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적인 접근이 필요한 말씀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본다고 하는 자들의 오류를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요한계시록을 가르치면서 많은 목사님들이 요한 계시록을 잘못 가르쳤다는 고백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을 했다. 어떤 분은 요한계시록으로 신학교 졸업논문을 쓴분들도 있었고 요한 계시록공부를 남달리 열심히 한사람들도 의외로 많이 있었다. 의외로 남몰래 베리칩이나 666에 대하여 인터넷에서 지식을 접하여 탐닉하고 그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설교를 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와같은 사람들은 말씀의 실제가 드러나면서 가장 큰 충격들을 받았다.

 

사실 요한 계시록은 잘못 이해하고 잘못 풀고 잘못 가르칠 가능성이 다분한 말씀이다.

 

어느지방에서 말씀을 전했을 때에 요한계시록을 꿰다싶이 알고 가르치는 목사님의 사모님이 집을 떠나 숙식을 하면서 참석을 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남편 목사님에게 “당신이 가르친 것과는 너무나 틀리다”고 말을 했을 때에 “사람들마다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말을 전해 듣고 참 마음이 아팠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실보다도 사람들의 해석의 여부에 비중을 두는듯한 그말에 말씀을 하신 장본이신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사경회가 1,2,3차로 진행이 되면서 사람들의 충격적인 반응은 그동안 잘못된 것을 배웠고 가르쳤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시대에 마귀가 바리새인들과 교회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직도 메시야가 오시지 않은 것처럼 철저하게 속인것과 같이 그래서 예수를 알아 보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잡아 죽인 것과 같이 오늘날도 계시록의 대부분의 말씀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관한 말씀이라고 속이는 마귀의 속임수가 교회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대부분의 말씀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경악들을 금하지 못하였다.

 

왜 이와같은 일이 일어났는가?

 

요한계시록은 마귀의 정체를 뼛속까지 드러내는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요한 계시록이 교회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야지만 교회를 속이는 일을 계속할수 있기 때문이다.

 

마귀가 교회를 속이기 쉬운 방법은 지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말씀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접근을 하는 것이다.

지식으로 배우고 지식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의 말씀만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다 그렇지만 말씀은 순종하는 것이다.

에스라는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쳤지만 그는 그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 연구하였으며 자기가 준행하고 순종한 말씀만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결심을 하였고 그렇게 그는 백성들의 눈을 뜨게하여 에스라의 부흥을 이스라엘에 주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10)

예수님시대에도 그러하였지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그래서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본다는 말씀을 하신 목사님에게 그분의 오류를 분명히 해주면서 주님은 나에게 38년전에 주셨던 은혜가 생각이 나게 하셨다. 그래서 그대로 그분에게 나의 체험을 전했다.

 

“목사님 저는요 말씀을 알려고 성경을 읽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알려고 하는 것이 교만이요 죄입니다. 또 저는 주님이 많은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순종하게 했지만 지금 이날 이시간까지도 내가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본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순종하지 못한 말씀이 많고 순종해야할 말씀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안다고 하는 것이 교만이요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땅을 살다간 진실한 주님의 종들가운데 그런 교만에 빠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성경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도 교만이고 죄입니다.”

 

옛날에 어느 지방에 사는 간사가 전도하는 교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데 제가 가르친 것을 가지고 그대로 가르치는 중에 교인들이 자꾸 문제를 일으키고 자기를 대적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이유를 모르겠다고 질문을 해온 적이 있었다. 그때에 부산에서 집회를 하는중이었는데 저녁집회를 마치고 호텔방에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운상태에서 그말을 했다. 나도 모르게 해보지도 않은 말이 내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였다. “이간사 나는말이야 지금까지 성경을 가르치면서 말씀으로 누구를 가르친다고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 나는 말씀으로 그영혼을 사랑해주려고 한 것뿐이야.” 같이 누워 있던 어느간사가 벌떡 일어났다. “권사님 그거 진짜 놀라운 말씀이예요.”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 전등을 키기가 부담스러웠던지 공책을 가지고 펜을 들고 창가로 가서 달빛에 비추어가면서 그말을 받아적었다. 나에게 말을 했던 간사나 그말을 받아 적은 간사는 그후에 다 목사가 되었으나 그말씀대로 변화되고 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말을 할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말씀은 지식으로 성경을 대하고 이해하고 풀고 가르치는 이들에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도 주님이 가르쳐 주신 불변의 진리로 남아 있다.

 

그렇다 성경을 알려고하는 사람은 가르치기 위해서 알려고한다. 그리고 잘가르치고 많이 아는 것을 자기의 공로로 돌리고 교만해진다. 지식을 자랑하고 잘가르치는 것들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남들에게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들의 모습이다. 본다고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자기자신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니 아직도 말씀에 대한 무지함이 그대로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소경적인 접근이다.

 

내가 성경을 모른다고 생각을 하면 말씀을 읽을 때나 들을 때에 주님이 은혜를 주신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말씀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주시는대로 은혜를 받으면 된다.

 

주님이 들려 주시면 듣고 말씀을 듣는 은혜를 받고

주님이 열어서 보여 주시면 말씀을 보는 은혜를 받고

주님이 알게 하시면 말씀을 알게되는 은혜를 받고

주님이 순종하게 하시면 은혜를 주시는대로 그말씀에 순종하면 된다.

 

이것이 소경적인 접근이다.

나는 삼십팔년동안 주님앞에서만큼은 영적인 소경으로 날마다를 살아 왔다. 그래서 지금도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주님의 친절하심의 은혜를 날마다 시간마다 경험을 하고 산다. 잘때에도 말씀을 주신다. 꿈에서도 말씀을 주시고 운동할 때 길을 갈 때에 화장실에서 방에서 혼자 있을 때에는 어김없이 말씀을 가르쳐 주신다.

 

나에게는 주님이 처음부터 말씀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주님이 남달리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말씀을 하신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셨다. 단지 말씀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받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말씀에 순종하여야하는 강력한 부담이 함께 주어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씀도 그렇지만 특별히 요한 계시록의 말씀은 아무나 가르치고 배워서는 안된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알려고 하는 것이 교만이다.

그것을 호기심으로 접근을 하는 것은 아주 악한 일이다.

지식으로 접근을 하는 것은 교만을 가져 온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접근을 하는 것도 악한 일이다.

지식은 배우는 것이나 진리는 순종하는 것이다.

지식은 가르치는 것이지만 순종함은 본을 보이는 것이다.

 

주님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또한 끝을 내시면서 1장과 22장에서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첫장인 요한계시록 1장의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은 맨먼저 하신 말씀이 이말씀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말씀을 읽는 것은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포함한다.

가르치는 것도 듣는 것도 순종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말씀을 끝맺으시면서 맨 마지막장인 22장에서도 이책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이말씀은 요한계시록의 끝만이 아니라 성경책 전체의 끝장도 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는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 아니 되는 것과 같이 요한계시록도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가르칠수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천박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가 순종하지도 않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시대에도 그와같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말씀을 가지고 도구로 이용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막아 죽였으며 구약시대에도 그와같은 사람들이 바알과 이방신상을 섬기는 도를 백성들에게 전하여 백성들로 영적인 간음을 하게 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그로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무서운 재앙을 하나님의 교회안에 끌어들인 장본인들이며 예수님시대이후 지난 이천년동안 그리고 오늘날도 그와같은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교인들에게 요한계시록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접근을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의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을 두려워 하게 한다.

그리고 자기들의 숨겨진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자신의 존경받지 못하는 믿음과 생활을 그것으로 가리우는 일에 쓰기도 한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은혜가 없는 행위를 요구하여 주님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따르게 하는 일에 이용을 해먹는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경고한대로 주의 제자들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일이 과거에도 있어 왔고 지금도 있는 것이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29-31)

 

미국 어느 도시에 이전에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서 삼백여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나와서 개척을 한 목사가 있다. 그일로 인해 그교회 담임목사는 중풍에 걸려 고통을 당하였다. 그는 은행 융자를 해서 건물을 사서 야심만만하게 교회를 시작하였으나 교인들이 하나둘씩 빠져 나가고 이자도 갚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고 빚은 430만불의 거액의 빚을 지고 그고통에 목사부부는 중풍에 맞아서 몸의 절반에 마비가 오는 일을 당한다. 그리고 1992년 종말론에 빠져서 교인들에게 휴거받을 준비를 하라고 속이고 다른 교회 목사들까지도 끌어들여서 죄를 짓게 만든다. 그리고 그교회의 어느 권사가 예수전도협회 훈련을 받았다. 그권사도 나중에 고백을 하는데 사단계회개를 하는 사람에게 빠지고 베뢰아 계통의 윤아무개 목사와 여러 이단적인 냄새를 풍기는 목사들에게 다방면으로 빠졌다고 스스로 고백을 한 권사였다. 그권사가 담임목사에게 예수전도협회 훈련을 받을 것을 권면하였지만 자존심을 내세우며 평신도가 목사보고 여기가라 저기가라 하지 말라고 공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형편이 너무나도 악한나머지 어느날 스스로 정체를 숨기고 그권사에게 훈련장에는 얼씬도 못할 것을 약속을 받아 놓고 참석을 하였다. 두부부가 함께 은혜를 받았는데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는 즉시 둘다 중풍병에서 놓여 해방이 되었다. 마지막날에 그권사가 자기 목사가 얼마나 은혜를 받았나 궁금한 나머지 약속을 깨고 훈련장소로 갔는데 자기 목사가 보이지 않아서 염려하며 찾던중에 의자밑에 들어가서 실신하다시피 우는 자기 목사를 찾아 끌어안고 같이 울었다고 한다. 그는 “권사님 내가 잘못했어요”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교회로 돌아가서 예배시간에 전교인들앞에서 설교는 한마디도 못하고 “삼십년 목회 사기쳤습니다.”라는 충격적인 고백을 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로들이 훈련을 받고 교인들이 훈련을 받았다. 그장로들이 금식을 하고 전건물주인 유대인을 찾아가서 삼백만불을 탕감을 받는 기적적인 은혜를 하나님이 주셨다. 교회를 나간 교인들마다 집에 찾아가서 현관에 무릎을 꿇고 죄를 자백하고 교회가 회복이 되는중에 나간 교인들보다도 그목사가 깨졌다는 소식을 듣고 오는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를 채우기 시작을 하면서 재정위기도 벗어났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하여 교만해져서 은혜를 잊어버리고 예수전도협회와 거리를 두고 “왕의 복음”인지 무엇인지를 하고 선교를 한다고 돌아다니고 그러다가 요즈음은 베리칩을 받으면 안된다는 동영상을 제작하여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은 이전에 종말론으로 다시금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이의 유전자적인 모습을 안타까움으로 듣고 바라보면서 언젠가 7,8년전에 그이가 내가 쓴 책과 테입일체를 사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심령이 고갈되니 말씀을 지식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는 마음에 슬픔을 금할수 없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이와같이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에베소에 바울이 세운 장로들가운데에서도 어그러진 말을 하여 주님을 좇아야하는 주님의 제자들로 자기를 좇게할자들이 교회안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기 때문이요 자기가 하나님이 말씀을 알려고 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들이 심판을 더 많이 받는 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

 

그러므로 지금같은 때야 말로 말씀에 대한 소경적인 접근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 요한 계시록을 하면서 어떤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들에게 쉬는 시간이나 식사시간이나 가리지 않고 “요한 계시록을 지금 가르치고 있는 아무아무 목사, 아무아무 교수를 모르는 당신이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거듭해서 되뇌이고 다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나를 소경으로 여길 때에 그 때에 주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8.21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