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전 죄인 되었을 때에 살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 피조물로서의 삶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은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것이요 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죄를 일러주시고 십자가로 인도하시고 죄를 씻어 정결케 하시는 일을 날마다 하시고 우리로 죄를 짓게 한 인격과 성품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고쳐 주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주님과 맞지 않는 것들을 제하여 주심으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이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시다.

 

어떤 이들은 꽤 오래전부터 “예수의 시대가 가고 성령의 시대가 왔다”는 허튼 말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성령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실상, 은사를 강조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가? 성령이 누구인가? 예수의 영이 아닌가! 애써 그와 같은 말들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 없는 은사”를 구하는 근본자체가 잘못된 사람들이다. 또 그와 같은 이들에게 많은 목사들이 속아 넘어간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은사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현상과 표적은 마귀가 즐겨 쓰는 속임수임이 수 천년동안 드러나 있는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소경이요 우맹이 되어 마귀에게 미혹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강단에서 사람을 쓰러뜨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와 같은 일이 주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행하는 자들이 영광을 도적질하고 있지 아니한가! 마치 그것을 행하는 자기에게 능력이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주님은 온데간데없다. 그것을 텔레비전으로 중계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주님과 극적으로 상반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주님은 병을 고쳐 주시면서도 아무에게 말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소위 주의 종이라고 거짓으로 자기를 보이는 이들이,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가 능력을 행하는 양 자기에게 능력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은 악하다 못해 가증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은사는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은사는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올 때에 그렇다는 것이고 주님에 의해 쓰임을 받을 때에 그렇다는 말이며 주님께로 100% 영광이 돌아갈 때에 은사가 귀한 것이다.

 

수년전에 집회장소를 잘못 찾아서 그런 집회를 하는 장소에 문을 열고 들어갔던 적이 있었는데 불을 꺼놓고 서로가 괴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귀신이나 역사하는 분위기임을 직감 할 수 있었다. 무슨 이방종교나 사교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제자이다. 증인이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인격과 생활을 사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꼭 누구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의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언행심사를 볼 때에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보이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보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주를 따르는 사람이고 주님의 제자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나간 수십 년 동안 복음도 없고 예수도 없고 십자가도 없는 사람들에게 속아왔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속아 온 것이다. 영혼을 구하는 전도가 아니라 교인을 얻기 위하여 바다로 육지로 다니다가 그 결과로 배나 지옥자식이 되게 하는 바리새인의 전도, 영혼을 사랑하는 전도가 아니라 영혼중심의 전도가 아니라 교회를 하고자 하는 교회중심의 전도, 교회를 크게 하고 자하는 성장주의자들의 전도에 속아 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 자(自)나 타(他)나 주의 제자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며 주의 제자가 된다는 목적을 가진 제자훈련이 아니라 그냥 성경지식만을 가르치고 배우는 공허한 제자훈련에도 오랫동안 속아온 것이 사실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하기 위해 은사주의자들을 불러 은사집회를 하고 교인들의 헌금을 노리는 일들이 있어왔고 야비한 방법으로 교인들의 헌금을 갈취하였음에도 아무도 그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잘못된 사람들을 옳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았다.

 

때로는 구원의 확신도 없고 구원의 즐거움도 상실한 자기영혼의 짐조차도 지지 못하는 교인들에게 교회의 짐을 지워주고 이 기도원, 저 집회에 가서 율법의 짐을 지워 줌으로 교인들이 잘못했다고 목사들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해달라고 빌도록 유도하고 그와 같은 일로써 스스로 즐기고 또한 교인들 앞에서 목회자의 권위를 높이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 이상의 아무것으로도 교인들을 도와주지 못함으로 또다시 교인들이 죄에 늪에 빠지고 세상에 빠져서 마귀에게 속아 세상으로 가는 것들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무능함을 얼마나 드러내었던가?

 

복음이 증거 되지 않고 불신자들이 교회에 악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시대이다.

불신자들조차도 교인을 성도로 보지 않는다.

불신자들이 교회를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는 교회로 보지 않는다.

불신자들이 회심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어느 교회를 가나 다른 교회에서 옮겨온 교인들은 있어도 복음을 믿음으로 회심한 교인들을 찾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에 교회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죄악이며 교회성장을 즐기는 것도 악한 일이며 그와 같은 교회성장을 부러워하며 칭찬하는 것은 어리석게도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가 증거 되고 회심하는 일이 희박한 교회성장은 그러므로 악한 일이며 세상적이며 마귀적인 일이다.

 

이와 같은 일을 보면서 아픔을 가질 때면 옛날찬송가가 생각이 난다.

 

“복잡한 도시사람들 욕심을 품고 떠들 때 주 믿는 사람 은근히 주 예수 음성 듣도다.”

 

외적인 성장이, 외적인 프로그램이, 외적인 은사가 그렇게 목마른가?

그것으로 교인들의 관심을 끌어 교인들을 늘린들 주님의 역사가 아니면 그것은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다.

없어지는 것이요 썩어질 것이요 허무한 것이라는 말이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가?

심령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안의 그의 법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안의 주신 하나님의 법이 곧 성령이 아닌가?

 

주님은 성령을 주시면서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하신 말씀이 곧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는 동안에 항상 내주하시는 성령하나님을 보고 살라는 말씀이 아닌가? ‘볼찌어다’라는 말은 강력한 집중력을 가지고 보는 것을 말하며 ‘차렷’이라는 구호와 일치하는 단어이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항상 차렷 자세로 대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은사가 나타나도 중요하지 않다. 또한 은사가 나타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성령이 내안에 계시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귀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계시면 하나님의 때에 은사도 나타나고 또 하나님의 때가 아니면 은사를 행하시지 않기 때문에 은사가 나타나고 안 나타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성령으로 내안에 들어와 나와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최고의 복이요 그 이상 귀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말씀의 지식이나 전달하는 프로그램으로 다른 교회의 교인들을 불러 모으고 은근히 그것을 즐기며 불신자들이 회심하지 않는 시대에 교회성장을 즐기는 못된 일을 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있어도 족하고 없어도 족하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내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보좌 앞에 그의 임재를 모시고 생활하기 때문에 그 보좌 앞에 펼쳐진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와 같이 마음의 파도가 없다. 잔잔한 파도도 없다. 마음의 평정을 가지고 산다. 그것이 주님이 성령을 제자들에게 약속하시면서 평강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6,27)

 

어제는 목사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은혜를 나누는 중에 어느 목사님이 하나님의 법궤를 말하면서 “장로님 말씀하신대로 다윗이 법궤를 모셔오는 일이 하나님의 임재로 푸니까 다 풀립니다. 참 놀랍습니다.”하면서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하였다.

 

아비나답의 집의 법궤는 방치된 임재,

나곤의 타박마당에서 웃사를 죽인 충돌하는 임재,

오벧에돔의 집의 법궤는 사모하는 임재요,

다윗성으로 법궤를 모셔오는 것은 모시는 임재이다.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장로님 여기에다가 홉니와 비느하스가 빼앗긴 법궤는 빼앗긴 임재로 하면 더 은혜가 됩니다.”라고 했다.

 

그렇다!

 

빼앗긴 임재.

방치된 임재.

충돌하는 임재.

사모하는 임재.

모시는 임재.

 

이 다섯 가지 가운데 속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하나님의 임재를 날마다 모시고 사는 다윗성의 임재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빼앗긴 임재의 상태가 아닌가?

아니면 오래전에 주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주님을 모시고 사는 개념도 의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주님의 임재를 모시고 살려고 하는데 주님의 거룩함과 충돌하고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무서운 생활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주님의 임재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어 이방인인 오벧에돔이 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내가 받을 복을 남들이 받고 있는 것을 아파하고 이방인도 받는 복을 받지 못한 것이 분하고 초신자가 받는 복도 받지 못하는 것이 원통한 사모하는 임재의 상태로 살고 있는가?

 

한시바삐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고 사는 복이 임할 때에 내가 다루지 못하는 내 인생의 문제가 씻은 듯이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은혜가 임할 것이다.

 

주님이 함께 계시면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주님이 함께 계시면 질병도 자녀교육도 먹고 사는 것도 어떤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목회도 전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안에서 증거 되는 사람은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만자 구하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그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그가 주시는 유리바다와 같이 잔잔한 파도도 없는 마음의 평정을 누리고 사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전도여행과 청소년훈련 제직훈련과 집중코스의 주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이다.

그리고 매 집회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그의 임재를 실행하는 집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고 사는 말씀과 실제로 순간순간 하나님을 모시고 먹고 마시고 자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여름행사로 주님이 허락하셨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고 살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분들은 다 참석하여 단 며칠만이라도 주님을 온전히 모시고 사는 생활을 경험함으로 남은여생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그날이 참으로 간절히 기다려진다. 이 땅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게 하시고 분초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고 말하고 행함으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함으로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고 사는 축복을 받는 생활이 이 땅에 시작이 되는 은혜를 받자. 아멘.

(*.8.212.205)