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 우리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전도여행이 끝나고 어떤 목사님이 나에게 던진 질문이다.

아마도 그 목사님은 존재적인 죄인임을 말하니까 생각이 많이 복잡해진 것 같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백 번 만 번의 의인이다.

그러나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거저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칭의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무슨 죄인이며 존재적인 죄인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자기가 어떠한 죄인이었었는데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부르셨는지를 절대로 한시라도 잊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적인 죄인의 인식이 필요한 이유이다.


바울이 자기를 일컬어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한 것은 그가 지금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는 구원을 받고 나서도 구원받기 전의 자기의 모습을 잊은 적이 없다. 그는 구원을 받고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하였으며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가 어떤 죄인이었는데 구원을 받았는지 구원받기 전과 구원받고 나서의 격차를 잊어버린 적이 없다. 그것이 은혜를 아는 것이다.


반대로 구원받기 전과 구원받고 나서의 간격을 잊어버리는 것을 가리켜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출생과 출처가 죄인인 것을 잊어버리는 교만 중에 가장 큰 교만이다.

 

세상에서도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는 속담과 같이 이전의 존재에 대힌 기억을 상실하면 배은망덕하다고 비난을 받는다.


성도가 교만해지면 자기가 존재적인 죄인임을 상기하지 못하고 행위만 죄를 지은 것으로 착각을 하는 교만에 빠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잘못했느냐 안했느냐를 따진다.

특별히 바리새인들 곧 율법주의자들은 행위를 문제 삼는다.

그래서 그들은 행위를 회개한다.

그와 같은 회개는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기를 거부할 정도로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행위의 결과만을 무서워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것이 임박한 진노를 피하고자 하는 얄팍한 수단으로 회개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행위는 인식하지만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타인에게도 죄의 행위를 문제 삼는다.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은 자기의 아름다운 행위만을 드러내고 세리의 행위를 더럽게 여겼다.

그러나 세리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부르짖는다.


바리새인에게는 행위가 문제이나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가 문제가 되었다.

바리새인은 행위가 드러나지 않으면 죄가 아니고 남에게 드러낼 수 있는 행위는 선행으로 치부되어 그것을 자랑한 것이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을 했다.

몇 가지 죄의 행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가 죄인인 것이 문제임을 알고 그것을 아파한 것이다.


행위를 자랑하거나 행위를 회개하는 것은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

자기의 존재가 죄인 됨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행위를 구제한 것이 아니라 죄인인 나를 구원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구원을 받았어도 자기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오늘도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행위로 자기를 꾸미는 사람은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만 가운데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와 같은 종교인들로 수두룩하다.


다윗은 자신이 태생적인 죄인임을 항상 고백을 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구원받기 전이나 구원받고 나서나 자기의 죄인 되었던 악함을 알고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 다윗과 같이 항상 은혜 가운데 사는 비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잊어버리시고 기억도 아니하신다. 

그리고 거룩함 가운데 사는 사람은 죄의 결과는 잊어버려도 죄를 지었던 존재를 잊지는 아니한다.    

현재적인 거룩함 가운데 사는 사람은 이전의 죄와 악함을 아파하는 아픔까지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지금 죄를 이기고 사는 사람에게는 이전에 죄를 지을 때의 어리석음을 아파함이 거룩할수록 더 아파지는 것이다.


성도가 거룩할수록 죄가 더 아파지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거룩함에는 아픔이 있는 것이다.

은혜를 아는 자는 아픔이 있다.

하물며 은혜를 믿는 자에게는 얼마나 아픔이 있겠는가?

 

그러나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은 이 거룩함의 아픔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늘날도 이 거룩함의 아픔이 없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율법주의자이든지 아니면 구원을 받고도 율법주의, 곧 행위주의에 빠진 사람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귀한 구원을 받고도 행위의 잣대 속에 자기를 집어넣어 자기의 존재조차도 잊어버리고 행위만을 중시하는 율법주의에 빠져 사는 것이다.



나는 갓 구원을 받고 나서 하루 열몇 시간씩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은 내가 알고 있는 죄인인 나를 보여주신 것만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죄인인 나의 모습도 보여 주셨다.


그때 즈음에 인사동의 골동품상이 살해를 당해 서교동의 자기의 집의 담벼락 밑에 매장되는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 범인이 잡히고 사체가 발견되면서 신문마다 거의 모든 면을 그 기사로 도배를 하다시피 장식을 했다. 길거리에서 동네에서 이웃집에서 버스에서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을 할 때에 나는 그 범인이 나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 죄인임을 말씀으로 나에게 보여 주셨다. 부속품으로 말하자면 한 개의 부속품도 틀리지 않는 것이 없는 죄인이고 마음의 악함도 조금도 틀리지 않은 태생 자체가 죄인으로 태어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죄인, 곧 존재적인 죄인이요, 바울이 말한 “죄인 중에서도 괴수”인 내 모습을 주님은 흉악범의 기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보여 주셨다. 성경안에 들어가면 이 세상에 나 같은 죄인이 어디에 하나라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떠나면 내가 그 죄인이 아니라 남이 그 죄인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기도한다.

“천 번 만 번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은 이 죄인을 말할 수 없는 죄악의 기가 막힌 구렁텅이에서 건져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주님을 닮아 거룩함에 참예하면 할수록  나의 괴수 된 죄인의 모습이 드러나고 보이는 것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행위를 아파하는 회개가 아니라 그와 같은 행위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죄인 된 존재를 아파하는 세리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거짓되지 않고 참된 회개는 죄를 아파하지만 그보다 나를 아파하는 것이다.


죄를 아파하기보다는 나를 아파하고 사는 것이 거룩함이다.

행위를 아파하는 것보다는 존재를 아파하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아파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잘못이 나올 수밖에 없는 천박한 인격을 아파하는 것이다.

죄를 아파하기보다는 아직도 변화되지 않는 나를 아파해야 하는 것이다.  


행위보다 존재를 아파하는 것이 거룩함이다.

그 거룩함이 있는 것이 한 사람의 성도가 날마다 은혜 안에 사는 증거인 것이다. 

(*.220.122.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