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확증하는 헬라어 시제 한 가지


“장로님, 우리가 받은 구원은 취소될 수 없는 구원이요, 우리가 받은 영생은 빼앗기지 않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지만요, 요한 웨슬레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받은 구원은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요한계시록 사경회 중에 쉬는 시간에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를 믿고 죄에 빠지면 받은 구원이 취소되고 생명 책에서 이름이 흐려진다고 요한 웨슬레가 말을 했다고 했다. 아마도 장로교의 칼빈의 예정론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에 여러 교단의 목사님들이 같이 있는 자리이었기에 미묘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내가 말을 아니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목사님, 요한 웨슬레가 그렇게 말을 했는지 나는 확인을 할 길이 없지만 만약에 요한 웨슬레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그의 중심은 아니라 생각되고 아마도 그가 표현을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에 약간의 부담을 느끼면서도 주님이 주시는 지혜를 따라서 대답을 이어갔다.


“이와같은 문제는 지난 수세기동안 시간만 나면 대두되어 왔던 문제이지요. 우리는 이문제에 있어서 주님의 접근방식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눅6: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느냐 아니 받았느냐를 분간하는 것은 사람에게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분간할 수 있는 방법을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분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가 있는 사람은 생활이 있습니다. 곧 말씀으로 사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하고는 마치 강의시간인 듯 말씀을 이어갔다.


영생이 있는 자는 생활이 있다.

우리말과 달리 영어는 생명도 라이프(life)이고 생활도 라이프이다. 생명과 생활이 같은 단어이다. 사실 생명이 있으면 생활이 있는 것이다. 생명이 없으면 생활이 있을 수가 없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는 받은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생활이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이요,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말씀으로 사는 생활이요,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생활을 공유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육신의 생활도 그 생활의 열매가 있는 것과 같이 영적인 생활도 반드시 생활의 열매가 있다. 그 열매는 주님을 따르고 살면서 그 결과로 주님의 거룩한 인격을 닮으며 말도 행실도 거룩하고 깨끗해지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세상의 죄인들에게 감화를 끼침으로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어서 그들 중에 나를 보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이 열매이다. 전도의 열매는 반드시 생활의 변화와 인격의 변화에 뒤를 따라 오는 것이다. 생활이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되고 그로 인하여 영혼이 구원을 받는 전도의 열매가 있는 것이 주님의 제자 생활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열매이다.


여기에 요한 웨슬레와 요한 칼빈의 오류가 있다.


그들은 다 구원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를 먼저 따진 것이다.


그래서 예정론과 만인 구원론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지난 수 세기동안 교회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든 것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어느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는 주님만이 아시는 것이다.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알아도 말을 할 수가 없고 확신할 수가 없다.

가롯 유다가 구원받지 못한 것은 제자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이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마 26:22-25)


그들은 누가 주님을 팔지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구원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주님에게 “내니이까?”라는 질문을 각자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롯유다가 “내니이까?”하고 질문했을 때 그렇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좋을 뻔 했다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주님은 이전에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4-66) 


구원을 받는 것은 아버지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고백했을 때에도 주님은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구원을 해주시는 이도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를 가리는 것도 주님만이 하실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할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의 기준을 제시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구원을 받았느니 아니 받았느니는 사람이 판단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분간할수 있는 기준을 주셨다.

그것은 생활과 열매로 아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어떤 사람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전과 다른 생활을 살고 이세상의 사람들과 질적으로 다른 변화된 생활을 살면 그사람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 틀림이 없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어떤 사람이 그를 통해서 누가 예수를 믿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열매가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틀림이 없다. 그래서 주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7-18)


일반의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고자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의 문제에 집착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어느 누가 구원받은자의 생활을 살고 열매가 있는가는 따지는 것이 더 중요하고도 쉬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헬라어 시제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40년전에 개인적으로 잘아는 목사님이 있었다. 그분은 이미 천국에 가셨지만 날마다 기차역에서 전도를 하셨고, 사랑도 많고 헬라어와 영어도 잘하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당신이 번역한 책 한권을 주신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읽다가 번역의 오류가 많고 문장이 연결이 잘 안되어 덮어 놓고 읽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그 책을 보고 원서를 사서 읽게 되었다. 그 책은 다니엘 스텔레의 “Mile-Stone Paper” ,곧 이정표 책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1877년에 쓰인 책이었다. 이 책은 그 목사님이 번역한 책 중에 다섯 번째 장에 “Tense Readings of Greek Testament”(헬라어 성경의 시제연구)를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석들 대부분이 헬라어 시제와 여러 가지 문법적인 분석이 결여된채 헬라어의 정밀성을 무시하는 교육을 받은 주석가들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와이너나 버트맨같은 이들은 주석학자들이 헬라어 동사시제에 관하여 전혀 맹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비판했다고 말한다.(Mile-Stone Paper. Daniel Steele. P. 54)


그리고 다니엘 스텔레는 우리가 구원을 받은 상태를 나타낼 때마다 현재형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헬라어를 주의 깊게 연구하면 프리머스 형제회나 어느 평신도 전도자의 말과 같이 한번 예수를 영접하는 단 일회적인 믿음의 행동이 영원한 생명을 기업으로 받도록 약속되어지는 마치 한번의 불입으로 결코 무효화될수 없는 보험증권을 주는 것과 같이 말을 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다라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Ibid.P.59)  


여기서 우리는 그책중에 있는 모든 것은 다루기 힘들고 그중에 한가지 사실만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Pre)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Pre) 자는 영생을 얻었고(Pre) 심판에 이르지(Pre)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Per)” (요 5:24)


여기서 Pre는 현재형(Present)을 말하는데 현재에도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Per는 완료형(Perfect)으로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말씀의 번역은 시재를 고려할 때에 잘못 번역이 된 것이다. 이말씀을 바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도 내말을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으며 나를 보내신이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믿는 자는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는 자이며 그는 반복해서 계속적으로 정죄(여기서는 시재상으로보아도 심판이라기 보다는 정죄가 맞는 번역이다)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이며 이미 벌써 사망에서 생명으로 완전히 옮겨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완전히 다른 번역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계속 반복해서 말씀을 들으며 계속해서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계속해서 믿는 생활이 있는 사람은 지금 영생을 소유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지만 지금 주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반복적으로 믿지 않는자는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반복해서 계속 정죄함을 받지 않는자가 구원을 받은자이며 그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벌써 옮김을 받은 사람이며 생활속에서 정죄와 심판에 빠지는 사람은 구원을 의심해야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칼빈의 의도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정론 때문에 자신이 택함을 받았는지 아니받았는지에 집착을 하다보니 지금 현재에 주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주님을 보내신 이를 쉬지 않고 믿는 생활을 도외시한다. 말씀도 안 읽고 기도도 안하고 전도도 안한다. 전도를 해도 바리새인들이 했던 교인하나 얻기 위한 광고차원의 선심적인 행위만을 하면서 그것이 전도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열매는 고사하고 생활도 없는 유령과 같은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와같은 것들은 칼빈이나 요한 웨슬레가 의도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만일 죄를 짓고 넘어지면 우리의 대언자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이 쉽게 정죄 의식에 빠져서 오히려 자신은 택정함을 받지 않은 자 같다는 생각에 들어가는 역풍에 휩쓸려 빠지게 된다. 이것은 지나간 어제나 오늘이나 교단이나 교파와 교회 어디를 불문하고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항상 듣지 않는다. 그리고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항상 믿지 못한다. 그리고 마귀의 참소에 빠져서 죄를 지을 때마다 정죄의식 가운데 들어감으로 자기가 받은 구원을 의심하는 고통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용서하지 못하고 마귀와 한가지로 그를 정죄하는 자리에 들어가며 그가 받은 구원을 의심하고 공격하는 일을 한다. 그것은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기 때문에 나오는 당연한 결과요, 행동인 것이다.


이것은 예정론자나 만인 구원론자나 차이가 없는 공통적인 사항이다.


그것은 구원을 생활과 열매로부터 접근을 하지 않고 구원받았느냐 아니받았느냐의 문제, 곧 인간이 할수도 없고 알수도 없는 문제의 접근방식을 우선적으로 취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들이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대부분 이구절을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을수가 있고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풀이를 해놓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이 행위가 되고 구원의 조건이 되는 무의식중에 은혜를 배제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율법주의가 나오는 것이다.

육체를 신뢰하고 행위를 신뢰하는 것이 율법주의이기 때문이다.


열매가 있으면 생활이 있는 것이요, 생활이 있으면 구원을 받은 것이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열매가 없으면 생활이 없는 자요, 생활이 없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 확실한 사람이 분명하다.


이제는 말씀을 바로 알고 순종하여 성령을 좇아 사는 생활을 살아야할 때가 온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심이 매우 임박한 시대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P.S. 아마도 주님이 허락하시면 이번 여름의 집중코스는 헬라어 시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시간을 가질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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