도 마음에도 없는 찬송 간증이 되지 않는 찬송 생활도 없는 찬송이 불러지는 것이다.

먼저 말한 그목사님의 교회도 이렇게 행위로 전도를 하면서 매주일 전도현장에서 전사자가 속출했다. 한주일이 지나 갈수록 전도하는 교인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시골동네에서 생활이 빤한데 불신자들에게 노출된 허물도 많이 있는데, 그들앞에 회개하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 그것을 빤히 알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이 말도 되지 않은 것임을 자기들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래서 마음이 찔리기도 하고 양심의 가책이 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같고 실제로 욕도 얻어 먹기도 하면서 전도를 도저히 할 수가 없어 전도현장에서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도현장에서 떨어져나간 교인들은 자기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전도를 비방하고 다녔다. 뒤에서 수군수군하면서 전도의 방법이 잘못되었느니 우리 목사님이 잘못되었느니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인 이전에 없었던 일인데 시키느니 등등의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런사람들이 하나둘씩 규합이 되면서 세력이 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전도를 훼방하고 핍박을 하기도 했고 전도시간에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전도를 안 나가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교묘하게 일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어떤 때는 훈련을 받고 전도를 먼저 시작한 목회자가 선경공부나 기타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신이 전도를 빠지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준비되지 못한 전도이었기 때문에 영적생활이 결핍이된채 전도훈련과 간증으로 받은 충격으로 인한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 전도를 시작한 것이기에 그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도훈련을 받지 않은 반대세력과 힘을 합해 전도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목회자를 쫓아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목사님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 교회를 사직하고 목회지를 시골의 작은 교회로 옮겼을 때에 주님과의 신혼살림이 시작이 되었다. 교회일에 바쁘고 심지어는 전도하는 일에까지 바빳을때는 주님을 만나지도 주님과 함께 살지도 못했는데 이제 시골교회에서 주님이 하루종일 만나주시는 역사가 일어났다. 주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이다. 너무도 신기해서 주님이 자신을 만나주시는 것을 하루에 몇 번이나 되는지를 세었다고 한다. 하루에 한두번 만나주시던 주님이 열 번 스무번을 넘어가면서 이목사님의 심령에 깨달음이 있었다.
“아 주님이 나를 하루에 몇 번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루종일토록 나와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구나”
그때부터 주님과 동행을 하는 삶을 살고 교회를 고치는 주님의 도구로 써주시는 은혜가 임했다. 그리고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열심의 한계를 넘지 못하던 사역이 이제는 주님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주님의 세밀한 인도하심과 응답이 날마다 임했다. 이제는 말도 주님이 하시고 일도 주님이 하시는 것을 몸으로 체험을 하면서 날마다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하나님의 참종이 되었다.

주님도 이땅에 계실 때에 아버지와 함께 사시면서 주의 일을 하셨다. 제자들에게 주님은 전도를 가르치고 사역을 가르치기 보다는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가르치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주님은 전도를 명하기전에 성령을 주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주님안에 거할 것을 명하신 것을 기억하라.

생활로부터 나오지 않는 모든 행위는 거짓된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모든 행위에 우선되는 것이 진정한 심령의 부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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