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병

강의 이유빈 장로
정리 고병훈 집사

(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요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 5: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양문’은 느헤미야 3:1절과 32절 느헤미야 12:39절에 양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     )’에 들어있는 것은 어떤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다. 아주 유력한 사본에는 이것이 없고 나중에 이것이 덧붙여 진거라는 그런 얘기가 있다.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 말씀을 오늘날 교회하고 비교해서 얘기하면 교회 안에 많은 병자들이 있다. 소경도 있고 절뚝발이도 있고 혈기 마른 자들도 있고 깨닫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영적인 병자들이 많이 있다. 또 보이는 병보다 보이지 않는 병이 더 무서운 병이다. 육신에 보이지 않는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의 병이다.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의 병이다. 그러나 이런 병보다 더 무서운 병이 영적인 질병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영적인 현실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감각되지 않는 병이 영적인 질병이다. 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는데 보이지 않는 병은 당장은 아무렇지도 않고 또 어쩌다가 아프지만 참을만하고 그러다가 병을 키우는 경우를 보게 된다.

상주의 할머니가 자궁암 수술을 했는데 이 할머니의 담당의사가 할머니는 수술하기 어려운 부위에 혹이 붙어있기 때문에 수술을 할수 없다고 거부하자 할머니는 집으로 찾아가고 사무실로 찾아가서 몇 번을 간곡히 부탁을 하며  수술하다 죽어도 상관이 없으니 수술이라도 하고 죽게 해 달라고 해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수술실에 들어가서 암 덩어리를 긁어내어서 의사가 식구들을 불러 긁어 낸 암 덩어리를 보여주는데 조그만 양동이로 절반정도를 긁어냈다는 것이다. 이 할머니가 하는 말이 그런 암 덩어리를 자기 몸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금씩 조금씩 자라면서 불편한 것 외에는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것처럼 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병, 마음의 병보다 영적인 질병이 더 무서운 병인데 급한 마음으로 고치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당장 이 몸을 사용하는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에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삼십팔 년 된 병자’ 이 사람은 38년 동안 병중에 있었다. 병원을 가보면 처음 입원한 사람은 빨리 고쳐서 퇴원하고 싶어서 몸부림을 친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장기입원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병원 생활에 익숙해져버리고 여름철에 휴가도 일주일씩 다녀오면서 병원에서 사는 것이 익숙해 저버린 환자들이 많다.

영적인 질병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병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고 눈물이 없고 감격도 없고 주님의 마음에 감동도 되지 않고 주님과 교통도 없는 이러한 영적인 질병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전도 안하는 삶에 익숙하고 기도 안하는 삶에 익숙하고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일주일 이주일 한달이 가도 전혀 문제의식이 되지 않는 영적인 환자로 사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38년 된 병자도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38년 동안 병으로 들어서 누워 있었으니 얼마나 병에 익숙해 있었겠는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동안 누워있진 않았겠지만 오래동안 누워있었던 것이 틀림이 없다.
또 이 사람은 주님을 만나는 순간에 나음을 입었는데 다시 말하자면 주님을 만나는 것이 필요한데 이 사람은 주님 만나는 것을 구할 줄도 모르고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말씀대로 살지 않고 순종하는 인격이 없으면서도 천사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구하는 그런 병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 그리고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을 구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주님이 물어 보셨을 때 38년 동안 병들었으면 “예 낫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을 해야 되는데 고침 받기를 원하지만 환경이 도와주지 않는다는 식의 대답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하신 말씀가운데 보면 “주님은 보셨고 아셨고 이르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질병의 형편과 영적인 형편을 주님이 다 보시고 아시고 계신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사람은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하기를 기다렸고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을 기다렸는데 또 한 가지는 좋은 자리차지 하려고 구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베데스다 연못은 로마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진멸할 때 땅에 파묻히고 없어졌는데 못을 발굴해서 베데스다 못이라고 하는데 이 못은 목욕탕처럼 생긴 호수라고 한다.

이 병자는 천사가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못에 넣어줄 사람도 구했지만 좋은 자리를 구하려고 불편한 몸으로 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좋은 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기왕이면 안수집사, 기왕이면 장로가 되었으면 한는 것이 좋은 자리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믿음이 더 좋아지는 것 갖은 착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좋은 자리를 구하고 사람의 도움을 구하고 천사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구하는 그런 영적인 병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 한마디가 이 사람의 38년된 병든 자리를 청산하고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간 것이다. 베데스다 못가에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이 한사람을 만나 주셨다. 찬송가에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나를 빼놓고 지나가시면 안 되고 나를 꼭 만나주셔야 됩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병자들이 그곳에 있었고 각색 병자들이 있었지만 한 사람만 만나주다. 그리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라는 말씀의 권능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역사가 일어났다.
* eafj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1-0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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