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사랑함이 많으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전 엿새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 거하신다.

 

시몬은 바리새인이요 이전에 문둥병자였으나 주님에게 고침을 받는 은혜를 받았다. 그는 아마도 주님이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자기집에 머무르시기를 청했을 것이다. 자기집은 베다니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큰 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문둥병이라는 불치의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고 말할수 없는 감사와 사랑을 주님에게 표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은혜가 시들해지고 주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도 식어버렸다. 아마도 주님께 드린 말씀 때문에 이번에도 자기집에 거하심을 용납은 하였으나 그의 마음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은혜도 다 상실하였다. 뿐만아니라 취근에 산헤드린에서 예수를 잡아 죽이기로한 자기 계파의 현실에 민감해 있을 무렵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친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한다는 부담 때문에 주님에게 발씻을 물도 주지 않고 주님의 입을 맞추지도 않았으며 그흔한 감람유도 주님의 머리에 붓지 않았다. 이전에 문둥병을 고침을 받고나서는 아마도 자기가 주님의 발을 직접 씻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살갑게 끌어 안고 온갖 감사와 애정을 다 표현했을 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사랑이 다식어져 버렸다. 교계에서 자기계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식이 그로하여금 주님에게 냉담하게 한 것이다.

예수전도협회의 훈련을 받고 전무했던 은혜를 받았던 때문에 온갖 감사와 사랑을 말하던 이들이 어느교단의 핍박이 시작이 되고 각각 자기들의 살길을 찾아서 떠난 모습과 오버랩이 되는 현상이다. 일부 협회의 간사들도 혐회가 어려워지자 살길을 찾아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고 혐회를 해롭게하던 교단에 목사로 앉아 있으면서도 발길을 뚝 끊고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멀리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 주님의 아픈 마음을 십분 이해할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잡혀 죽으시기 이틀전에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는 현실도 버릴수 없고 주님의 은혜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주님은 떡벌어지게 잔치상을 차린 그보다도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주목하셨다. 그러나 시몬은 속으로 생각을 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눅 7:39)

 

주님은 그의 마음을 아시고 그에게 질문을 하셨다.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눅 7:41,42)

 

시몬이 대답을 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눅 7:43)

 

주님은 시몬의 판단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이어 말씀하셨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44-50)

 

시몬과 같이 처음사랑을 잊어버리고 한때 주님이 자신에게 베푸셨던 은혜를 상실하면 율법주의가 들어온다.

율법주의의 관점은 누가 죄를 더 많이 지었는가? 이다. 그러나 은혜는 무엇인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누가 죄를 많이 사함을 받았는가?”이다.

 

오늘날 교회안에 있는 많은 시몬이 있다.

교회밖에 있는 죄인들은 누가 죄를 더 많이 지었는가?라는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을 비방하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저들의 아비는 마귀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죄사함의 진리도 알지 못하고 죄사함을 받은 은혜와 사랑도 무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안에서도 은혜를 상실하고 처음사랑을 잃어버린 바리새인 시몬과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받은바 은혜대로 행하고 말하는 이가 적다는 말이다. 그사람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든지 은혜를 받고 바리새인 시몬과 같이 은혜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버림받고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갈 자격밖에 없는 죄인이 받은바 사랑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시몬은 그여자를 보면서 “누가 죄를 많이 지었는가?”라는 생각을 했지만 주님은 그여자를 보면서 많은 죄가 사함받은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로 보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는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많은 죄를 지었으나 그많은 죄가 사하여졌기 때문에 주님을 많이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마리털로 그발을 씻고 그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그발에 옥합을 깨뜨렸다고 말슴하신다. 이여인의 모든 행위는 주님의 발에서 이루어졌다. 그말은 주님이 너무나 위대하시고 크신 분이기 때문에 여자로서는 귀한 눈물도 입술도 마리털도 옥합의 향유까지도 주님의 발밑에 갈가치밖에 없다는 신앙고백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여인은 주님이 내일모레면 죽으실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죽으심은 자기를 위한 죽으심이요 자기와 함게 죽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에 향유를 전재산으로 사랑하던 자기가 주와 함께 죽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필요가 없고 주님의 발밑에 쏱아버릴 가치밖에 안된다는 신앙고백이었다. 그래서 그는 옥합보다도 자기의 전부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했다. 그이유는 사함을 받은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여인의 향유보다도 더 많은 비용을 들여서 주님을 위해 잔치를 차린 시몬에게는 그와같은 사랑이 없었다. 그이유는 죄사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요 사함받은 사실을 망각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함이 적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죄를 많이 지었는가를 따지는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은 주님을 사랑함이 많을수가 없다. 시몬이 주님을 사랑했지만 주님의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랑으로 사랑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을 보면 믿음은 죄를 사함받는 것이고 구원도 죄를 사함받은 것이다. 주님을 사랑함이 적은 사람은 믿음을 상실한 사람이요 구원받은 사실도 희미하게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첫사랑을 상시리한 사람이다. 처음 믿음도 잃어 버렸다. 그래서 속으로 남을 판단하고 비교하면서 누가 죄를 더 많이 지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죄를 사함받아야 오늘도 주님을 사랑함이 증진이 된다. 날마다 죄를 사함받고 사는 사람은 날마다 주님을 사랑한다. 어차피 우리는 예수를 믿고도 죄를 짓는다. 그것도 매일 죄를 짓고 하루에도 수십번 수백번씩 죄를 짓는다. 주님은 그죄를씻으라고 하시고 죄를 씻는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너희 죄를 자복하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렘 3:13전)

 

자백하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렇게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는 것이다. 사함을 받은 일이 많고 주를 사랑함이 많은 사람이 구원받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오늘도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시몬과 같은 율법주의적인 관점인가 아니면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주님의 은혜의 관점인가?

 

시몬의 율법주의적인 관점을 버리고 처음사랑과 은혜를 회복하여 살기 위해서는 오늘도 죄를 사함받는 일이 많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을 사랑함이 많아 지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에게 육신적으로나 잘했던 그러나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시몬같은 당신도 옥합을 깨뜨린 여인과같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유월절 엿새전에 베다니에 올라오신 주님은 죽으시기 이틀전에 이와같이 시몬의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시키신다. 그주님이 지금도 당신의 사랑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당신의 안에서 일하시고 계신다.

(*.8.21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