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목회자 훈련을 시작해야 하는데 늦잠을 잤다.

8시에 시작하는데 8시에 눈을 뜬 것이다.

아침도 거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허둥지둥 일어나서 옷을 찾아 입으면서 마음속에서 부르짖음이 올라왔다.

 

주님 아침에 찬송 인도하면서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나요?’

 

몇 발자국이 못돼서 내 마음에 주님이 한마디를 떠 올려 주셨다.

 

‘feeling’, 곧 감정이라는 단어이었다.

 

그러면서 곧 또 다른 단어가 떠올랐다.

 

‘personality’ 그것은 인격이라는 단어이었다.

 

그러면서 이전에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주님이 떠 올려 주셨다.

 

십자가 사랑에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울고불고 했어도 아침만 되면 하룻밤사이에 그 감정이 사라지는 허망함을 수없이 많이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감정을 구하고 감정을 붙잡고 잃어버린 감정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일들을 하면서 그와 같은 감정을 또 다시 잃어버리고 다시 찾아도 잃어버리고 하는 일을 되풀이 하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그 허망한 감정과의 싸움이 시작이 되었다.

 

아침에 골방에서는 주님을 향한 감정이 있었는데 직장에 출근해서는 씻은 듯이 사라지는 감정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감정은 쉬 사라지는 안개와 같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붙잡을 레야 붙잡을 수 없는 감정

품을 레야 품을 수 없는 감정

다시 찾고 싶어도 다시 찾을 수 없는 감정

 

그 감정을 의지하는 내가 그렇게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을 깨닫는 은혜를 주님이 주시면서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주님의 사랑은 감정이 아닌데

주님의 사랑은 인격인데

그것을 추구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이는 감정으로 나를 속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감정에 나를 속이도록 나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감정의 노예로 사는 것이었다.

 

죄로부터 해방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감정에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나를 허망하게 하는 감정과의 싸움이 시작이 되었다.

실상은 그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저녁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감정으로 울고 아침이 되면 싸늘하게 식어버린 내 모습을 아침마다 확인을 하면서 그런 나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면서 살았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인격을 붙잡는 것은 알지 못하니 감정으로 주님의 인격을 대체하는 일은 지속이 되었다.

 

만족하는 것 같다가도 또 허망해지고 하는 일들을 되풀이 하면서도 거기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그와 같은 감정을 버리고 주님의 인격을 붙잡는 싸움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차츰 주님의 인격을 내가 붙잡게 되고 그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살아지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인격에 미약하나마 아주 조금씩 반응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을 했다.

 

그러면서 주님의 얼굴을 뵈옵고 주님이 나를 감동하시고 만나주시는 은혜를 받아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되는 은혜를 받았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도와주는 분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으로 주님을 느끼려고 하는 잘못에 빠져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감정을 자기에게 이입을 하고자 기도를 이용하고 찬송을 이용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자기의 감정을 북돋우는 도구로 이용을 한다.

그것이 바알신앙이요, 하나님이 없는 신앙이요, 인격적인 믿음이 없는 신앙이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사실보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보다는 감정에 의존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

 

모든 우상숭배가 그러하고 이방종교들이 예외 없이 감정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요, “주여, 주여하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도 못하고 인격적으로 만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인격적인 반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감정을 더 의지하고 감정을 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복음성가를 통해서 교인들을 혼적으로 감동을 시키려는 시도들과 교인들에게 억지로 감정을 이입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그들이 인격적인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생활이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들을 하는 것이다.

 

생활이 없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없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이 없다.

하나님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생활이 없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인격의 대체품으로 감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훈련을 받은 어느 목사님이 수년전에 구정사경회에 왔다.

그분은 집회 중에 어느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장로님이 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오래전에 훈련을 받았으나 목회는 부업이고 사모님이 하는 유치원이 주업인 격의 생활을 살고 있는 분이었으며 그 유치원의 운전기사를 하면서 그렇게 목회를 한다는 분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 그분이 옛날에 은혜를 받았던 때의 그 감정이 그리워서 찾아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감정을 생활 속에서 잃어버리면 그 감정을 받았던 기도원으로 가고 부흥회로 가고 가서는 그 감정을 구하면서 그 감정 속에 빠져 들어가려고 하는 인위적인 노력들을 하고 애를 쓰는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구하는 것에 반하는 것이요,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성경에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시내산으로 올라갔다.

백성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모세를 배반하는 마음이 들어갔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32:1)

 

그래서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가리켜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선언한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32:4)

 

그리고 금송아지를 섬긴다.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32:5)

 

그런데 그것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가상적인 것으로 백성들을 속인 것이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뛰놀며 스스로 즐겁게 하는 감정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한 것이다.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32:6)

 

하나님은 모세를 부패한 백성들에게 내려 보내신다.

 

모세가 그의 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여호수아가 먼저 소리를 듣는다.

 

여호수아가 백성의 떠듦을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32:17)

 

백성들이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뛰놀며 노래하는 것이 시끄러운 소리로 들린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보다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갔던 영적인 사람 모세의 판단은 그와 달랐다.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32:18)

 

하나님의 백성, 곧 광야교회는 영적인 군대이다.

군대는 반드시 두 가지 노래를 부른다.

이겨서 부르는 승전가인 승리 찬송과 패배하여 부르짖는 회개 찬송을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듣기에 그들의 노래는 승리 찬송도 아니요, ‘회개 찬송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노래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람의 노래는 사람의 감정을 돋우는 것임을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모세는 공분에 사로잡혀 대노하여 손에 들은 하나님께 받은 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린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32:19)

 

그리고 백성들이 만들은 금송아지를 불살라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마시운다.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32:20)

 

그러면서 그는 이전에 받았던 은혜를 다시받기 위해서 왔는데

이것이 우상을 섬겼던 백성들의 결말이다.

 

마귀는 우리의 감정을 이용해서 우리를 속이는 일들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그와 같은 감정이 이입이 되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도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아서 나를 실망시킨다.

 

나는 그와 같은 성향에 자주 빠지는 나 자신이 그렇게도 미웠다.

그래서 그와 같은 나 자신과 싸우고 감정과 싸웠다.

거짓된 감정과의 싸움을 하면서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인격을 붙잡으려고 끊임없이 은혜를 구하면서 부르짖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인격적인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에 반응하면서 사는 주님을 따라 사는 생활을 배웠다.

 

그리고 그 주님을 모시고 사는 은혜를 받았다.

주님은 그런 나를 즐거움으로 만나주셨다.

시간마다 분초마다 그렇게 만나주시고 말씀하시고 음성을 들여 주시는 은혜를 주셨다.

 

오늘 아침에 운전을 해서 협회로 오면서 주님이 오늘 아침에도 나에게 영감을 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면서 감격하고 집회 시작을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나누면서 목사님들과 함께 울고 찬송하면서 울었다.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밤과 아침에 계시로 보여 주사 항상 은혜를 주옵소서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내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나의 꿈은 허망한 것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다.

 

세상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 주님, 지금도 감정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애굽을 건너는 은혜를 받고도 감정에 매여 종노릇을 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건져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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