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비밀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수년 전에 어느 장로교회 시찰 목사님들이 모여 회의를 하면서 나왔던 일치된 말 중에 하나가 "우리가 진정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지?"라는 말이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이 시대에 “목회를 하느냐 못하느냐, 목회가 되느냐 아니 되느냐, 목회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라는 명제가 끊임없이 던져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실상은 큰 교회를 담임한다고 목회다운 목회를 한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작아서 교회운영조차 안되는 교회 목회가 옳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참목회라고 할 수 없으며 예배당을 크게 짓는 것이 참목회라고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목회며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목회인가?” 라는 명제에 대한 해답을 지금의 목회자들은 오늘도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다니고 말을 듣고 강의를 들으며 이 세미나 저 세미나를 섭렵하면서 단 한번 가는 목회길에 바른 목회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해답이 쉽사리 주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목회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는 주님만이 일꾼을 불러 시킬 수 있는 일이고 주님만이 평가하실 수 있는 일이다. 스스로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요 사람이 시키는 것도 아니요 사람들이 정해 놓은 학교나 과정을 거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나 교단에서 정한 과정은 아무나 이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정한 과정을 거쳤다고 하나님이 다 인정하고 다 기뻐하며 다 쓰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교를 나와서 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해도 하나님이 아니 쓰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목회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고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쓰시지 않으면 버림을 받게 된다. 이전에 주님이 쓰신 사람이라도 지금 아니 쓰시면 버림을 받는 것이다. 사람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날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찾아왔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마 21:23-27).

저들은 주님에게 자격문제에 대해 시비를 걸고자 하여 나온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가말리엘문하에서 공부한 것도 아니요 무슨 신학교를 나온 것도 아닌데 왜 백성들을 가르치느냐가 저들이 묻고자 하는 심중의 문제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야말로 그와 같은 질문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임을 알았기에 그들의 입을 닫아놓는 말씀만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비유의 말씀으로 저들의 악함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마 21:28-46).

주님은 저들에게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아들이 되는 것과 주인의 뜻대로 하는 종이 되는 것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요 목회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목회는 무엇인가?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먼저 교회 안의 양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양이라는 말이다. 무의식 중에 “네 교회, 내 교회, 네 교인, 내 교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여기에서 지나 교인들이나 교회를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는 지나친 것이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악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목회는 먼저 어린양을 먹이는 것이다. 어린양은 영적으로 자라지 못한 영혼을 말하는 것이다. 어린양을 먹여서 영적으로 성장을 시키는 것이 목회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에게는 교인들이 영적으로 자라지 못할 때에 고뇌하고 아파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고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인들이 변화되는 삶을 보이지 못할 때에 그것을 아파하고 괴로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문제와 시험에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믿음의 장부로 성장을 시키는 것이 목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목회는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이다.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성장을 이룬 주님의 양들도 날마다 영적인 양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래서 있는 힘을 상실함으로 마귀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항상 영적인 건강을 유지시켜 주는 양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오래 전에 영국의 어떤 왕은 주일예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It's feedable”이라고 말했다 한다. 하지만 말씀이 은혜가 되지 못하고 자기의 영혼에 양식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될 때에는 아무말도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목회자보다도 양들이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잘 가려내는 것이다. 자기 배가 부른지 아니 부른지는 양들만이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은 양들이 먹는가 먹지 못하는가에 민감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들이 배부르게 먹으면 즐거워하고 양들이 주리거나 아무리 좋은 꼴을 주어도 배탈이 나거나 먹지 못하면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목회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목회는 주님의 양을 치는 것이다. 양을 친다는 말은 곁길로 가지 못하고 위험한 길로 가지 못하도록 막대기와 지팡이로 쳐서 돌이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양을 먹이고 성장시키고 살찌우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은 아무리 잘 기르고 먹이워서 살을 찌워도 늑대의 밥이 되거나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된다면 이는 불행한 일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교회에서의 가장 부족한 면이 치리부분임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어떤 목사님이 교인들을 치리하면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 것이 무서워 치리를 못하게 된다는 아픔을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의 문제점은 훨씬 더 깊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은 치리하기 전에 그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교인들을 책망하기 전에 사랑하고 친해지고 친구가 되어야 책망을 머리의 기름으로 받을 수가 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진정한 목회가 아니 되니 치리도 안 되는 것이다. 교인들이 위험에 처하는데도 안 들을까봐 말을 하지 못하는 목회는 진정한 목회가 아니다. 또 교인들이 쓴 말을 듣지 못한다고 귀에 듣기 좋은 말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도 그 옛날 거짓 선지자들이나 했던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이다.

이와 같은 목회를 누가 하는가?
주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하신 질문이 무엇인가?
세 번이나 일관되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이전과 같았다면 그의 성격에 비추어 봤을 때 자신있게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서 누가 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겠는가라는 양으로 대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달라졌다. 딴 사람이 되었다. 너무나 조심스럽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였다. 왜 달라졌는가? 주님이 고난을 당하시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조차도 자기의 뜻과 열심으로 할 수 없고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자기의 육체의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믿음인가? 자기의 육체의 한계를 보고 주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시는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다. “사랑조차도 할 수 없는 육신”, “사랑조차도 할 수 없는 나”라는 믿음이 들어갔을 때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목회의 조건을 볼 수 있다. 누가 목회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곧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요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아니요 저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교인들이 교단에서 또는 온 세상이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시는 그 사람이 주님이 시키시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고 주님의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게 될 때까지 그는 삼년반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아갔다. 그렇게 주님을 전심으로 따르고 주님과 함께 거하며 살았을 때에 주님이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아시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목회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인데 그것도 주님이 그 사랑을 아시고 인정해 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주님은 당신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당신의 대답은 어떠한가?

* eafj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7-04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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