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목회를 하던 목사님을 오랜만에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교회 안에 문제를 일으킨 장로, 권사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부인은 권사 투표에서 떨어져서 다른 교회를 갔다가 돌아와서 집회에 참석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는데도 은혜도 받지 못하고 나중에는 강사에 대한 시비와 말씀에 대한 시비를 담임목사님에게 하면서 여러 번 목사님을 괴롭혔다는 말을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 목사님이 이렇게 말을 했다.

“아, 그거요 그 사람들이 은혜를 못 받아서 그래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내 입에서 나갔다.

“은혜를 못 받아서 그런게 아니에요. 그것은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같이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다 공감을 하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사실 우리는 은혜를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를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비켜 가기를 잘한다.

그런데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다름 아닌 구원을 받는 문제이다.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들은 은혜를 받고 못 받고를 떠나서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생활을 살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생활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말이 아니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사는 것이요 생활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 17)


믿음은 교회를 다닌 것 이상의 일이 믿음이다. 교회를 다녀도 믿음이 없이 다닐 수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23살 될 때까지 믿음이 없이 구원받지도 못하고 교회만 열심히 다녔다.


믿음은 교회의 직분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집사도 장로도 때로는 목사도 전도사도 구원받지 못하고 그 자리에 들어 갈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다.


믿음은 교회 생활과도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교회생활을 잘 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래 전에 칼국수 집에서 옆자리에 앉은 세 사람의 아낙들이 말하던 것을 엿들은 것이 기억이 난다.


그중에 한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얘들아 내가 이번에 교회에서 여선교회 총회장이 됐잖니? 그런데 우리 남편이 교회갈 때마다 왜 가느냐고 묻길래 그때마다 밥을 하러 간다고 했더니 어느날 나에게  말이 ‘니가 교회 식모냐? 맨날 교회에 밥하러만 가게’그러는거야.”


나는 그 순간에 이 세상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그렇다. 그 총여선교회장의 남편은 불신자지만 교회도 다니지 않지만 그 총여선교회장보다는 더 똑똑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어느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다.

“장로님,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장로입니다.”

“그래요, 그럼 가짜가 틀림이 없겠네요.”

“......”

“이와 같은 시대에 장로라면 거의 다 가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지요.”

“......”

“성경을 압니까?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까? 전도를 합니까? 초대교회의 장로와 같은 사람을 이 시대에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예, 그런데 그 사람이 이혼했답니다.”

“그것 보세요.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없잖아요.”


사실 그 사람만이 문제가 아니다.

주님은 나무를 열매를 보아서 알겠다고 하셨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그 말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 없으면 가짜라는 말이다. 그리고 열매가 없으면 그것은 백발백중 가짜라는 말이다.


왜 열매가 없는가?

구원받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왜 주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 없는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 안의 가짜들에게 오랫동안 너무나 관대했던 나머지 이제는 교회밖에 있는 죄인들에게까지 가짜의 냄새를 풍김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교인들로 인하여 이방인들 가운데 갖은 맹렬한 비난과 모독함을 받는 현실 가운데 살고 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엄한 사실이다. 


어느 목사가 목사같지 않은 인격과 생활을 살고 세상 사람들에게 조차 욕을 먹을 만한 불의한 짓을 해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의 문제를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가짜인가를 분별하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래야만 그 영혼도 살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장로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일을 하고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만인에게 욕을 먹는 일을 그냥 예사롭게 보아서는 안 되고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데에서 부터 문제를 접근해야 그 영혼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집사라 불리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 할 줄을 아는 교회의 풍조가 되어야 신앙양심은 물론 사회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누가 스데반 집사와 같이 빌립 집사와 같이 전도하고 핍박을 받고 순교를 할 만한 집사가 누구인가 말이다.


지금은 이와 같이 초대교회의 일군들과 비교할 때에 짝퉁수준의 목사, 장로, 집사들이 교회마다 수두룩한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하는바 대로, 아니면 아니라고 양심선언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목사를 그만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목사지만 목사 자질이 심히 부족함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장로를 그만두고 집사를 더 이상 안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제발 교회 안에서 자격이 있는 것처럼 외식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나 교회 앞에서 나는 말씀도 모르는 장로요, 말씀대로 살지도 않는 장로요, 나는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사는 집사라고 고백을 하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신앙양심은 고사하고 인간양심에라도 맞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동안에 황당한 것은 목사라는 사람이 전도를 훼방하고 장로라는 사람이 전도를 비방하고 교회가 교단이 전도를 하지 못하게 하고 또 회개를 하지 못하게 하고 죄를 자백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한 모든 사람들을 돌아 볼 때에 그들은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구원조차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불의한 일을 하고 의인들을 핍박하고 주님의 반대편에 선 것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나 들어 보자.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 12:30)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가 없다. 더 이상의 기준도 필요가 없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주님을 반대하는 자이며 주님과 함께 영혼을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그와 같은 이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생활을 사는가? 주님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반대하고 주님과 함께 영혼을 모으기 보다는 헤치고 있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구원받고 일 년 육 개월 만에 직장에 들어갔을 때에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만난  예수를 소개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교인들의 인격과 불의와 부도덕한 행실을 말하면서 자기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때마다 “그 사람들은 가짭니다”라고 확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나도 가짜였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믿었고 구원을 받아서 변화되었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직장에서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고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그들과 다른 생활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많은 직장 동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남자 다섯 명으로 시작한 성경공부 모임이 오년 만에 300명이 넘었다.

그들은 단지 예배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구원받은 변화를 경험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 영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직장동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변화된 생활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서 새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생활도 변화되고 인격도 변화된 증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때에 그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자기의 구원과 남의 구원을 말했다.

다른 말들은 거의 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최고의 화두는 “구원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이 되어야 한다.

강단에서 이와 같은 질문이 회복되어야 한다.

회중석에서도 이와 같은 질문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 안에 가짜가 줄어드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무르익은 영혼들을 추수하는 복음의 마감시간인 것이다.


이 천년 전에 제자들을 전도를 보내시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명하셨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0:5-6)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씀을 하실 것이다.


“동네로도 가지 말고 길거리나 시장으로도 가지 말고 차라리 교회 안에 있는 영혼들에게 가라.”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지도 나누어 주지 말고 잘 모르는 누구에게 막연히 교회 나오라는 말도 하지 말고 차라리 교회 안에 있는 영혼들에게 구원받은 사실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확인하라.”


이렇게 교회 안에 가짜들이 구원을 받는 일이 급한 것이다.


나도 예전에는 교회 안에 있는 가짜이었다.

혹시 당신도 예전의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혹시 당신의 식구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뜬금없이 교회만을 다니고 있는 가짜가 아닌가?

혹시 내가 가르치는 주일학교 아이들은 구원을 받았는가?


가짜는 슬픈 것이다.

세상에서 가짜는 어쩔 수 없다 해도 교회 안에 가짜는 영원히 멸망 받고 불행해 질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진짜가 되는 은혜가 임해야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진짜가 되는 은혜가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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