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5 월요성경학교 강의 중에서

강의 이유빈 장로
정리 고병훈 집사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하시는데 여러 가지 각도가 있음을 보게 된다.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 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깨끗케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그냥가지가 있고 깨끗한 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는 주님 안에 거하는 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

‘과실을 많이 맺나니’ 열매 맺는 가지가 있고 과실을 많이 맺는 과지가 있다는 말이다.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사랑 안에 거하라’ 이 말씀은 거하는 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그냥가지가 깨끗한 가지가 되고 거룩한 가지가 되기 위해서는 영적성장이 되어야 하는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져야지만 깨끗한 가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깨끗하고 주님 안에 거하는 가지가 되기 위해서는 지속 적인 은혜가 임해야 된다. 거하는 가지는 열매 맺는 가지가 되는데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것으로 만족 할 수가 없고 열매를 많이 맺어야 된다. 열매를 많이 맺다 보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가지가 되는데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처음 받은 십자가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가지를 말한다. 그 십자가 사랑이 날마다 종일토록 순간순간 감격하여 울고 감동 받는 가지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가지이다. 가장 복되고 복된 가지는 십자가의 사랑 안에 변함없이 거할 수 있는 가지가 최고의 복된 가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느 가지를 더 사랑하신단 말인가? 이 질문을 집회 중에 성도들에게 했더니 어느 집사님이 손을 들어 대답하기를 사랑 안에 거하는 가지라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집사님에게 아직도 율법에 매여 있는 모습이라고 했다. 주님은 어느 가지를 더 사랑하시는가 하면 그냥 가지를 더 사랑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냥 가지, 연약한 가지를 불쌍히 여기셔서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셔셔 사랑 안에 거하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가지로 만드시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 축복된 가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시편 23편과 연결하여 볼 수 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말씀은 주님이 먹이시고 주님이 인도하시고 주님이 지켜 주시고 주님이 상을 주신 결과로서 주님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삶을 살아 지는 것이다. 주님 안에 사는 것 이상의 축복이 없다. 이 말씀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을 봐야된다 기도해야 된다 라고 말하기도하고 마음으로 다짐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성경을 보는 것이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게 하시는 은혜로 임하는 것이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이 말씀을 보면 내가 푸른 초장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말씀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이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셔서 나에게 먹이시는 것이지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도다’ 목자라면 양이 잘 먹는지 못 먹는지 무엇을 먹는지 물을 마실 때가 되었는지 실 때가 되었는지 신경을 쓰고 전심으로 거기에 신경을 쓰는 것이 진정한 목자이다. 우리교회 교인들이 영적으로 오늘도 잘 먹고 있는지 오늘도 정말 주님이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배부르게 먹고 배가 고프지 않았는지 또 그들을 해치려는 세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는 것이 목자이다.

그리고 내게 주신 자식의 영혼이 잘 먹고 있는지 못 먹고 있는지 그것을 살필 줄 아는 것이 목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목자가 아닐지라도 자녀들에게는 내가 목자와 같이 그 자녀들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그런 영혼에 대한 아픔을 가지고 영혼에 대한 부족함을 채우면서 사는 것이 그것이 부모의 모습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염려하지도 마라’ 우리가 한 때는 모피 옷 입은 사람을 부러워 한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모피는 싸구려가 되었지만 지금은 밍크코트를 입고 싶어 한다. 미국사람들도 밍크코트 입기를 사모한다. 우리가 이렇게 밍크코트를 입은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밍크라는 짐승은 태어날 때부터 밍크코트를 입고 태어났다. 다른 짐승들은 다 모피 옷을 입고 다닌다.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는 것처럼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이 씀은 먹고 입고 마시고 하는 사람들, 돈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은 내일도 반드시 걱정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오늘도 내가 이런 것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말씀에 통치가 이루어지는 인격, 하나님의 거룩함이 내 마음과 행실과 성품 속에 나타나는 것 때문에 주님 앞에 부르짖고 매달리고 마음 졸이고 애타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돈 걱정할 필요가 없고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돈 걱정하는 사람은 반드시  돈 걱정 때문에 피를 말리고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된다. 교인들이 결핍증이 무엇인가? 육적인 결핍이 심각한 문제인가? 아니면 영혼의 결핍이 내 인생에 가장 치명적인 문제인가? 내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고 먹을 것이 아니고 입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주님의 말씀과 다스림이 필요하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에서 볼때 믿는 사람은 염려와 걱정은 금지 품목이라는 말이다. 다시말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품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고 염려하는 사람은 기도 안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 영적생활을 하고 영적성장을 이루고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되고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살고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을 “내가 해야 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시편 23편을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될 때 그 다음에 오는 당연한 결과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함과 같이 승리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 승리생활로서 오는 당연한 열매와 결과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함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목자들이다. 그들은 날마다 유리방황해야 한다. 여기서 짐승들이 풀을 다 뜯어 먹으면 저쪽으로 가고 하면서 그들이 유리방황하고 사는데 이것이 이 세상의 인생들의 모습이다. 이런 환경 가운데서 그들이 사모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언제 주님 안에 거하면서 유리하지 아니하고 떠돌아 다니지 아니하고 정착하고 주님 안에 거할까? 이것은 육신의 정착이 아니라 영적인 정착이다.

옛날에 미국에 "Haven of rest" 안식의 항구라는 잡지가 있다. 바다 위를 떠 다니는 배는 언제 안식을 누리는가 하면 항구에 들어갈 때 안식을 누린다. 이처럼 주님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며 누리는 것을 아브라함도 사모했고 이삭도 사모했고 야곱도 사모했다. 이 안식은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어졌다.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와 계신다. 예수믿고 성령을 받고 살면서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안식의 항구에 쉬는 삶을 사는데 요한복음 14장에서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 마음에 평정, 뛰면서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바쁘면서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사람들과 싸움과 다툼과 경쟁 속에서도 마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마음의 평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이고 주님 안에 거하는 최고의 축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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